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24화>
124. 퍼블릭 에너미 (4)
데모니움 본성.
나는 알현실의 권좌에 앉아 손님을 맞았다.
인페르노에서 찾아온 여인이 홀로 융단 위에 섰다.
본인을 변덕의 악마라고 소개한 여인.
크로필라는 검은 드레스의 치맛단을 살짝 위로 잡아당기며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뵙게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예고도 없이 데모니움을 방문한 이유는 금방 이해했다.
대동맹이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니, 자신들을 지원해 달라는 뜻이겠지.
나는 우선 인자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아직 남부는 완전히 정리되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오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어?”
“아닙니다. 데모니움 전체에 루카님의 명성이 퍼져 있는데, 어찌 험한 일을 겪었겠나이까.”
크로필라는 상당히 낮은 자세로 나를 치켜세웠다.
그만큼 상황이 안 좋다는 거지.
사정은 딱하지만, 나는 크로필라와 얼굴을 마주 보며 단언하듯 말했다.
“말은 고맙지만, 우리는 여력이 없어, 차라리 림보나 스티지아에 부탁하는 게 어때?”
이곳으로 오면서 이런 반응은 예상했을 터.
그녀는 선뜻 물러서지 않고 제자리에서 말을 이었다.
“물론, 두 영지에도 사신을 보냈습니다만. 부쩍 두 영지 사이의 긴장감이 올라가서 힘들다는 답변만 받았습니다.”
인페르노는 마계에서 영토가 가장 길다.
동쪽 끝으로는 헬란과 이어져 있고, 데모니움을 거쳐 서쪽으로는 스티지아와 림보에도 영토가 닿아 있다.
딴에는 여러 곳을 찔러본 모양인데.
‘전부 다 퇴짜를 맞았나 보네.’
우리가 데모니움 영지를 점령하는 사이.
발라크와 푸르카스의 신경전은 최근 들어 부쩍 과열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발라크가 먼저 푸르카스에게 어떤 압박을 가했다는데.
호호호, 나야 외부인이니 알 턱이 있나.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왔다는 건, 대종족 의회에는 도움을 요청하기 싫었다는 거 아닌가.”
나는 의도적으로 상대의 아픈 곳을 찔러댔다.
우리를 믿거나 긍정적으로 보았다면 가장 먼저 찾아왔겠지.
크로필라는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데모니움도 요새 진통을 앓지 않으셨잖습니까.”
“우리를 배려한 거다?”
“그렇습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할 만큼 저희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쪽도 알다시피 우리는 마족에 대한 여론이 별로라서.”
줄곧 마족들의 노예로 살아온 이들의 세력.
대종족 의회에는 마족들을 불신하고, 또 혐오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그런 부분도 꿰고 있다는 것처럼 크로필라는 미소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그저 부탁만을 드리려는 건 아닙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비마족을 데모니움 영지에 해방하겠습니다.”
“음.”
최근 몇 달 사이에 마계는 크게 변했다.
이전처럼 노예라며 비마족들을 깔보는 시선에서, 자신들과 동급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안 그러면 뚝배기가 날아가니 그랬겠지만.
“보상도 중요하긴 하지. 그래도 도를 넘어서는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어.”
“대종족 의회에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닐 겁니다.”
크로필라는 플라우로스의 제안을 설명해 주었다.
축약하자면 동시에 헬란 영지를 공격하자는 것.
이야기를 모두 들으니 불과 몇 달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날 대놓고 먹이려는 건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저번에도 그런 식으로 약속했다가 뒤질 뻔했는데. 레라지에에게 뒤통수 맞고.”
알현실에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직 배신을 당한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절대 더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이끌려는 수작질이 아니었다.
“아, 그게.”
“이만 돌아가 줬으면 좋겠어. 나는 쓰라린 상처를 감싸고 혼자 울어야 해서 말이야.”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희는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걸.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
“반드시 마음에 드실 만한 조건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어지간히 도움이 절실한가 보네.
크로필라는 자신의 주군과 상의하고 오겠다며 못을 박고서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뭐, 눈치는 좀 있어서 다행이긴 하네.
