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28화 (128/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28화>

128. 리벤지 (3)

꺼졌던 생명의 기운이 다시 살아난 자.

나는 저런 현상과 비슷한 일을 겪어 본 적이 있다.

괴물 같은 생명력으로 무장했던 한 남자가 내 머리에 떠올랐다.

하이 뱀파이어, 노스페라투.

그와 비슷하나 상대는 훨씬 강력한 생명력을 지녔다.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그 이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생물의 법칙마저 초월한 존재가 회복을 마치고 붉은 눈동자를 나에게 고정했다.

귀족. 아마 그 단어와 가장 어울리는 존재가 아닐까.

나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첫 만남이 다소 거칠었지만. 소개 정도는 하도록 하지. 나는 라일라크다,”

아름다움의 악마.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그에게 붙은 이명을 알려 주었다.

그 이명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인정할 만큼 상대의 외형은 완벽했다.

미모로 판게아를 평정한 세계수의 엘프들을 오징어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뭔지는 모르겠지만. 죽이다 보면 죽겠지.”

“예의를 모르는 자로군……. 혹시 도마뱀 꼬리가 달린 뱀파이어를 본 적이 있는가?”

노스페라투를 말하는 건가?

가만있어 보니 라일라크라는 이름은 들어본 기억이 있다.

노스페라투와 싸울 때, 그는 자기 입으로 라일라크의 아들이라고 했었다.

나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스페라투를 말하는 거라면. 알고 있지. 설마 복수라도 하려는 거냐?”

“그렇다.”

상대는 당당하게 복수를 선언했다.

분명 노스페라투는 설정상 사생아라 하였는데.

모르긴 몰라도, 흡혈귀의 수장처럼 보이는 자가 직접 복수를 천명하는 건 신기한 일이다.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건, 그대가 내 아들을 알고 있다고 봐도 되겠군.”

라일라크의 발치에서 붉은색 기류가 일렁거렸다.

능력치로 따지면 대략 2500점 이상. 거의 대악마에 필적하는 혈마력이 들끓었다.

나는 무명을 매만지며 미소를 보였다.

“맞아, 내가 갈기갈기 찢어 놨어.”

오늘도 업보 청산으로 바쁘네.

나는 말을 내뱉고 곧바로 [암적뢰]를 펼쳤다.

파직, 검은색 전류가 튀었고 라일라크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여유로운 건가.’

나는 곧바로 [잔상 꿰뚫기]를 사용해 상대의 핵을 꿰뚫었다.

라일라크는 그때까지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죽여도 계속 살아난다면, 살아날 때마다 죽이면 되는 거잖아.

나는 간단명료하게 해답을 찾아내고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촤악, 촤악, 촤악!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키고 사지를 잘랐다.

아무리 재생 속도가 빠르다고 한들, 내가 공격하는 것보다 빠를까.

베고 또 베고. 적이 죽은 걸 확인한 것만 해도 두 자릿수를 채워 갈 무렵.

우웅.

온몸이 난자된 라일라크의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여태까지는 감지되지 않았던 미증유의 힘.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그림자 검술 6번, [투영]

신성력으로 라일라크를 감싸고 그 위에 마기와 오러를 덮었다.

이 공간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었다.

암적색으로 물든 세상, 그 속에서 나는 라일라크의 육신을 더욱 잘게 썰어 버렸다.

그러자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쨍그랑!

[투영]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깨졌다.

유리가 부서지는 것처럼, 그와 나를 둘러싼 장막이 무너지며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다.

누구의 짓이지? 나는 서둘러 플라우로스의 기운을 찾았다.

그는 시계탑주와 서로 공격을 주고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다면.’

시선을 내려 아래를 보았다.

적어도 100조각이 넘도록 절단된 라일라크의 육신이 사라졌다.

발밑에는 피로 흥건하게 적셔진 내 신발이 보일 뿐이었다.

“너, 이건 어떻게 한 거냐?”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칼을 역수로 쥐고 뒤쪽으로 찔렀다.

쿨럭, 누군가가 토해 낸 피가 내 등을 적셨다.

나는 칼자루를 쥐고 그대로 빙그르르 돌아, 칼날이 꽂혀 있던 라일라크의 육신을 두 동강 냈다.

툭, 투둑.

