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18화>
118. 네고시에이터 (3)
에레보스 영지의 서부 자치령.
비탄의 악마, 메리골드는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대악마 ‘바신’이 지배하는 땅은 어두운 밤에도 밝게 빛났다.
“가증스러운 놈들.”
인마족 여인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주군, 말파스는 대종족 의회라는 노예 반란군과 물밑에서 협상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일이 터졌다.
“하필이면 내가 서부 자치령에 있을 때, 일이 터질 게 뭐람.”
메리골드는 투덜거리며 책상에 놓인 여러 물건을 살폈다.
여러 동물의 외형을 가진 목각 인형,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동물들의 외형을 지닌 장난감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메리골드는 그것들을 만지작거리다가 인기척을 느꼈다.
똑, 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분명 대악마 바신과 관련된 이야기일 터.
비탄의 악마는 의자에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들어와도 좋아.”
그녀의 허락에 방문이 열리고 듀라한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영지의 경계를 지키고 있던 요새의 지휘관이었다.
“어떻게 됐어.”
“경계 밖에서 무력시위를 하다가 돌아갔습니다. 저희는 하달받은 대로 같은 수의 군대를 출병시켰습니다.”
“반응을 보겠다는 건데.”
가만히 있던 대악마 바신이 움직였다.
인마족의 정점이자, 가장 최근에 대악마 칭호를 받아 독립한 그가 에레보스 영지를 노린다.
메리골드는 통증이 느껴지는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저, 메리골드 님.”
“어, 왜?”
“말파스 님께서는 아무런 지시도 없으셨습니까?”
“혼란을 최대한 피하라고만 말씀하셨어. 여기서 줄을 잘 못 타면 양쪽에서 공격받을 거라고 하셨어.”
“그렇군요.”
스티지아와 데모니움, 그리고 대종족 의회까지.
에레보스 영지는 동쪽과 서쪽에서 포위된 형국이었다.
이번에 대종족 의회라는 놈들과 한판 붙은 것이 알려졌는지, 스티지아에서 꾸준히 정찰 부대를 보내 왔다.
‘사절을 보내도 자기들은 별 의사가 없다고 하니.’
말로는 잘 지내보자면서 뒤통수를 치는 꼴이다.
오늘만 해도 영지 경계에 군부대를 보내 상대의 반응을 살피지 않았는가.
이는 머지않은 시일 내에 공격을 강행하겠다는 뜻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선 요새의 방비를 강화하고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충돌은 피해. 나도 말파스 님께 간언해서 지원군을 받아낼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지금은 부하들을 독려하고 마찰이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수밖에.
메리골드는 상세하게 적힌 보고서를 읽으며,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어차피 혼자서 우리 영지를 집어삼키지는 못할 텐데.”
사실이 그렇다.
비교적 최근에 독립한 바신은 세력이 그리 크지 않다.
다만 원래 그가 모시던 대악마 발라크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푸르카스와 발라크, 그 둘은 대악마 중에서도 가장 강하기에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당장 두 대악마에게 겁먹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타르타로스.
마신께서 잠들어 계신다는 섬.
메리골드도 정확한 정보는 듣지 못했지만, 두 대악마는 그곳을 두고 각축전을 벌였다.
그 덕분에 푸르카스와 발라크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쓰기 힘들었다.
“안 되겠다. 일단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지.”
달칵.
메리골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목각 인형들로 보이는 장난감의 하나가 움질거렸다.
헬 하운드라고 불리는, 마계에서 가장 흔한 동물의 인형이었다.
“좋아, 이만하면 만족하겠지.”
정보의 질이 썩 괜찮다.
이 정도 정보라면 의뢰자가 만족할 터.
미소를 머금은 목각 인형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목각 인형의 꿈틀거리더니 일반적인 헬 하운드처럼 거대해졌다.
‘저번에 정보를 수집했을 때보다도 마계가 더 개판이 되어 가는 느낌이야.’
이렇게만 흘러간다면.
헬 하운드로 위장했던 강아지남은 포탈을 열고서 다시 차원의 외부로 사라졌다.
오늘도, 내일도 토끼녀가 던져 놓고 간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니까.
* * *
데모니움 북부에 있는 작은 성.
