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15화>
115. 마족과 춤을 (5)
앞으로 내민 흑도.
암적색 오러가 첨가된 마기가 그것의 검신을 물들였다.
완전무결한 칠흑의 겉면에 은은한 빛이 맴돌았다.
칼날을 따라 공간이 구부러졌고 주변의 기운이 검신으로 압축되었다.
- 그걸로 나와 해 보겠다는 것이오?
물론이지.
나는 공중을 차며 말파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상대는 내 기술을 보고서 콧방귀를 뀌었다.
[암적뢰]나 [투영]보다도 볼품없는 기술임은 분명하다.
겨우 칼날에 기운을 집중해서 무얼 하겠는가?
- 그렇다면 잘 가시오.
말파스의 의지가 공간을 흔들었다.
그가 끌어모은 막대한 양의 마기, 거대한 운석에 필적하는 구체가 나에게 쏘아졌다.
저쪽의 기술도 단순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크기와 관련한 부분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구구구구.
말파스가 떨어트린 어마어마한 크기의 구체가 구름을 갈랐다.
높은 상공에서 형성된 기운이 몸을 짓누른다.
그에 비해 내가 든 흑도는 초라하다.
마치 태양을 향해 날아오른 이카로스와 같지 않을까.
‘온다.’
테두리에서 은은한 빛이 깃든 흑도,
그 칼의 끝이 고도로 압축한 기운이 말파스의 구체와 부딪쳤다.
뒤이어 영혼까지 끌어모은 말파스의 검은 구체가 내 검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진동.
몸과 영혼을 짓밟는 듯한 통증이 몸을 콱 움켜쥐었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이전에 부에르와의 싸움에서 보았던 것과 아주 비슷한 일이 펼쳐졌다.
차원 내부를 보호하던 차원벽에 금이 갔다.
공간에 가해지는 힘이 임계점에 달하자 차원에 무리를 주는 것이다.
‘이 정도는 가뿐하지.’
충돌이 격렬해지는 상황 속에서.
나와 말파스의 기운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할퀴고 깨물며 사투를 벌였다.
얼핏 살펴본 말파스의 평정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 말도 안 돼! 어째서 집어삼키지 못하는 것이냐!
이윽고 당황스러움이 섞인 음성이 전해졌다.
말파스의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었다. 그가 만든 구체의 부피는 어지간한 산처럼 컸다.
그에 반해서 나는 칼날을 감쌀 정도의 크기.
단순히 규모로만 계산한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쉽게 생각해. 너와 내가 동급이라는 이야기니까.”
개기일식.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며 커다란 그림자가 생기는 현상.
나의 기술은 그것과 아주 비슷했다.
말파스가 발산한 기운이 모조리 검신 안으로 흡수되었다.
얼핏 로빈 공작이 펼치던 기술과 비슷해 보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확실히 그렇겠지.
우득, 우드득.
삽시간에 모든 마기를 흑도에 압축시키자 육신이 경고를 알렸다.
뼈마디가 뒤틀리고 핏줄이 터졌다.
“쿨럭, 쿨럭.”
입에서 검은 혈액이 흘러나왔다.
사람이 버티지 못할 만큼의 막대한 에너지가 나를 짓눌렀다.
[그림자 검술]에 2가지 기술을 더해서 전설급으로 거듭나게 한 검귀.
그의 생애에서도 이만한 기운을 빨아들인 적은 없었다.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 무리하지 마시오. 그만한 기운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는 [개기일식]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타이르듯 말했다.
저렇게 여유롭게 있는 걸 보니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 모양이네.
나는 씩 웃으며 거듭 핏물을 삼켰다.
‘좋아, 마기 수치가 1점씩 계속 올라가고 있어.’
칼날에 가둬 놓은 기운을 조금씩 분해하자 마기 능력치가 올랐다.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혈마력을 이용해 남의 기운을 가져오는 게 가능하다니.
잘만하면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네 말대로, 조금 버겁긴 해.”
- 욕심을 부리셨소.
“글쎄? 길고 짧은 거야 대 봐야 아는 거지.”
나는 온몸이 터질 것 같은 격통을 참으며 무명을 살폈다.
흑도가 부들부들 떨린다. 당장 이 기운을 어떻게든 해 달라며 떼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원한다면 뜻대로 이뤄 줘야지.’
은은한 빛을 테두리에 머금은 흑도를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 칼자루를 양손으로 쥐고 말파스를 향해 휘둘렀다.
상대는 내 행동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곧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인마족의 몸부림이라 여겼겠지.
번쩍!
흑진주를 닮은 빛이 터졌다.
일식이 끝나버린 달처럼, 흑도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기운을 모조리 토해냈다.
그 광경을 목도한 말파스는 까마귀의 것을 닮은 날개를 퍼덕였다.
