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27화 (127/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27화>

127. 리벤지 (2)

시타델의 근위 마법병단.

그들은 헬란 영지의 서북부에서 지연전을 펼쳤다.

방법은 이렇다. 마족의 군대가 오는 지역에 대기하다가 마법을 쏟아 낸다.

압도적인 화력에 적이 주춤하면, 재빠르게 준비해 둔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사라진다.

여태까지는 그 방식이 제법 잘 먹혔다.

“모두 후퇴하라!”

어느 마법사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퇴각 명령에 마법을 난사하던 인간들은 일제히 플라이 마법을 펼쳤다.

그들의 뒤로 크로필라의 군대가 뒤쫓았지만, 일사불란하게 후퇴하는 마법사들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파앗!

눈부신 섬광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거대한 마법진, 그것이 만들어 낸 빛이 사라지자 마족들은 닭 쫓던 개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전장이 수습된 뒤, 스켈레톤 메이지가 변덕의 악마에게 보고했다.

“크로필라 님, 적들을 놓쳤습니다.”

“나도 보면 안다!”

분에 겨웠는지 크로필라는 입술을 씹으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럴 만도 하지. 벌써 수차례 같은 방식으로 당했으니까.

그녀의 군대는 처음보다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다.

게릴라처럼 치고 빠지는 마법병단 때문에 야금야금 병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만 출발하자고.”

나는 크로필라의 옆에 서서 헬란 본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가리켰다.

현재 우리는 헬란 서북부를 벗어나 중심지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이 속도대로 한나절 정도만 더 간다면, 분명 적들의 사령부를 타격할 수 있을 터.

분명 크로필라가 좋아할 만한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루카 님께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다만 그녀의 심중에는 불안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뭐가? 잘 가고 있는데.”

나는 군대를 따라 전진하며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플라우로스의 목표는 위협을 제거하는 것.

그의 부하인 크로필라의 목표도 당연히 똑같았다.

완전히 위협이 제거되기 위해서는, 한시바삐 인간의 최고 전력을 제거해야 했다.

“계획을 바꾼 건 너희 요청 때문이잖아.”

원래 우리는 천천히 요새를 무너트리며 진군했다.

하지만 크로필라는 포로 때문에 느려진 속도를 참지 못했다.

상대의 최고 전력, 시계탑주만 쓰러트리면 되었기에 요새들을 무시하고 본성으로 직행하자고 먼저 권유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적들의 방비가 너무 잘되어 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저들이라고 그냥 놀기만 했겠어.”

크로필라가 가진 의심은 정확했다.

인간들은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우리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함정을 파두었다.

하지만 본성으로 가는 길이야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르지 않다.

그 때문에 크로필라는 자신의 예감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루카 님께서 직접 나서 주실 수는 안 되겠습니까?”

“적의 최고 전력이라는 놈이 갑자기 휙 튀어나오면? 말했잖아, 나는 힘을 아껴둬야 한다니까.”

작전을 바꾼 이후로.

나와 깨비는 후방에서 마족과 마법사들의 싸움을 관망했다.

저들이 먼저 나서겠다고 말하기도 했거니와, 시계탑주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내가 힘을 비축해야 하니까.

이런 이유를 대자 크로필라는 순응하며 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 순간, 우리가 지나가는 길목의 양쪽 언덕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마법사가 만든 은신 마법에서 빠져나온 마법사들.

그들은 못 해도 4위계 이상의 마법들을 구현하며 앞서서 행군하던 마족군을 타격했다.

나는 곧바로 마기를 펼쳐 내 군대를 보호하며 외쳤다.

“다시 나왔다. 잡아!”

개에게 고무공을 던져 주듯.

크로필라는 내가 가리킨 언덕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정체는 슬라임, 하급 마물에서 시작해 거의 수백 년 동안 성장을 거듭해 악마에까지 오른 자였다.

“이 귀찮은 녀석들!”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던 크로필라의 몸이 액체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슬라임의 몸에 촉수가 자라나며, 언덕에 포진한 마법사를 공격했다.

‘일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어.’

로빈 공작,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이번 전쟁에서 로빈의 역할은 시간 벌기.

변덕의 악마와 적당히 놀아 준 다음, 순간이동으로 공간을 벗어나면 계획은 성공이다.

우리의 반대편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겠지.

덫.

헬란 영지와 판게아 대동맹이라는 거대한 덫.

