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17화>
117. 네고시에이터 (2)
깔끔하게 반품당한 모스코스.
그가 다시 되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1주일이 흐른 후였다.
이전에는 내용도 들어보지 않고 쫓아냈지만, 다시 돌아온 모스코스의 말은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뿔족과 와제트족.
뼈다귀가 수천 명에 달하는 노예들을 이끌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선물을 들고 온 손님이 문을 두들기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냉큼 맞이해서 냉수라도 한 잔 건네줘야지
그런 보답이 못마땅한지, 모스코스는 심기 불편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리치는 물을 못 마신다.”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렇다고 자리를 그냥 비워 두기도 뭐 하잖아?”
갑자기 까칠하게 굴긴.
모스코스는 잠시 물컵을 바라보더니, 그가 끌고 온 자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영지의 일이 있어서 모든 비마족인들을 데려오지는 못했다.”
“무슨 일이길래 약속도 못 지키셨을까?”
“그건 말해 줄 수 없다. 그것보다 우리의 영지로 인간들이 쳐들어왔다.”
어머나, 세상에.
동네 사람들 여기 좀 보세요. 인간들이 쳐들어왔데요!
나는 일부러 입을 크게 벌리며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자칫 잘못하면 이 세계가 저들의 것이 될 수도 있는 일이지.”
뼈다귀는 진실에 조금씩 살을 더하며 겁을 주었다.
지금 저 병력으로 마계를 먹어치워?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대악마를 상대할 전력도 없는데.
어떤 방식으로 마족을 이길 수 있을까.
“에이, 몇 달 동안 헬란 영지에 박혀 있는 놈들이 뭔.”
“아니다! 인페르노 영지에서 받은 정보이니 읽어 보면 되지 않겠는가.”
뼈다귀가 건넨 문서.
나는 그걸 대충 보는 척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내용이야 뻔하다. 악마급 전력이 많이 추가되고 병력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이야기.
불의 땅이라 불리는 그 지역은 한창 싸움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다만 전투는 지역 경계에서 제한적으로 발생했다.
팔라우로스는 주변의 다른 대악마를, 인간들은 대악마에 맞설 전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응이 왜 그런가. 당연히 인간에게 맞서 싸워야 하지 않겠나?”
“우리 대종족 의회는 인간을 마냥 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아서 말이야.”
떨떠름한 반응에 상대의 뼈에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화나셨어요? 어쩌라고요.
마족이 쌓아 온 업보다. 그러게 누가 비마족을 억압하고 판게아로 쳐들어가라고 했나.
“다른 비마족들은 몰라도, 그대는 우리와 같은 마족이다. 부리고 있는 수하가 비마족이라고 해서 그대도 안전할 듯싶은가?”
“그건 좀 설득력이 있네. 좋아, 같이 싸워 줄게. 대신에 정산은 끝내야지.”
데모니움 영지와의 거래는 아직 안 끝났다.
나는 그들과의 약속대로 에레보스 영지를 쳤고.
그들이 약속한 노예들을 전부 받기 전까지는 새로운 계약을 맺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건.”
상대의 말이 멈추고 정적이 길게 흘렀다.
저들도 알고는 있겠지. 수용소에 붙잡아둔 노예들이 목숨줄이라는 걸.
에레보스, 대종족 의회, 판게아 대동맹.
현재 데모니움은 이 3개의 세력에 둘러싸인 형국이다.
남쪽에 인페르노 영지가 있지만, 그들도 인간들 때문에 벅찬 상황이다.
“정 뭐하면 에레보스에 연결해 드릴까?”
“아, 아니. 그건 정중히 거절하겠다.”
에레보스와 연합하면 제일 든든하긴 할 터.
대신에 그 강력한 힘을 손에 얻는 대가로 치러야 할 것들이 두려울 것이다.
수용소의 노예들은 돌려줄 수 없는데, 우리와 연합해 인간들과는 맞서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완전 개새끼들이잖아?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정산도 다 안 하고, 새로운 일거리만 던져 주는 거잖아.”
“그건 우리의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미안하다.”
모스코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저놈들은 염치도 없거니와 개념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아무런 먹잇감도 안 들고서 여기로 찾아왔을 리가.
“됐고. 그래서 여기에 온 이유가 뭔데.”
