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22화>
122. 퍼블릭 에너미 (2)
“루카 공! 지금 당장 협공해야 하오!”
말파스가 역정을 내며 나에게 소리쳤다.
바신은 조용히, 그리고 침착하게 뒤로 물러서는 중이었다.
“흐음.”
나는 애매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대치 중이던 두 괴물이 움찔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대악마 둘이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발라크와 푸르카스, 그리고 플라우로스만이 남는다.
적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점에서 장점은 확실하지.
하지만 그뿐이다. 현재 마계에 남아 있는 세력 중에서 가장 약한 곳은 우리기 때문이다.
변수가 사라진다.
실제로 내가 대종족 의회를 만들고 여기까지 온 것은 ‘변수’ 덕분이었다.
다른 대악마의 공격이 무서워서. 인간의 침략이 무서워서.
이 불안정한 상황이 깔려 있었기에 대종족 의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하자.”
내 결론은 이랬다.
두 대악마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고 있던 나의 대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파스는 불만을, 바신은 안도감을.
목숨이 달린 일이었기에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루카 공.”
“알아,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래도 봐봐. 이렇게 다들 살아 있잖아?”
레라지에는 죽었지만.
“내가 중재자가 되어 줄게. 일단 싸움은 여기까지 하고, 둘은 화해부터 하자.”
일방적으로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자.
말파스는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면서도 하는 수 없이 내 의견에 동의했다.
안 그랬다면 바신에게 목숨을 잃었을 테니까.
“좋소. 귀공의 뜻대로 하겠소.”
“나는 불만 없다. 괜찮다면 영지로 돌아가도록 하지.”
나는 슬그머니 물러나려던 뱀 꼬리 남자를 막아서며 말했다.
“음, 생각해 보니까. 이대로 끝내면 조금 섭섭하지 않나?”
“그렇소. 우리는 전쟁을 했고, 적대 관계를 해결하려면 마땅히 주고받을 게 있어야 하지 않겠소?”
턱을 살살 문지르며 운을 띄우니, 눈치 빠른 말파스도 분위기에 동조해 주었다.
대악마 자리는 눈치 게임으로 따셨나.
그에 반해 뱀의 꼬리를 가진 남자는 순간 살기를 피워 올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핵이 반쯤 부서져서 골골대는 주제에.
그런 말을 속으로 삼킨 것처럼, 바신은 눈에 힘을 주며 까마귀를 노려봤다.
왜 우리 말파스 기를 죽이고 그래욧!
나는 앞으로 나서며 마기를 퍼트렸다.
“말파스, 이번에 영지에 입은 피해가 어떻게 되지?”
“부하였던 악마 하나가 죽고, 요새 2개가 불타 버렸소.”
“전쟁이 시작되고 한나절만인 것 치고는 피해가 크네. 왜 그렇게 된 거야?”
“회담하자며 나를 끌어들여 함정에 빠트렸기 때문이오.”
주거니 받거니.
나와 말파스가 번갈아 가며 바신을 곁눈질했다.
조용히 살아서 나가고 싶다면 무언가를 내놓으라는 압박.
바신은 혀를 차며 나를 흘겨보았다.
“말해 두겠는데. 먼저 에레보스 영지를 치자고 제안한 자는 이 인마족이다.”
비장의 한 수.
바신은 손가락을 세워 나를 가리켰다.
말파스의 시선이 살짝 가까워지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어이가 없네. 이제는 아예 사기를 치시겠다?”
“그쪽이 먼저 편지를 보내서 에레보스를 치자고 종용하지 않았는가!”
“나는 말파스를 꼬드겨서 데모니움을 칠 생각이었지. 말파스, 내가 보낸 편지 받았잖아.”
“맞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이해가 안 되나 본데. 우리는 선의로 너를 살려 주겠다는 거야.”
쿠구구.
내 마기가 들끓으며 주변을 짓눌렀다.
지독한 독기를 뿜어내는 기운에 두 대악마가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바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당신들의 뜻대로 하겠다. 말파스, 당신의 요구가 무엇인가?”
“우리 영지의 복구 비용을 그대가 내주길 바라오. 그리고 당신의 악마 하나를 볼모로 잡아야겠소.”
영지를 복구하고 적의 악마 하나를 잡아 두는 것.
전쟁 이전으로의 회귀, 말파스가 요구는 그뿐이었다.
불만이야 당장 스티지아 영지를 치고 싶을 정도로 크겠지만, 나의 뜻이 바신의 생존이었기에 적당히 끝마쳤다.