“주군, 인페르노의 요청을 받아들이실 생각입니까?”
잠자코 옆에서 대기하던 깨비가 슬쩍 다가와 궁금증을 풀어놓았다.
저들은 우리가 인간들과 사이가 안 좋다고 알고 있다.
저번에 데모니움의 부탁을 받고 인간의 영역을 공격한 일은 마계에 널리 퍼졌으니.
분명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황을 보고.”
나는 깨비에게 그렇게 말했다.
* * *
데모니움 본성 근처의 어느 숲속.
나는 그곳에 홀로 들어가 검을 휘둘렀다.
이미 그림자 검술의 숙련도는 끝까지 올라갔지만, 그래도 일이 없는 동안에는 꾸준히 수련을 해 주었다.
쉭, 쉬익.
검이 뱀처럼 움직이며 신형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렇게 얼마나 칼자루를 휘둘렀을까.
나는 땀에 젖은 얼굴과 목을 수건으로 닦아내고서 숨을 들이 내쉬었다.
‘주변에 훔쳐보는 사람은 없어.’
토끼녀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주변으로 기감을 넓혀 살펴본 다음, 나는 시선을 내려 무명을 슬쩍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여기서 수련을 멈추고 다시 성으로 돌아갔을 터.
하지만 지금 토끼는 헬란 영지에서 나머지 노예들을 옮겨오고 있다.
“해 볼까.”
굳이 토끼녀를 헬란 영지로 보낸 이유는 하나였다.
검귀의 기억에서 마지막에 보았던 움직임, 또는 검술.
그걸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스릉.
눈을 감고 검을 크게 휘두르자 검신이 떨리며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검귀는 마지막 순간에 검에 오러를 주입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그에 필적하는 오러가 존재하지 않으니.
‘마기를 사용해서.’
몸에서 흘러나온 칠흑의 기운.
야수처럼 거칠게 포효하며 구현된 마기가 무명에 깃들었다.
사용하는 기운이 달라서 그런지, 아니면 기억이 흐릿해서 그런지.
검귀의 몸에서 겪었던 그 느낌이 제대로 살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감았던 눈을 떴다.
“어째서 그걸 따라 할 수가 없는 거지?”
아주 어렸을 적에 희뿌옇게 남아 있는 추억이라고 해야 하나.
시각이나 청각적인 부분은 생생하지만, 뭔가 그 이상의 것은 희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가 부족하다. 무언가가.
신조차도 벨 수 있을 것 같은 기세.
그걸 재현하고 싶지만.
아무리 마기를 쥐어짜도 검귀의 기술을 따라 할 수가 없다.
설령 오러가 충분하다고 해도 그대로 구현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미지수였다.
나는 몇 차례 더 검을 휘둘러보았다.
슉, 쉬익.
동작은 단순하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단순히 대각선으로 베어 버리는 게 전부였다.
다만 그 동작에 담긴 의미가 안개 너머에 있는 실루엣처럼 멀게 느껴졌다.
‘근원을 얻으면 가능한 건가.’
아니다.
검귀에게는 근원이 없었다.
애초에 초월자만이 가지고 있는 힘이 검귀에게 있었다면 패배하지 않았겠지.
당분간은 더 고민해 보자. 나는 검을 집어넣고 숲에서 빠져나왔다.
“어이, 거기 좀 더 들어봐.”
“여기서 어떻게 더 들어. 형씨가 힘 좀 더 써 봐.”
“야! 내가 다 들고 있다니까? 무게 중심이 내 쪽으로 아예 넘어 왔잖아.”
데모니움 본성의 농장에는 많은 흑랑족이 열심히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도 워낙 호전적인 놈들이니, 작은 실랑이 정도야 약과에 불과하다.
저러다가 조금 투덕거리면 서열도 정리되고 좋지 뭘.
“주군. 수련은 잘 마치셨나요.”
본성으로 걸어가고 있자니 농장 일을 도와주던 흑랑족의 여인이 보였다.
검은색 늑대 귀가 달린 수인.
에버딘. 이번에 흑랑족의 대표로 뽑혔다는 인물이었다.