저들은 석연찮음을 느끼면서도 진군할 수밖에 없다.

왜? 본인들에게는 대악마 중의 대악마인 푸르카스의 지원이 있고.

슬슬 마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내가 함께 있으니까.

피유우우우.

갑자기 저 먼 곳에서 연막탄이 날아올랐다.

마법을 통해 쏘아진 탄환의 꼬리에서 주황색 연기가 새어 나왔다.

플라우로스가 덫에 걸렸다. 나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서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크로필라는.’

그녀는 지금 한창 마법사 사냥에 전념하고 있다.

다리를 몇 번 움직이니 목표가 있는 곳까지는 단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반투명한 검은색 슬라임. 벌써 마법사 몇을 먹어치운 괴물의 촉수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먹잇감들이 많이 잡혀 있었다.

그림자 검술 5번, [암적뢰]

파직!

흑색 전류가 튀며 내 신형이 일직선으로 공간을 주파했다.

검을 정면으로 내지르며 적의 핵을 조준하자, 슬라임의 중심 부분을 감쌌던 액체가 밀려났다.

깔끔하게 뚫고 들어간 흑도는 그대로 크로필라의 핵을 부숴 버렸다.

“이, 이게 무슨!”

“이제 연극은 끝났다는 이야기지.”

크로필라는 슬라임의 형태로 나에게 덤벼들었다.

이미 핵이 파괴된 상태.

나는 크로필라가 온 힘을 다해 날려 보내는 촉수를 간단히 쳐냈다.

“으, 으으.”

그것도 잠시.

크로필라에게서 단말마가 나오더니 몸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핵이 파괴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육신이 분해되는 것이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기감을 헬란 본성 쪽으로 집중했다.

‘지금 당장 합류해야겠어.’

이쯤 되면 플라우로스도 배신을 눈치챘을 터.

탑주에게 빠르게 붙어줘야 쓸데없는 피해를 줄일 수 있으리라.

마침 로빈 공작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기는 내 부하들이 알아서 정리할 테니. 우리는 서둘러 본성으로 가세.”

“그전에 잠시만요.”

나는 언덕에서 내려와 후방에 남아 있던 나의 군대를 보았다.

깨비와 뿔족들, 그들의 숫자는 1만에서 거의 줄지 않았다.

눈빛에서는 투지가 들끓었고, 모두 남아있는 마족들과 싸울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나는 [림보 어]를 사용하며 깨비를 불렀다.

“깨비야,”

“네, 주군!”

항상 기합이 제대로 들어가 있다니까.

깨비는 내 자리로 부리나케 뛰어와 앞에 섰다.

“나한테 판게아 공용어 배운 거. 그동안 공부 많이 했지?”

“예,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이번에 제대로 써볼 기회야. 마법사들이랑 협력해서 마족들을 정리한 뒤에 영지로 복귀해.”

“저희는 따라가지 않습니까?”

“지금은 서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때야.”

“……알겠습니다.”

뭐든 하다 보면 느는 것이다.

깨비는 나에게 배웠던 공용어를 떠올리며 마법사들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마법사와 협공한다면, 남아있는 잔당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이제 가시죠.”

“그러세.”

기감을 넓히자 시계탑주와 플라우로스의 격돌이 느껴졌다.

그 근처에는 푸르카스가 보냈다는 악마의 기운도 여전히 존재했다.

목적지는 헬란 영지의 본성 근처.

나는 지체하지 않고 로빈이 준비한 마법진에 발을 올렸다.

파아앗!

빛이 터지며 순간이동 마법진이 나를 집어삼켰다.

* * *

헬란 본성.

눈을 떠보니 나는 저번에 보았던 부에르의 성체 내부에 있었다.

로빈 공작은 로브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근데 자네 친구들과 제사장 그리고 단주는 어디 갔는가.”

“데모니움 영지에 있습니다. 혹시나 대악마들이 저를 공격해도 시간은 벌 수 있게 하려고요.”

“음, 그렇군.”

최악의 상황은 바신이나 말파스가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

푸르카스와 대치하는 상황에 그럴 리는 없지만, 저번에도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는가.

뭐, 내 정체는 탄로 날지도 모르겠으나 세력이 사라지는 것보다는 낫다.

“그럼, 가시죠.”

“그러세.”

로빈과 나는 넓은 방을 빠져나와 전투가 이뤄지는 현장으로 떠났다.