“알겠다.”
바신은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음은 나의 차례, 나는 굳이 고민할 것도 없이 내용을 늘어놨다.
“영약에 사용할 약재들. 그리고 너희 영지 노예 5만을 줘.”
“5만이라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48000명은 어때?”
“4만을 주겠다.”
“47000명.”
“45000명. 그 이상은 힘들다.”
“좋아. 그렇게 하자.”
응?
갑자기 너무 쉽게 동의하는 내 모습에 바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4만 정도를 염두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더 얹어서 준다니 포기할 필요가 없지.
나는 몹시 억울해 보이는 남자에게 팩트를 꽂아 주었다.
“억울해? 전쟁을 걸어놓고 졌으면 토해 내야지. 안 그러면 말파스가 불안해하잖아.”
“맞소. 다시 전쟁을 걸어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신 공의 전력을 약화할 필요가 있소이다.”
까마귀의 지능이 엄청 높다더니.
말파스는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바신을 쏘아댔다.
결국,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가고 결정이 났다.
“그 정도 숫자면 우리 영지 노예의 30%다.”
“남은 70%를 잘 대해 주면 되지.”
“후우, 알겠다. 그럼 영지로 돌아가서 주도록 하겠다.”
“무슨. 당연히 다 줄 때까지는 여기에 있어야지.”
돌아가면 주둥아리 싹 닦고 발라크에게 구원 요청을 할 게 뻔한데.
말파스도, 나도 당연히 이대로 보내 줄 마음은 없었다.
“참, 말파스. 너도 영지에 남은 노예들 줘.”
“그게 무슨 소리오?”
형, 나 지금 너무 힘들어.
말파스는 그런 의미가 담긴 눈동자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도 받아 낼 건 받아 내야지.
“내가 구해 줬잖아. 너도 노예 2만에 영약에 쓸 재로 좀 줘.”
“음.”
말파스의 얼굴에서 싹 가셨던 근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비마족 노예는 영지에 온갖 노동력을 제공한다.
하급 마족들을 노동자로 쓸 수는 있지만, 마족 내에서는 그게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라고 들었다.
원래 전사는 일 같은 거 안 하는 거야.
대충 이런 논리로 노동에 대한 반발이 꽤 심하다.
내부의 불만은 대악마도 두려워하는 것.
더군다나 말파스의 영지는 과거에 내가 공격했고, 이번에 바신에게도 뒤통수를 맞았다.
그래서 나는 대안 하나를 제시했다.
“뭘 또 울상을 짓고 그러냐. 이리 와봐. 너는 저리로 좀 가 있고.”
나는 어깨가 처진 말파스를 부르는 한편.
바신을 저 뒤로 밀어내고 까마귀의 귀에 말을 속삭였다.
속닥속닥. 몇 차례 말이 오간 뒤.
“하하하! 그리하겠소.”
말파스는 미소를 지으며 날개를 펄럭거렸다.
모두가 원하는 바를 얻는 행위. 이게 바로 참된 거래가 아니겠는가.
모든 협상이 마무리되고 말파스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자, 두 분 모두 본성으로 초대할 테니, 모두 편히 있다 가시오.”
* * *
나는 둘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신구를 사용해 펠리스에게 연락했다.
통신구는 깨비에게 전해졌고, 전장을 수습하고 영지로 복귀해 방비를 강화하라고 명령해 두었다.
그 후에 나는 바신을 붙들고 말파스의 성으로 갔다.
높이 솟아오른 산봉우리 위에 놓인 거대한 성.
말파스는 그곳으로 초대해서 편히 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바신과 나는 각자 방을 배정받고, 몇 시간이 흐른 뒤에 저녁이 준비된 연회장으로 갔다.
“어서 오시오.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만찬이니, 마음껏 즐기시길 바라오.”
말파스는 정장 비스름한 옷을 입고 우리를 환대했다.
조금 전의 전투로 핵을 다친 상태.
약육강식의 세계답게 그는 최대한 그 부분을 숨기려 애썼다.
‘독이나 다른 함정 같은 것들도 없고.’
자리는 총 3개.
나는 안내를 받은 자리에 앉아서 식기구를 들었다.
마족들의 음식이라 해서 이상한 것들을 떠올렸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식사가 끝난 다음, 우리 셋만이 남은 연회장에서 처음으로 침묵이 깨졌다.
“사실, 이런 분위기에서 꺼낼 말은 아니지만. 당신에 대해서 듣고 싶은 게 있다.”