“인간들의 영역을 공격해 주었으면 한다. 저번에 에레보스를 공격했던 것처럼.”
“그러면 우리는 뭘 얻는데?”
“북부. 데모니움 영지의 북부를 모두 주겠다.”
영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네.
괘씸한 걸 따지자면 당연히 거절해야 옳겠지만.
우리의 1순위 목표는 세력 증강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영토를 확보하고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면, 저들이 제안한 방식도 나쁘지는 않았다.
‘놈들의 생각은, 대종족 의회와 인간들을 적대시하게 만들겠다는 거겠지.’
데모니움의 북부는 헬란 영지와 닿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을 공격하고 북부를 손에 얻으면 뒷일은 뻔할 터.
인간들과 우리는 손을 잡지 못하니, 데모니움 입장에서는 적으로 적을 물리치는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시간을 벌거나 우리와 인간의 연합을 막으리라.
“어차피 헬란 영지에는 다른 비마족도 많지 않은가? 이참에 다른 비마족도 해방할 기회다.”
모스코스는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런저런 말을 내뱉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이전에는 세력을 만들기 전이라 두고 왔지만, 헬란 영지에도 부에르가 부리던 비마족 노예들이 있다.
“이 근처에서 노예를 가장 많이 부리던 너희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냐.”
“나, 나머지 노예들도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면 반드시 주겠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앙금은 잊고 외부의 적에 맞서…….”
“그렇게 할게.”
너무나도 쉽게 동의를 구하자.
모스코스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애당초 저들은 비마족 노예를 줄 생각이 없다.
노예는 나중에 받으러 간다고 치고, 이걸 구실로 필요한 물건을 받아 낼 수도 있었다.
“왜, 싫어?”
“물론! 좋고말고.”
“대신에 오늘부터 당장 북부에 군대를 빼. 빈자리는 우리의 군대가 채워 나갈 테니까.”
“그야 당연한 말이다. 친우여, 정식으로 동맹을 맺게 되어 정말 영광이다.”
“친우라? 친우 좋지. 그럼 우정의 증표를 좀 보여 줘. 깨비야!”
“옛!”
뒤에서 대기하던 깨비가 앞으로 나와 종이를 내밀었다.
마족의 문자로 적힌 나의 요구사항.
저들의 고혈을 쥐어짤 착즙기 정도로 보면 좋다.
내가 손을 내밀며 확인해 보라고 하자, 모스코스는 조심스럽게 내용을 읽었다.
“너희들이 약속을 못 지킨 걸 이걸로 퉁 치는 거야.”
“으음, 주군께서도 분명 고맙게 여기실 것이다. 당장 가서 건의해 보도록 하겠다.”
회담이 끝난 뒤.
모스코스는 노예들을 두고서 데모니움 영지로 돌아갔다.
나는 그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깨비에게 물었다.
“행정관은 어디 있어?”
“본성 근처에서 농장을 둘러보고 계십니다.”
“가서 좀 불러와.”
“예, 알겠습니다!”
에레보스의 사절.
금방 병력을 보낸다던 놈들이 감감무소식이다.
설마 이 절묘한 시기에 애꿎은 우리를 치려고 하지는 않을 터.
영지 내에서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
“절 부르셨다고요?”
슈우웅.
요상한 포탈을 통과해 토끼녀는 내가 있는 곳으로 나타났다.
“에레보스 영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봐.”
“……저희가 어떻게요?”
“그냥 차원 밖에서 슉하고 보고 오면 되잖아. 신이 그것도 못 해?”
내 지시에 토끼녀는 곤란한 듯 두 손을 모으며 꾸무럭거렸다.
“히히, 그게 됐으면. 저희도 근원 도둑을 찾겠다고 이 고생을 안 하죠.”
난 또 이렇게 태연하게 물어보면, 갑자기 알아보겠다고 쉭 다녀올 줄 알았지.
토끼녀는 본인들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지켜냈다.
이놈들은 무슨 공무원도 아니고, 왜 이리 구분이 명확하고 안 된다는 게 많아.
“그러면 방법이 없다는 거야 뭐야. 너희가 알려 줬던 마계 정보는 어디서 난 건데?”
“후후, 그거야 저희의 뛰어난 기술력으로 찾아낸 정보죠.”