이번에 마족들이 떠나며 비어 버린 성에 새로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검은색 무복을 입고, 입을 다문 채로 나를 따라서 들어왔다.
“어떠십니까? 이만하면 지낼 만하시겠죠?”
나는 성의 내부를 차례대로 보여 주며 물었다.
그러자 아신과 말리크가 앞으로 나오며 가장 먼저 반응했다.
“와아! 이 정도면 주술을 연구할 수 있는 공간도 있겠죠?”
“검술 수련은 내성 정원에서 하면 되겠군.”
“물론이죠. 거처는 선착순으로 아무렇게나 정하셔도 좋습니다.”
내 허락이 떨어지니 장로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신은 압축 주머니에서 여러 두루마리를. 말리크는 허수아비를 꺼냈다.
뒤이어 시난이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두 장로에게 질세라 후다닥 뛰어갔다.
라시드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스르르 사라졌다.
암, 선착순은 뛰어난 암살자도 못 참지.
“단주님은요?”
이제 남은 사람은 검은 생머리의 여자뿐.
펠리스는 답을 하지 않고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면서 나를 두 팔로 감으며 품에 안았다.
“혼자서 고생이 많았구나.”
이런 급전개는 뭐지?
순간 당혹감이 밀려들어왔지만 그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바로 떼어놓지 않고서 그대로 입을 열었다.
“뭘요. 다 판게아를 위한 일인걸요.”
“그래, 그래도 이런 타지에서 고생이 많았다.”
“그랬긴 했죠. 일단 단주님이 지내실 곳부터 안내해 드릴게요.”
내 말에 펠리스는 포옹을 풀고서 다시 마주 섰다.
“그래, 그러자꾸나.”
펠리스의 거처로 쓰일 방은 내성의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원래는 이 일대를 다스리는 영주의 방이었는데, 일부러 내가 뿔족에게 부탁해 방을 정리해 두었다.
나는 내부를 살피는 펠리스에게 능청스럽게 말했다.
“제법 신경을 썼습니다.”
“그리 말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펠리스는 웃고 있었다.
이전에 무뚝뚝했던 모습에서 조금은 바뀐 건가.
이전에 설원 한복판에서 대화한 이후로, 그녀는 조금씩 결사단의 일원들에게 다가갔다.
얼핏 말리크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정예 그림자들은 펠리스에게 교육을 받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결사단이 전부 생활하기에는 나쁘지 않죠?”
“사실, 처음 올 때는 노숙을 할 각오로 왔다만. 생각보다 이곳은 제대로 된 곳이구나.”
“그렇더라고요.”
모스코스의 의뢰를 받아들인 후.
나는 헬란 영지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비마족과 결사단을 데려왔다.
늑대 수인인 흑랑족들과 뿔족들.
그들은 깨비에게 부탁해 적당한 거주지로 갔고, 나는 결사단을 데리고 헬란 영지와 가까운 성으로 왔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세력은 결사단이니까.’
물론, 신뢰할 수 있는 세력은 판게아에도 많다.
다만 세계수에게 영향을 제일 덜 받을 세력은 결사단이었다.
이들은 따로 신을 믿은 적도 없거니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검귀를 숭배하는 자들이니.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뭐지?”
펠리스는 잠시 본인의 침소를 구경하다가 시선을 보냈다.
결사단이 해야 할 일은 많다.
우선 주술이나 연금술 분야에서 와제트족이나 요정족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말리크에게 부탁해서 뿔족의 검술을 지도하는 방법도 괜찮았다.
“일단은 쉬면서 대기하셔도 좋습니다. 나중에 따로 비마족 대표들을 보낼게요.”
결사단은 2차 원정군에 속해 있었다.
한자 동맹과 평의회 연방.
그 두 세력에 끼여서 이제 막 마계에 도착한 탓에 아직 적응되지 않았을 터.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며 다른 종족들과 관계를 트는 게 좋으리라.
“알았다. 그러면 당분간 신세 좀 지겠다.”
“네, 그러시죠.”
대화를 마치고서 나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성문을 나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토끼녀가 폴짝폴짝 뛰며 다가왔다.
표정이 밝은 걸 보니 부탁했던 일을 끝마친 모양이네.