입을 연 사람은 바신이었다.
나는 태연하게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받았다.
“내 출생에 관한 거겠지?”
“그렇다. 당신만 한 실력자가 어디서 툭 튀어나왔는지. 그게 궁금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나는 둘의 말을 듣고서 잠시 뜸을 들였다.
일단 발라크는 근원을 갖고 있을 확률은 낮다.
물론, 최측근인 바신에게도 말하지 못할 내용이기는 하지만.
‘가능성을 두고 보자면 푸르카스일 확률이 높지.’
최강의 대악마.
나는 토끼녀에게서 들었던 정보를 떠올리며 말했다.
“슬슬 그거에 대해서 말할 때가 되긴 했지. 나는 림보 영지에서 왔어.”
림보.
그곳은 항상 저녁노을처럼 어두운 마계에서도 유독 더 어두운 지역으로 통한다.
덧붙여 푸르카스가 다스리는 가장 넓은 영지이기도 하다.
그 영지의 언어이자, 마계에서 널리 쓰이는 [림보 어]를 배운 덕분에 내 주장은 제법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 당신처럼 강한 인마족이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바신이 물었다.
그는 자신의 원래 주군이었던 발라크와 연대하여 푸르카스와 싸웠다.
해서 림보 영지의 악마들을 전부 잘 알았다.
‘이제 열심히 혀를 놀릴 시간이군.’
나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이란?
바로 대악마들끼리 피 터지게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마신의 근원을 가져간 대악마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면 더 좋을 터.
“궁금한 게 있는데. 정말로 푸르카스가 전력을 다해서 싸웠다고 생각해?”
나는 질문에 질문으로 응수했다.
바신은 얼굴을 살짝 갸웃거렸고, 말파스도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푸르카스는 단 한번도 진심으로 너희와 싸운 적이 없어. 그건 괴물이야. 더 이상 마족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고.”
공포와 혐오.
[천의 얼굴]의 효과로 내 표정에 그런 감정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를 듣는 자들의 상상력을 극대화하게끔.
“뭔지는 몰라도. 푸르카스는 막대한 힘을 손에 얻었어. 마치 신처럼.”
움찔.
두 대악마의 어깨가 동시에 들썩였다.
대악마들이 알고 있는 진실.
마신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그의 근원을 다른 대악마가 훔쳤다.
그 사실을 떠올린 말파스와 바신의 집중력이 더 올라갔다.
“신이라니? 무슨 일을 겪었길래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말파스가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고.
나는 겁을 집어먹은 어린아이처럼 몸을 살짝 떨었다.
“나는 원래 스티지아와 림보의 경계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의 부하들이 나를 납치해서 여러 실험을 했어.”
“굳이 당신을 잡아간 이유가 뭡니까?”
“몰라. 원래는 나 말고도 여러 마족이 많았어. 근데 무수히 많은 마족이 죽었고 마지막으로 생존한 게 나야. 그 덕에 이렇게 된 거고.”
대악마에 필적하는 힘.
그걸 실험으로 만들어 냈다면 당연히 신의 힘을 가졌을 터.
내 이야기가 끝나자, 입을 다물고 있던 바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발라크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그의 말은 이랬다.
발라크가 푸르카스와 대립한 이유는 푸르카스가 근원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물론, 모든 말을 믿기는 힘들었으나 적어도 우리 셋은 같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나는 림보 영지에서 가까스로 탈출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푸르카스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나를 쫓아오지는 못하더라고.”
“그럼, 왜 진즉에 말하지 않았소?”
“말하면 믿겠냐? 무엇보다 누굴 믿어야 할지도 몰랐다고.”
“그렇긴 하오.”
말파스의 말을 끝으로 대화가 멈췄다.
인간들과 푸르카스. 이 둘이 전 마계의 적으로 선포되는 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여러 대화를 나눴고 나름의 결론을 냈다.
“일단 나는 발라크에게 말해보겠다.”
“인간들은 내가 맡을게. 그놈들도 더 날뛰지는 못하게 해야지.”
바신과 나의 역할이 정해졌고.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셋은 앞으로 서로 믿고 의지하길 바라오.”
말파스도 이 애매한 동맹에 힘을 실었다.
언제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누더기로 만든 깃발 아래에서.
나와 두 대악마는 술잔을 기울였다.
‘두 세력은 앞으로 더 격렬하게 싸울 테니, 일단 시간은 벌었어.’
나는 음료를 마시며 계획을 짰다.
데모니움 영지, 우선 주인을 잃은 영지를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게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