두 개의 서로 다른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상체와 하체가 찢어진 라일라크가 발치에 있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상대는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다.

단순히 나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할 뿐이다.

“물었잖아. 어떻게 한 거냐고.”

“나도, 모른다. 갑자기 어느 날부터 이렇게 되었다.”

라일라크는 피가 흥건하게 묻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힘겨워 보였다. 기만이라거나 조롱과는 거리가 아득히 멀었다.

당장에 내가 이 뱀파이어의 목숨을 끊고 탑주를 도와주러 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일어나.”

나는 라일라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상대는 의문을 표했다. 어째서 자비를 보이는 거지?

이런 감정을 지닌 채로 그는 멀쩡하게 몸을 재생시켰다.

“무슨 수작이냐.”

“복수하겠다며? 그러면 바닥에 엎어져 있으면 안 되지.”

상대가 가진 미지의 힘.

라일라크의 말을 빌리자면, 본인도 알지 못하는 것의 진위를 밝혀야 했다.

흡혈귀가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손톱이 길게 자라났다.

길고 붉은 손톱, 혈마력을 손에 응집시켜 무기처럼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발이 앞으로 나오며 공격 동작을 취했다.

쉭. 서걱!

나는 상대의 날카로운 손톱을 흘리며 팔을 잘라냈다.

사지가 멀쩡하게 잘린다. 상대는 고통에 신음하며 발을 뺐다.

그와 동시에 나는 흑도를 아래로 늘어트리며 전류를 일으켰다.

그림자 검술 5번, [암적뢰]

촤악!

또다시 라일라크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힘의 정체가 뭔지 모른다면.’

기억이 날 때까지 죽여 보는 수밖에.

* * *

시간이 제법 흘렀다.

어지러웠던 전장은 차츰 안정되며, 전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승기는 인간들의 방향으로 기울었고, 마족들은 결계진 한쪽에 몰린 쥐 떼와 같았다.

악마와 우리 실력자들의 싸움도 얼추 결과가 나왔다.

플라우로스 따라왔던 3명의 악마.

그중에서 둘이 목숨을 잃었다.

로빈 공작이 싸움에 합류하며 전투의 양상을 바꿔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 마족군의 숫자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전투는 이겼다고 할 수 있을까?

대악마.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면.

플라우로스가 죽지 않는다면 아직 승리를 입에 담기 힘들었다.

3번째 벽을 넘긴 대동맹의 실력자들은 모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결계진의 한 축에서 싸우고 있는 4인의 혈투에 그들이 낄 자리는 없었으니까.

“후우, 뒤졌냐?”

“……아직, 안 죽었다.”

“씨발, 뭔 뒤지지를 않아.”

나는 숨을 푹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먼 곳에서 빅토리아 5세와 미하일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지간하면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라일라크는 저들에게 굉장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도움은 고사하고 내 발목이 잡힐 가능성이 크다.

‘탑주도 점점 밀리는 것 같고.’

8위계에 다다랐다고는 하나 아직 경지에 익숙해진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둘의 대결은 플라우로스에게 유리해질 터.

이 상황을 뒤바꿀 수단은 하나. 내가 라일라크를 죽이고 탑주를 지원하면 된다.

“어지럽군.”

라일라크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죽는 것도 힘이 드는지, 아까부터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하긴 몇 초에 한 번씩 다섯 시간 이상을 죽기만 했으니 어련하실까.

“포기할 생각은 없어?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 보이는데.”

“일족의 복수를 위해 이 일에 자원했는데. 그대 같다면 그만두겠는가.”

“호오. 원수를 찾으려고 일부러 온 거야? 굉장히 아끼는 자식이었나 봐.”

“사생아다. 만약 내가 아끼는 자손이었다면 다른 악마의 부하가 되도록 두지는 않았겠지.”

아끼지도 않는 사생아를 위해 복수하겠다는 건가.

창의적인 또라이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일라크는 힘없이 웃었다.

“하지만 그놈은 하이 뱀파이어다. 일족의 가주로서 응당 피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

“이해할 수가 없네.”

“내 의무다. 그리고 딱히 이해를 바라지는 않는다.”

쉭.

라일라크의 신체가 가속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상대의 육체는 싸움을 시작하기 전과 거의 같았다.