전장은 가까웠다. 헬란 본성의 바로 앞에 있는 초원이 결전지였다.

드넓은 초원을 모두 감싼 보호막.

하늘 끝까지 닿아있는 반구형의 보호막이 내 시야에 잡혔다.

시타델과 신성 제국의 6위계 마법사가 모두 모여 완성한 결계.

저번에 시타델에서 로자리아를 가두는 용도로 사용된 마법을 개량한 것이었다.

그 크기와 위력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지시만 내려주시면 당장 결계에 틈을 내겠습니다!”

마법진의 근처에 도착하니 어느 6위계 마법사가 그리 말했다.

로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결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콰콰쾅!

따가운 폭발음이 고막을 때렸다.

결계 안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대악마를 비롯해 그의 군대 대부분을 가둬 버려야 했으니 오죽할까.

기감을 넓히니 프레스턴, 빅토리아 5세, 미하일 등등.

판게아의 핵심 전력들이 다른 악마들과 대결을 벌이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도우러 가겠네.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플라우로스를 만나러 가야죠. 나중에 봅시다.”

“무운을 빌지. 가자, 썬데이!”

마지막 말만 아니었으면 정상인으로 보였을 텐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드넓은 초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대악마의 기운이 하나. 아니, 거의 두 개인가?

푸르카스가 보냈다는 악마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어지러이 펼쳐진 전장을 가뿐히 뛰어넘어 격전이 펼쳐지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림자 검술 2번, [환영 활보]

나의 모습이 증식되며 넓은 공간을 아울렀다.

목표는 역시 약한 쪽. 나는 푸르카스가 보냈다던 악마에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창백한 피부를 가진 인간 형태의 마족.

유려하게 움직인 검은색 칼날이 상대의 머리를 잘랐다.

동시에 심장 부근에 있던 핵도 파괴해 버렸다.

연미복을 입은 남자는 땅에 쓰러졌고, 나는 곧바로 대악마와 싸우고 있는 탑주에게 말을 걸었다.

“도우러 왔습니다!”

“네놈! 네 부하는 어떻게 하고 이곳에 온 것이냐!”

대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나왔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피부를 녹여 버릴 듯한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쿠와아아아!

내가 서 있던 위치에 거대한 유성 같은 물체가 떨어졌다.

불길에 휩싸인 투창, 나는 잔상을 주르륵 남기며 그것을 피해냈다.

공격의 주체는 길길이 날뛰는 표범이었다.

플라우로스, 표볌의 외형을 띤 반인반수가 허공에서 창을 소환하며 물었다.

“어째서 우리를 배신한 것이냐?”

애당초 우리가 한배를 탔던 적이 있었나?

나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씩 웃었다.

원래 물어보는 걸 답하지 않으면 더 빡치는 법이거든.

내가 썩은 미소를 보여주기 무섭게 플라우로스의 손에서 화염이 타올랐다.

“대답은 목만 남겨서 듣겠다.”

쐐애액!

플라우로스의 손에서 빛이 터지자 한 번 더 투창이 날아왔다.

나는 공격을 유심히 살피며 창에 실린 위력을 가늠했다.

‘저건 좀 많이 위협적인데.’

위협적이다.

투창에 덧씌워진 화염은 일반적인 불꽃과 궤를 달리했다.

[환영 활보], 환영을 만들어내며 자리를 벗어나자 이번에는 창이 내 뒤를 따라왔다.

“하!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모습이…….”

퍼퍼펑!

통쾌하게 입을 열려던 표범의 주변으로 위협적인 마력 폭발이 일어났다.

그는 서둘러 몸을 피했고, 덕분에 나를 쫓아오던 투창은 지면에 떨어지며 사라졌다.

탑주는 순간이동을 통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 표범은 내가 맞겠네! 자네는 저 괴물을 상대하도록 하게.”

탑주의 시선이 멈춘 장소는 조금 전에 내가 서 있던 자리였다.

푸르카스가 보냈다던 악마가 쓰러져 있는 곳.

플라우로스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그곳에서는 붉은색 기류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중이었다.

“내 기술로는 죽일 수 없었네. 자네라면 혹시 모르지.”

탑주는 그 말을 남기고 플라우로스를 상대하러 떠났다.

대악마에 버금가는 기운을 지닌 악마. 그가 몸을 일으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죽였었는데.’

핵을 파괴하고 절명한 걸 확인 했는데도 악마는 다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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