“토끼가 뭐래?”
“히히, 스티지아 영지에게 발이 묶여서 말파스가 움직이고 있지를 못한데요.”
“그런 거였나.”
움직임이 상당히 빠르네.
다른 대악마들처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도 아닌데 말이야.
나는 토끼녀가 전해준 정보를 모두 들었다.
“알겠어. 다음은?”
“흑랑족은 잘 녹아들 거 같아요. 우선 거주지를 만들고 헬란 영지에서 더 데려와야겠어요.”
“의외로 텃새 같은 게 잘 없나 보네.”
“그게. 저길 보시면 답이 나오실 거예요.”
토기녀가 작은 손으로 멀리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뿔족 전사들이 늑대로 변신한 흑랑족을 타고 질주하는 광경이 보였다.
친화력 보소. 다른 종족들과는 어떨지 모르지만 흑랑족과 뿔족의 사이는 상당히 좋았다.
“왜 저렇게 친하지?”
“성향이 비슷해서 그러지 않을까요.”
이대로 마계 정복이다!
저 멀리서 그런 포효가 들렸다.
그 말이 맞을지도. 나는 토끼녀의 의견에 동의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2m에 필적하는 덩치.
커다란 이빨과 크기에 맞지 않는 날렵한 몸놀림.
흑랑족은 전투용 탈것으로 최적화된 종족이다.
게다가 평상시에는 늑대 수인처럼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늑대 인간들과는 느낌이 다르다.
연공법을 가르친다면 쓸 만한 전력이 될 것이다.
“이제 인간들과도 교역을 텄고. 다음은 어쩐다.”
“원래는 말파스와 짜고 데모니움 영지를 양분할 생각이셨죠?”
“그랬지. 겸사겸사 헬란 영지와 경계를 마주할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대악마 바신의 움직임이 조금 빨랐던 탓에 계획이 어그러졌다.
뭐, 지금까지로만 따진다면 오히려 원래 계획보다도 상태가 더 좋아졌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가장 아픈 손가락은 데모니움 영지의 노예 수용소.
지금의 전력으로 데모니움과 정면에서 붙으려면 결사단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리스크가 조금 컸다.
“아직은 내가 인간이라는 정보를 알려서 좋을 필요가 없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세력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까지는 숨기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면 어디 보자.”
조금은 뜻하지 않게 헬란 영지의 교류 루트를 텄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인간들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사람이나 물건들을 옮겨야 할 터.
천천히 클리프나 스칼렛을 들여오려면, 데모니움 영지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오히려 발상의 전환을 해 보는 거지.”
우리를 제외하고 가장 약한 곳은 데모니움.
말파스가 이끄는 에레보스 영지는 혼자서 공격하기 조금 곤란하다.
가장 좋은 건 친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니.
“혹시 말이야. 강아지남을 시켜서 쪽지 같은 것도 전달할 수 있어?”
“가능은 합니다. 바신에게 편지를 쓰시려고요?”
“눈치 게임에서 분위기가 바뀌었다면 목표도 바뀌는 거지. 그리고 따로 확인할 것도 있고.”
괜히 데모니움 영지에만 목을 맬 필요가 없다.
어차피 앞으로도 다른 대악마들의 행동에 따라 계획은 수정될 터.
그때도 상황이 바뀌었다고 멍하니 기다릴 수는 없잖은가?
이왕이면 가능한 많은 것들을 얻어 내는 쪽으로 움직여야 했다.
“아, 어떤 전략인지 대충 알 것 같아요.”
토끼녀는 손뼉을 치며 내 뜻을 이해했다.
이후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바신에게 보내는 미끼이자 함정. 나는 토끼녀에게 내 의사가 적힌 편지를 주었다.
그리고 두루마리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보내는 제안서를 2개 작성했다.
“둘 다 내용이 다르네요?”
“적들을 헷갈리게 만들어야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커질 테니까.”
이건 영토와 목숨을 건 눈치 게임이다.
함정과 미끼가 난무하는 계략. 그 안으로 대악마들을 끌어들이면 다음은 간단하다.
누구의 손에 내 손을 얹어 줄지, 그것만 잘 선택하면 되었다.
누군가 싸움은 이겨 놓고 하는 법이라고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