이런 부조리한 현상도 그가 가진 미증유의 힘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물론, 이제 나는 그 힘이 무엇인지 자연히 깨닫게 되었다.

‘죽은 자도 살려내는 힘이라.’

내가 판게아에 와서 여태까지 겪은 정보를 종합하면 가능성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정체를 파악했으니, 다음은 그에 대한 대응책이 필요하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나름의 수단은 가지고 있었다.

“응?”

내가 움직이려던 때.

바닥에 흩어진 라일라크의 혈액이 내 다리를 붙잡았다.

직후에 그는 팔을 공중에 휘두르며 핏물을 흩뿌렸다.

나에게 쏘아진 핏방울이 대못처럼 변하며 날카로운 빛을 자아냈다.

‘이번에는 머리를 좀 썼네.’

티티티팅!

검과 피로 만들어진 대못이 충돌하며 맑은 소리가 났다.

몇 차례 검을 움직이니 그의 공격이 모두 허사로 돌아간 것이다.

“괴물 같은 놈.”

“괴물이 할 말은 아니지.”

라일라크는 죽음을 예상하며 몸을 뒤로 날렸다.

죽을 자리는 잘 아는구나? 나는 촉수처럼 다리를 붙잡은 핏물을 강제로 떼어내며 돌진했다.

서걱, 단번에 상대의 두 팔이 잘려나갔다.

‘타이밍을 잘 재야 해.’

정체 모를 힘이 다시 사용되면.

나도 그에 맞는 대응책을 꺼낼 생각이었다.

반복되는 내 참격에 라일라크의 육신이 고기 조각으로 변했다.

4조각, 8조각, 16조각.

가면 갈수록 그의 몸이 잘게 다져졌다.

나는 감각을 곤두세웠다. [초감각]과 [통달한 자]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려 노력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내가 바라던 일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찌릿.

세상이 멈추는 듯한 충격이 내 감각에 전해졌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저 멀리서 터지던 폭발도 멈춰 버렸다.

동시에 내가 지닌 4가지 기운이 모두 쭉쭉 빠져나갔다.

‘대가로 가져가는 건가?’

감히 초월자의 능력을 엿보는 대가가 이 정도인가.

나는 빠져나가는 기운을 붙잡으며, 전신에 오러와 마기를 퍼트렸다.

이어서 [검귀식: 그림자 검술]의 마지막 기술을 펼쳤다.

그림자 검술 8번, [그림자 참수]

드드드.

꽁꽁 얼어 있던 몸이 진동하며 조금씩 나아갔다.

[그림자 참수]는 시간의 벽을 잠시나마 허무는 기술.

두 대악마의 기운을 흡수하며 엄청나게 불어났던 마기의 반절이 단번에 빠져나갔다.

‘벤다.’

베고 말겠다.

열망을 담아내자, 몸의 진동이 사라지더니 드디어 팔다리가 말을 들었다.

라일라크의 육체는 치유되고 있었지만, 정작 그의 정신은 죽어 있었다.

그가 말했던 대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의 실체를 모르는 건 사실이었다.

“역시.”

나는 그의 몸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아주 희미하게,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미약한 빛이었다.

저런 유약한 힘이 만들어낸 결과가 이 정도인가.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물론, 아예 정신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스릉.

무명을 든 팔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끄러졌다.

상대의 약점을 보았으니, 응당 베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지체하지 않고 칼날을 움직였다.

- 변수, 너의 승리다.

흑도의 칼날이 빛을 반으로 가르려는 순간.

누군가의 사념이 내 정신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라일라크의 육신이 뒤로 움직이며 빠르게 봉합되었다.

그 과정이 너무 빨랐기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무명이 허공을 지나쳤고 나는 숨을 골랐다.

“후우, 후우.”

몸이 가볍다.

조금 전만 해도 육체가 부서지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는데.

시간의 벽을 깨부수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대가를 지급해 주고 있다는 뜻이리라.

“너를 죽이라고 신탁을 내렸던 때가 불과 몇 년 전일 텐데. 참으로 대단하구나.”

치유를 끝낸 라일라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껍데기만 그의 겉을 빌렸을 뿐, 속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푸르카스.”

나는 상대의 말을 무시하고 이름을 불렀다.

라일라크는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렇게 찾던 근원 도둑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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