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16화 (116/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16화>

116. 네고시에이터 (1)

헬란 영지.

이제는 온전히 인간의 소유가 되어 버린 지역.

헬란의 남동부는 대악마 플라우로스가 지배하는 ‘인페르노’ 영지와 맞닿아 있다.

인간과 마족, 절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이 만났으니 어디 조용하겠는가?

쿠르릉!

십수 개의 번개가 지면을 강타했다.

세 자릿수에 육박하는 마족을 구워버린 알렉스가 홀로 지면 위에 서 있었다.

그는 거대한 파워 슈트를 입고서 전진을 거듭했다.

“이놈들은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오네!”

파지직.

면전으로 다가오는 마족 무리.

알렉스가 그들을 향해 손을 뻗자, 고출력의 전류가 튀어나와 적들을 모두 태워 버렸다.

하루하루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매일 마족 1000마리를 잡지 않으면,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여기는 어때?”

정신없는 와중에 허공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알렉스는 굳이 소리의 주인을 찾지 않고 연달아 낙뢰를 소환했다.

한 차례 번개 폭풍이 일대를 휩쓴 뒤, 알렉스는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보면 알잖아! 엘리스, 자꾸만 놀고 있을래?”

“뭐래, 방금도 오우거 하나 잡고 왔구만.”

스르르.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유난히 작은 파워 슈트가 나타났다.

엘리스라고 불린 여자의 텔런트는 [은신], 그녀의 임무는 지휘관급 마족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알렉스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조용히 물었다.

“그보다 스칼렛 못 봤어?”

“응?”

알렉스는 육중한 파워 슈트를 움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근처에서 고위 마족 모가지를 비틀고 있었는데.

그는 습관적으로 파워 슈트의 옆머리 부분을 긁적였다.

“그러게.”

“이상하게 다른 높은 사람들도 사라진 것 같아.”

엘리스의 말에 알렉스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묘하게 전장에서 빈 느낌이 들더라니.

지금 보니 전장에서 날뛰던 프레스턴도 보이지 않았다.

핑거톤의 간부들과 탐정들은 제자리에서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지만.

“설마 도망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냐. 아무래도 지휘부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둘은 대화를 화면서도 꾸준히 마족들을 처치했다.

원래는 전선이 이렇게 치열하지 않았다.

시계탑주, 시타델 최고의 대마법사가 전선을 든든하게 지켜 줬으니.

하지만 그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사라진 이후부터는 조금 버거운 느낌이었다.

퍼퍼퍼펑!

알렉스가 처리하려던 마족들의 발밑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그동안 숱하게 보았던 마법, 두 사람은 어떤 인물을 떠올리며 후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금테 안경을 착용한 중년의 남자, 둘의 스승이 뒤에서 플라잉 마법을 사용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페트릭 교수님!”

“스칼렛이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인지 아세요?”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왔단다. 다들 짐부터 싸려무나.”

“예?”

“이 전선은 어떻게 합니까?”

둘의 의문은 지당했다.

‘간신히’라는 표현까지는 아니지만, 인페르노와의 전투는 쉽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전력을 더 뺀다면?

정말로 마족들에게 패퇴해 전선을 물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리라.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여기는 새로운 분들이 맡아 주실 테니.”

페트릭은 그리 말하며 적진의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통찰], 그는 자신이 바라보는 것의 정보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설령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더라도 그의 텔런트를 쓰면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음, 인페르노 놈들도 일단 숨 고르기를 할 모양이구나. 우선 후방으로 이동하자꾸나.”

둘은 페트릭 교수를 따라서 후방에 마련된 요새로 돌아왔다.

요새에는 복귀자를 대체하려는 인력들이 전선으로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조금 이상했다.

연방에서 사용한다는 기동 갑주,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한 드워프 전사들.

그동안 전선에서 모습을 보지 못했던 자들로 요새가 가득했다.

“2차 원정군이 이제 막 도착했단다.”

“아, 그래서 우리가 빠지는 거구나.”

“휴, 이제 한숨 좀 돌리겠네.”

