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26화 (126/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26화>

126. 리벤지 (1)

며칠 뒤.

변덕의 악마는 다시 데모니움 영지를 찾았다.

그녀는 단순히 선물이라며 수천 명의 비마족 사람을 데려왔고, 나도 주는 선물을 굳이 마다하지는 않았다.

“플라우로스님께서 제안하신 일은 저번과 같습니다.”

같은 시기에 헬란 영지를 공격하자.

그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에게 줄 보상은 대폭 늘어났다.

정식으로 가져온 제안서의 내용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물론, 입으로는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지만.

“애매하네.”

[천의 얼굴]이 속에서 흘러나오는 흡족함을 억눌렀다.

내 반응을 본 크로필라는 난처해하며 말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뭐하지만, 그건 저희 영지에서 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성의가 보이기는 하는데. 좀 뭔가 부족하단 말이야.”

“그러십니까?”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말에서는 불만이 섞여 나왔다.

노예를 10만이나 주고, 거기에 온갖 무구류와 진귀한 약재들까지 챙겨주겠다는데.

여기서 더 큰 무언가를 바라는 나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는 것이었다.

‘뭐, 바라는 게 크기는 하지.’

그들은 소유한 노예의 대다수를 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얼마를 주든 비마족을 남겨두면, 데모니움 때처럼 인질로 잡히지 않겠는가.

이번만큼은 상대 영지에서 노예를 전부 받아낼 생각이었다.

“인페르노 영지의 비마족 전부를 줘.”

만약에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른 대악마들에게 둘러댈 변명이 생기니 나는 아무래도 좋다.

나는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나를 믿는다면, 굳이 기분이 상하게 인질을 잡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않겠어?”

“그 말씀은. 비마족 해방이 먼저라는 말이신가요?”

“맞아. 계획이 진행되기 전에.”

크로필라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역시 이건 좀 무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왼손 검지를 폈다.

“한 가지, 인페르노 영지에게 유리한 조건을 말해도 될까?”

“그게 무엇입니까.”

“헬란 영지를 차지하면 우리가 잡을 인간 포로를 모두 너희에게 줄게.”

이들이 비마족을 모두 해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영지 내의 노동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대안을 제시했다.

만약 우리가 사로잡은 인간들을 받는다면, 사라진 노동력 따위는 단숨에 해결될 터.

‘중요한 건 저들의 믿음이지.’

우리를 믿는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대악마급 전력이 둘이나 있는데, 과연 인간들이 버틸 수나 있을까.

신뢰가 바탕이 된다면, 이건 일종의 투자일 뿐이다.

지금 당장 목돈을 내놓고 시간이 흐르면 더 많은 돈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크로필라는 의외로 선뜻 대답했다.

설마 우리에게 무한한 신뢰를 품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영지가 풍전등화에 놓여 있다지만, 사실상 노예 반란군인 우리를 뭘 믿고 저러는 거지?

내가 고민하는 사이, 크로필라는 숨겨 뒀던 비장의 수를 꺼냈다.

“사실 림보 영지에서 지원군을 보내 주기로 했습니다.”

“저번에는 거절당했다더니. 갑자기?”

“자세한 내막을 듣지 못했지만, 일단 림보 영지에서는 악마 하나와 군대를 지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 뜻이었나.

크로필라는 순순히 내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은 신뢰가 아니다.

‘만약에 플라우로스를 배신하면, 자동으로 푸르카스도 배신하게 되는 거니까.’

두려움.

가장 강력한 대악마의 분노를 약소한 너희가 직접 감당할 수 있겠냐는 물음에 가까웠다.

크로필라는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는지, 표정을 풀고서 말을 이어나갔다.

“루카님께서는 림보 영지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허, 소문이라는 게 참 빨라. 어디서 들은 거야?”

“스티지아의 바신 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습니다.”

걔는 무슨 의도로 이 이야기를 해 준 걸까.

발라크를 중심으로 모인 동맹 세력은 당연히 푸르카스의 영향력이 약해지길 원할 터.

그렇다면 이건 짬 처리다.

본인은 나서기 싫으니, 반 푸르카스 동맹을 대표해서 인페르노 영지를 도우라는 말이다.