“그럼, 제발 그 능력으로 근원을 가진 대악마 좀 찾아봐.”
토끼녀는 내 말에 한복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들었다.
“안타깝지만 그건 힘들어요. 루카님이 그러신 것처럼,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면 대악마들도 정체를 간파해 낼 테니까요.”
“음, 그렇다는 건 네가 직접 가서 정보를 수집하겠다는 거야?”
“여태까지는 직접 가서 알아보긴 했죠. 근데 저는 여기 일이 바쁘니까. 특파원을 잠입시킬 거예요.”
토끼녀가 그리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녀의 부탁을 받고 마계를 돌아다닐 누군가를 떠올렸다.
‘불쌍한 토끼 놈.’
* * *
데모니움 북부를 지키던 마족들.
그들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거주지와 성을 비우고 남부로 내려왔다.
이 결정에 불만은 지닌 자들도 많았지만, 대악마의 결정에 왈가왈부할 마족은 없었다.
“철수는 모두 끝났나?”
이번 일의 책임자.
모스코스가 수레를 끌고 오는 수하에게 묻자, 고위 마족은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수레에는 여러 문서나 지도처럼, 데모니움 영지에서 작성된 비밀문서들이 가득했다.
“문서 이외에는 가져오지 않았기에 금방 끝났습니다.”
“음, 알겠다. 수레는 일단 본성으로 가져가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는 착잡한 마음에 손뼈를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지금은 대종족 의회가 되어 버린 반란군들은 데모니움 영지의 북부를 휩쓸었다.
그리고 방어에 용이한 서북부에 둥지를 텄다.
어찌 보면 어렵게 지켜낸 동북부도 내어 주는 꼴.
‘그놈들에게 노예와 영토, 그리고 귀한 약초까지 내어 주다니.’
모스코스의 뒤에는 식물이 잔뜩 실린 수레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이건 데모니움 영지에서 추가로 우정의 증표로 보내 줄 선물이었다.
말이 선물이지. 사실상 약속을 지키지 못한 대가일 뿐이지만.
“모스코스님, 저들이 인간의 영역에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빨리 끝났군.”
정찰병을 통해 인간의 영역에서 거대한 불길이 올라오는 것은 확인했다.
고작 하루 만에 약탈을 끝내고 돌아오는 것이었으나 문제 삼지는 않았다
목적은 습격 그 자체. 어차피 피해 규모가 어떻든 큰 상관은 없다.
“인간들 쪽은 어떠한가?”
“데모니움 북부와 맞닿은 지역에 인원을 늘렸습니다.”
“우리 쪽 전선에서는? 그게 가장 중요하다.”
“확인하기는 어려웠으나 일단 병력을 뒤로 물리고 재정비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일단은 원하는 대로 되었군.”
말과는 다르게 모스코스의 몸에서는 거친 마기가 피어올랐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필이면 노예 반란이 이곳에서 일어나다니.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수습이 안 된다는 것.
‘어쩔 수 없어. 상대는 대악마의 심복이거나……. 그 이상일 테니.’
가증스러운 갈색 머리 인마족은 말파스와 싸워서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대악마에 필적하는 강자라는 뜻.
저만한 실력자가 과연 이름을 알리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을까.
모스코스는 거대한 의문에 휩싸였다.
“모스코스님. 저들의 사절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루카라는 자가 직접 오는 건가?”
“아닙니다. 뿔족 노예가 헬란 영지에서 구출한 흑랑족을 타고 오고 있습니다.”
“미천한 노예 주제에.”
언제부터 저놈들이 우리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는가.
모스코스는 몸을 휘감는 모멸감에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물자는 대충 넘겨주어라. 나는 레라지에님에게 보고하러 가겠다.”
“알겠습니다!”
모스코스는 해골마에 올라타 본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등 뒤에는 인간의 영역에서 돌아온 반란군과 구출된 노예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못해도 수천 명에 이르는 인파.
다른 마족들도 그 군집에 굳이 신경을 두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주인을 거스른 소유물들.
반란 노예들이 주제도 모르고 난리를 떠는 모습을 그 누가 보고 싶겠는가.
다른 마족들도 반란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약속된 물건들만 전해주고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노예들의 틈에 섞인 정체불명의 존재들을 알지 못했다.
그림자를 닮은 암흑의 무사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