알렉스와 엘리스는 긴장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페트릭은 대견한 두 제자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인페르노 영지의 마족들이 쳐들어온 이후부터,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해 본 적이 있었는가.

제자들은 훌륭하게 맡은 소임을 다 했다.

“쉬는 중에 미안하지만, 바로 이동해야 할 것 같구나.”

“지금 당장이요?”

“그래, 이제 서북부 전선으로 이동해야 하거든.”

“교수님, 거기는 마족과 대치 중이라고만 들었습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겁니까?”

데모니움 영지.

그곳과는 여태까지 단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았다.

2차 원정군이 왔다면, 1차 원정군과 합세해서 인페르노 영지를 공격해야 하지 않나.

그렇지만 페트릭 교수는 본인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동맹을 만들 기회라는 말만 들었단다. 일단 전투는 안 일어날 거라니 안심하려무나.”

지휘부의 책략이라는 것밖에는.

페트릭도 그 이상의 정보를 알지는 못했다.

* * *

대종족 의회.

우리는 이런 이름을 내걸고 새로운 세력임을 천명했다.

새로운 연합체를 만들었으니, 그들의 대장 격인 나는 요즘 쉴 틈 없이 바빴다.

오늘만 해도 뿔족의 거주지를 돌아보고 요정족의 약초밭을 찾아온 참이었다.

“이렇게만 하면 치료제는 금방 제조할 수 있을 거예요.”

요정족의 대표, 이바나.

그녀는 과제를 가장 먼저 달성해 내게 가져왔다.

요정족의 과제는 전투에서 사용할 각종 연금술 물품을 제조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치료 물약. 그녀가 나에게 가져온 주황색 물약은 상당히 효능이 좋았다.

“생각보다 빨리 만들었네.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원래 있던 걸 조금 변형했을 뿐이거든요.”

“마족들이 인간의 치료제도 만든다는 게 신기하네.”

“원형은 마족들이 독약으로 사용되던 거예요. 근데 우리에게는 그게 약이 되더라고요.”

“뭐, 신기하긴 하네. 그래서 애들에게 먹일 영약은?”

치료제 다음은 영약이다.

뿔족이나 다른 종족이 빨리 성장할 수 있도록 보조해 줄 수단이 있으면 편하니까.

이바나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문제없어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요.”

이바나의 자신감은 당연했다.

말파스에게서 받은 영토에는 요정족들이 일하던 약초밭도 끼어 있었다.

저장고에는 약초와 종자가 쌓여 있으니.

마족의 제조법을 토대로 약간의 연구만 거치면 영약도 충분히 만들 수 있으리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수고 많았어.”

“무슨 말씀을요. 종족의 자유를 위한 일인걸요?”

“그래, 개새……. 행정관은 필요한 사항을 정리해서 가져와 줘.”

“넵, 맡겨만 두세요!”

뒤에서 조용히 대화를 지켜보던 토끼녀.

어디서 가져왔는지, 그녀는 서류철과 뿔테 안경을 장착한 상태였다.

나는 여러 지시를 내리고 약초밭을 빠져나왔다.

땅을 박차고 높이 떠오르자, 주변의 지형지물이 한눈에 보였다.

‘뿔족이야 농사지으며 잘 지내고 있고.’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뿔족의 거주지는 이제 활기를 찾았다.

데모니움과 에레보스 영지에서 연달아 승리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 누가 되찾은 자유를 빼앗기고 싶을까.

에레보스 영지에서 풀려난 다른 뿔족들도 슬슬 그 마음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약초밭 근처에 있는 거대한 숲을 보았다.

아자크족의 보금자리.

제법 거대한 숲은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냥 평야였다.

허허벌판이었던 지역을, 울창한 수림으로 만들어 낸 그들의 능력은 썩 대단했다.

나는 공중을 발로 차며 수림의 중심으로 갔다.

“어때. 기한은 맞출 수 있겠어?”

나는 땅으로 내려와 가만히 서 있는 나무에 말을 걸었다.

그러자 나무의 옹이구멍처럼 생긴 곳에서 이목구비가 생겨났다.

아자크족의 대표인 트리어는 몸을 일으키며 꾸벅 몸을 굽혔다.