“듣기로는 푸르카스 님과 여전히 막역하시다고…….”

“누가 그러는데. 설마 바신이?”

“예, 이전에 동료였던 다른 악마들과도 만날 좋은 기회라고 하시며, 기꺼이 지원군을 양보하셨습니다.”

이놈이 선심 쓰듯이 나를 팔아먹네?

애당초 2대1이 되었다고 목숨을 구걸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우리 레라지에는 최소한 죽음 앞에서 초연했는데 말이야.

‘뭐, 그래도 내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푸르카스가 나의 정체를 아는 근원 도둑놈이라 해도 상관은 없다.

우선 내가 인간이라는 물증은 적어도 그의 손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상, 대악마들에게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릴 길은 없지.’

자폭이라도 하면 모를까.

괜히 반 푸르카스 동맹을 견고하게 만들지는 않을 터.

무엇보다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빠르게 진실에 가까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 나에게 지원을 요청한 사실을 푸르카스도 알아?”

“아직 어떠한 지원군도 약속받지 못했다고 말씀드려서 아마 모르실 겁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바신이 잘 못 알고 있어서 하는 말이야. 사실 나는 림보 영지에서 간신히 탈출해서 독립했거든.”

“네?”

선동에는 선동으로 맞서야 하는 법.

나는 그럴듯한 논리로 크로필라에게 내 입장을 설명했다.

“생각해 봐. 내가 만약 푸르카스와 사이가 좋았다면. 굳이 이런 먼 곳에 세력을 일굴 이유도 없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합니다.”

“아마 나랑 그쪽 악마랑 만나면 죽자고 싸우게 될 거야.”

“저희는 그런 사이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뭐, 너희의 탓은 아니지. 나와 푸르카스의 개인적인 악연이니까.”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변덕의 악마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보에 둔감한 너의 주군을 탓해라.

미끼는 물었고, 이제는 낚아채기만 하면 되었다.

“음, 이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인페르노를 돕는 건 힘들겠는데?”

크로필라는 충격을 받고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악마 하나를 지원하는 푸르카스. 대악마가 직접 나설 대종족 의회.

단순히 비교해 보아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우리가 나서지 않는다면 인페르노 영지는 승리하더라도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미 요청한 지원을 물리기에는…….”

크로필라는 어떻게든 내 마음을 돌려놓고 싶어 했다.

사정이 딱하다면야, 당연히 부탁을 들어줘야지.

나는 깊이 고민하는 척하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좋아, 이렇게 하자. 우리가 이 일에 개입하는 걸 푸르카스에게 알리지 마.”

“하지만 헬란 영지를 공격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단독으로 인간들을 기습한 거라고 둘러대면 되지.”

“오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인페르노 영지는 모든 노예를 나에게 양도하기로 약속했다.

고작 악마 하나의 도움을 받자고, 나의 특별한 부탁을 뿌리칠 수는 없을 테니까.

이제 남은 건 헬란 영지를 공격하는 일만 남았다.

* * *

데모니움 동부의 끝자락.

나의 명령으로 소집된 병력이 헬란 영지로 향하는 마지막 요새에 결집했다.

뿔족, 흑랑족, 와제트족, 아자크족.

전투 능력이 거의 없는 요정족을 제외한 모든 종족의 병력이 오와 열을 맞춘 채로 내 명령을 기다렸다.

‘이제는 어엿한 군대가 된 느낌이야.’

저번에는 영혼까지 끌어모은 1만이었지만.

숫자는 같아도 영지의 방비를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모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면면을 살피면서 군대를 이끌고 다가오는 악마의 기운을 느꼈다.

“일당백의 기개가 느껴지는군요.”

변덕의 악마, 크로필라.

그녀는 이번 원정에서 우리 군대를 따라다니며 여러 도움을 주기로 되었다.

진짜 목적은 감시자에 가깝겠지만.

“숫자가 적어서 불만이야?”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루카님께서 직접 원정에 참여하시면. 저희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1만.

확실히 다른 대악마의 병력에 의하면 아직 많이 작은 숫자다.

하지만 크로필라의 말처럼 중요한 건 나의 유무일 뿐.