깨비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그녀도 항상 나를 주군이라 불렀다.
실제로 만나는 건 3번째. 에버딘은 어색하게 나를 부르며 뛰어왔다.
“어, 농장 일을 도와주고 있던 거야?”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서요. 그런 의미에서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에버딘은 주머니에서 곡물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녀는 헬란 영지에 있었을 적에 농장에서 일했다고 들었다.
헬란 영지가 몰락하고 인간들이 들어오기 전에, 에버딘은 일족을 규합하고 안정을 유지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그렇기에 투표로 대표 자격을 얻은 것이었다.
“데모니움 영지도 땅이 좋아서 그런지. 농사지을 맛이 나네요.”
“빛깔이 좋네. 다른 문제는 없고?”
“문제야……. 눈에 보이는 모두가 아닐까요.”
전쟁은 짧았으나 그로 인해 파괴된 것들은 많았다.
더욱이 데모니움 점령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다름 아닌 본성이었다.
그곳의 피해 복구를 담당한 종족이 흑랑족이다 보니, 근래에 에버딘은 아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도 뭐든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에버딘에게서 걱정과 희망이 절반씩 섞인 눈빛이 흘러나왔다.
노예에서 해방되기 무섭게 갑자기 한 일족의 수장이 되었다.
두 어깨가 무겁지 않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리라.
“이제 곧 헬란 영지에서 흑랑족이 더 도착하면 한결 수월해질 거야.”
“네, 분명 그럴 거예요.”
힘이 들어도 희망이 있다면.
에버딘은 그런 말을 내뱉으며 양해를 구하고 일터로 돌아갔다.
나도 본성으로 향하던 발을 움직이려던 무렵.
“응? 갑자기 진동이.”
통신구가 전해 주는 감각.
나는 빛을 발하며 작동하기 시작한 큰 구슬을 들고 자리를 이동했다.
‘무슨 일이지.’
스칼렛과 클리프가 온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와 인간들 사이에 다른 대악마가 있는 것도 아니니.
믿음이 가는 두 녀석도 이곳으로 옮겨오는 게 맞았다.
“아아. 내 말 들려?”
“루카! 우리 이제 데모니움 본성에 가까워졌어.”
통신구 너머에는 가장 먼저 스칼렛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야야, 나도 이야기 좀 하자. 루카! 어떻게 말도 안 하고 떠나냐? 너 진짜 그러다가 큰코다친다.”
“코는 네가 더 오뚝하잖아.”
“아니, 그게……. 칭찬이야 놀리는 거야?”
“클리프, 당연히 칭찬이지!”
두 바보가 통신구 너머에서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광경이 눈에 선하네.
나는 한숨을 쉬며 통신구를 손으로 두들겼다.
툭툭툭. 통신구와 손이 부딪치는 소리가 상대편으로 증폭되어 전해졌다.
그렇게 대화를 끊고 둘에게 통신을 연결한 연유를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통신은 왜 건 거야?”
“아아, 그게 유리엘 제사장님도 같이 가고 싶다고 하셔서.”
“……내가 보낸 토끼가 길을 안내하고 있지 않니?”
“응! 토끼 아주 귀여워!”
나는 혈압이 상승하며 목덜미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혹시 말이야. 지금 토끼 상태는 어때?”
“원래는 말이 되게 많았는데. 지금은 완전히 입을 닫아 버렸네요.”
대답은 적발의 소녀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편안하고 우아한 말투. 유리엘 제사장의 목소리가 통신구를 넘어오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혀로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모래가 씹히는 것처럼 입속이 까끌까끌하다.
인페르노와 판게아 대동맹의 전쟁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그보다 더한 전쟁이 이제 곧 데모니움에서 펼쳐질 테니까.
“일단 끊을게. 본성으로 와서 보자.”
“응, 네가 좋아하는 캄촤짜…….”
툭.
나는 통신을 끊고 그들이 오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칼렛이 마지막에 어떤 음식의 이름을 말했지만, 그런 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동안 뻣뻣하게 굳어 있던 나는 공허하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와, 좆됐다.”
진짜 세계관 최강자들의 싸움이 나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