“오셨군요. 아직은 생산 중입니다만, 기한까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땅에서 나무의 뿌리 부분이 튀어나왔다.

트리어는 뿌리를 다리처럼 사용하며, 무기고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 줬다.

내가 그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가자 주변에서 다른 나무들이 인사를 건넸다.

“환영합니다. 의장님.”

“종족의 구세주시여. 부디 이 숲에서 평온을 얻으시길.”

대종족 의회에서 나는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게 아자크족 내에서 잘 퍼졌는지, 가는 길마다 그들이 나를 의장이라고 불렀다.

감사 인사는 덤이고.

“여기입니다.”

트리어는 통나무와 넝쿨로 지어진 거대한 창고를 보여 주었다.

안에는 검과 방패, 활, 갑옷 등등.

기본적으로 전쟁에 쓰이는 장비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다만 신기한 점은 이 모든 무구류가 나무라는 것.

툭, 툭.

나는 검을 하나 들어 주먹으로 치고 힘을 주어 부러트려 보았다.

빠각! 당연히 검은 부서졌지만, 내가 인간을 벗어난 근력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 진짜 강철보다 단단하잖아.”

옆에 있던 나무 투구나 갑옷도 상당히 훌륭했다.

대부분 나무껍질로 만들었고, 관절 부분은 나무 넝쿨로 이었는데 질기고 잘 휘어져서 움직이기도 편했다.

아자크족은 마족들에게 가축처럼 사육되었다.

이런 질 좋은 재료를 생산해내니, 고급 무구류나 지팡이의 재료 수급처로 쓰였다.

“마족에게 잡혀있을 때랑 같은 일을 시키고 있는데. 불만을 가진 동족은 없어?”

마족에게 잡혀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저들의 역할은 자신들의 줄기와 껍질로 재료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 점을 걱정한 내 물음에 트리어는 몸통을 가로로 저으며 말했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가 만든 도구들로 복수를 할 수 있는데, 그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자크족이 유독 나에게 깍듯한 것이 이해도 되었다.

나머지 세 종족은 그래도 노동자나 전문적인 일에 쓰였다.

하지만 이들은 가축처럼 소모될 뿐, 같은 지성을 가진 생물로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잘되고 있어서 다행이야. 더 필요한 거 있으면 행정관에게 말하고.”

“알겠습니다.”

나는 트리어에게 인사를 하고 숲을 빠져나왔다.

이제는 주술을 연마하고 있는 와제트족을 방문할 차례.

근 100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노예로 살아왔던 탓에, 그들도 선조들의 기술을 거의 잊어버렸다.

해서 옛 문서들을 모으며 열심히 수련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거주지로 발을 옮기려던 순간, 기감에 악마급 마기가 포착되었다.

‘서쪽이 아니라, 동쪽.’

위우웅.

동시에 차원의 벽을 뚫고 내 옆쪽으로 다가온 토끼녀가 보였다.

그녀는 안경을 벗더니 눈빛을 날카롭게 세우며 말했다.

“데모니움 쪽에서 사절이 왔습니다.”

“알고 있어. 그보다 그 이상한 컨셉은 뭐야.”

“능력 있는 차가운 도시의 비서요.”

“……가지가지 한다.”

말파스는 그리 급할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영지에 큰일이 일어날 것도 아니고, 그냥 이대로 대치만 해도 나쁘지는 않다.

반면에 데모니움 영지는 다르다.

‘이제 2차 원정군이 도착했으니까.’

헬란 영지를 모조리 잡아먹은 침략자들.

그 옆에 붙어 있는 데모니움과 인페르노 영지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런 시기에 나를 찾아올 이유는 하나지.

“그냥 돌려보내.”

내 입에서 튀어나온 지시에 토끼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만요. 그러다가 말파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어떡하시려고요?”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여전히 두 대악마에 비하면 약하다.

레라지에는 영토나 노예를 조금씩 주면서 나를 부려먹을 심산일 터.

그런데 말파스는 어떠한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 대가로 무얼 요구할지 모른다.

“어차피 한 번은 더 올 테니까. 일단 돌려보내.”

이제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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