얼마나 많은 병력이 이 전쟁에 참여하는가는 큰 관심사가 아니다.

‘플라우로스랑 대화할 수단은 가지고 있겠지.’

나는 악마에게서 신경을 끄고 병력을 전진시켰다.

깨비를 선두로 정돈된 군대가 헬란 영지를 목표로 나아갔다.

그 행렬의 뒤에서, 나와 크로필라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대로 간다면 시간에 맞춰서 공격할 수 있을 거야.”

“예, 오늘 안에만 공격하신다면 크게 상관은 없을 겁니다.”

선봉은 플라우로스.

나는 적들이 인페르노 영지와 맞닿은 경계에 병력을 보내면 그 틈을 찌를 예정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헬란을 향해 전진한 군대는 어느덧 적의 요새가 보이는 곳까지 닿았다.

“제 주군께서는 공격을 시작하셨답니다.”

크로필라의 보고.

나는 그것을 듣고 기감을 넓게 펼쳤다.

플라우로스가 날뛰며 생기는 파동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우리도 슬슬 시작하자.”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와 크로필라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말이 사라졌다. 이 정적이 뜻하는 바는 확실했다.

내가 먼저 나서달라는 뜻이리라.

당연히 나는 먼저 나설 생각이 없었다. 내 그윽한 눈빛에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첫 전투이니.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먼저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조금 기다렸다가 합세할게.”

“예, 그러면.”

결국, 크로필라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던 그녀의 군대가 빠른 속도로 요새에 달려들었다.

전속력으로 돌진한 마족군이 요새의 주둔군과 충돌했을 때.

쿵! 콰광!

폭발이 터지고 피 냄새가 코끝을 건드렸다.

전력의 차이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잠자코 지켜보던 크로필라까지 나서니, 상황은 인간 측에 더욱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쯤 하면 됐겠지.’

나는 선두에 있던 깨비에게 진군 명령을 내렸다.

“예, 주군! 전군 전진하라!”

“와아아아!”

큰 함성과 함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흑랑족의 등에서 내려 기운을 끌어올렸다.

투웅! 지면을 발로 차자 요새의 방벽이 금세 코앞까지 다가왔다.

인간들의 요새. 그곳에 다다른 나는 높은 곳에 올라가 존재감을 내비쳤다.

마침 나를 발견한 변덕의 악마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완승입니다. 이렇게 모두 쓸어버리시지요.”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어. 다 죽여서 뭐 하려고?”

“그게 무슨 말이신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크로필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자세를 가다듬고 내 가르침을 기다렸다.

“너희 우리에게 비마족을 전부 넘겨서 노동력이 없다며.”

“예, 그렇습니다.”

“다 죽여서 뭐 해? 보이는 족족 사로잡아야지.”

두두두두!

때마침 내 명령을 받고 요새로 달려온 뿔족 기병대가 부서진 요새의 문을 통과했다.

그들은 마족과 인간들을 가르며 전장의 안으로 뛰어들었다.

은근히 죽기 직전의 인간들을 살려 주는 것처럼.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이런 자잘한 부분을 잘 챙겨야, 나처럼 독립도 하고 대악마로 인정도 받고 하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정말 안타까워서 그러는데. 출세하려면 조직에 충성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네 주군이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을 잘 집고, 꼼꼼한 구석을 보여 줘야…….”

나는 점차 정리되어 가는 요새를 살피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혀를 움직여 혼을 쏙 빼놓는 건 자신이 있으니까.

그렇게 30분을 붙잡고 떠들자.

“주군, 요새 제압을 마쳤습니다. 적들은 수십 명 정도가 죽었고 대부분은 사로잡았습니다.”

“들었지? 이게 바로 수완가의 전쟁 방식이라고.”

“새겨듣겠습니다. 그보다, 이제 이동하시죠.”

말에 뼈가 담겨 있다?

라떼는 말이야, 그런 식으로 눈에 쌍심지 켰으면 출세고 뭐고 다 끝장이야.

나는 크로필라의 귀에 연거푸 선배의 충고를 심어 주었다.

그렇게 천천히. 하나씩.

최소한의 살생으로 적의 요새를 점령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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