“너는 감당할 수 있겠냐?”
그리 말하며 혈마력으로 엉망이 된 몸을 치유했다.
대답은 없었으나 상대는 저 공격을 막아 낼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더 공격할 생각도 없었다.
구구구궁.
두 기운이 부딪히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파멸을 담아낸 빛이 지평선 끝까지 하늘을 밝혔고, 나는 여유롭게 지면으로 내려왔다.
말파스의 수하들은 저마다 손에 든 무기를 내밀었다.
그러나 선뜻 덤비는 자는 없었다.
“협상할 거니까, 자리나 펴.”
“무, 무슨!”
누가 여기서 죽을 때까지 싸운다고 했나?
나는 몸값을 올리러 왔을 뿐이다.
사방을 물들인 격돌이 가라앉은 다음, 내 실력을 가늠한 말파스가 고고한 모습으로 땅에 내려왔다.
- 모두 자리를 비키거라. 귀공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다.
까마귀 대가리의 의지대로 협상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그와 단둘이 어느 언덕 위로 올라왔다.
아래에는 도열 된 말파스의 정예군이 늘어서 있었다.
“본성에 있는 친위대인가?”
“그렇소. 귀공께서 봐준 덕분에 부하들을 많이 보존할 수 있었소이다.”
까마귀는 대뜸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땅에 붙어서 싸웠다면 브라이어도, 잘 육성한 그의 정예 부대도.
모조리 씨를 말릴 수 있었다.
“일부러 하늘에서 싸워 준 이유는 알아줘서 고마운데?”
“아마 우리를 위해서 배려한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오.”
“그렇긴 하지. 제안할 게 있어.”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귀공께서는 비마족 노예와 영토를 원할 것이오. 맞소이까?”
말파스는 한발 앞서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가려 했다.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내가 데모니움 영지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들었겠지.
나는 피식 웃었다.
“잘 알고 있네.”
“이런 혼란한 시기에는 응당 서로 협력해야 마땅하오.”
마족의 사회는 약육강식이다.
약해 보이는 놈은 잡아먹히고 강한 놈들은 서로 싸우려 들지 않는다.
말파스에게 인정을 받았으니, 이제 약해 보이는 놈을 하나 지정해 주면 되었다.
‘말파스도 나를 마족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당분간은 더 마족 행세를 해도 되겠어.’
어차피 내 정체는 언젠가 들통난다.
문제는 그 시기,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른 대악마들은 판게아 침략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인간 놈들도 빨리 노예로 삼고 싶다고 불쌍한 부에르를 닦달했을 뿐이다.
상황이 이러니 내 정체가 빨리 밝혀지겠는가.
‘이러니까, 루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해도 별 반응이 없지.’
루카라는 이름을 듣고 반응할 대악마.
나는 그자를 찾으려고 일부러 본명을 썼다.
고민을 이어 가던 그때, 말파스는 답을 재촉했다.
“그래서 제안이 무엇이오?”
“아, 미안. 생각 좀 하느라. 내가 좋은 사업 아이템을 하나 떠올렸거든.”
말파스의 성격이라면 절대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작자가 아니다.
놈은 분명 주도권을 쥐고 최대한 값을 깎아내려 할 터.
그래서 나는 그가 마음속 깊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데모니움 영지를 갖게 해 줄게.”
감히 주판알을 튕길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크게.
* * *
로자리아가 받았다던 마신의 신탁.
토끼녀는 그 신탁을 내린 대악마는 나의 신상을 알고 있을 거라 말했다.
나의 정체를 완전히 꿰고 있는 대악마는 이제 마계에 하나밖에 없다.
바로 마신의 근원을 탈취한 놈.
정말, 정말 아쉽게도.
토끼녀는 근원을 가져간 대악마의 정체는 모른다고 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분명한데 말이야.
가능만 하다면 뇌라도 꺼내서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마계에서 힘을 사용할 수는 없다고 했으니. 억지로 빼앗지는 못하는 건가.’
세계수의 말로는 감시자, 본인들 입으로는 관리자.
토끼녀와 강아지남은 신이다.
그렇다면 초월자도 아닌 대악마에게서 근원을 빼앗지 못하겠는가?
근데 저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근원을 탈취한 대악마가 초월자에 근접했다나 뭐라나.
당당하게 본인들의 무능함을 주장하니, 뭐가 진실인지 지금은 알 방법이 없다.
“루카님! 회의장에 종족 대표가 모두 모였어요! 아이쿠!”
콩!
저 멀리서 뛰어오던 토끼녀가 돌부리에 걸리며 넘어졌다.
어쩌면 진짜 무능한 걸지도.
나는 번뇌를 몰아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영지 상황은?”
“아고. 일단 에레보스 영지에게서 받은 영토는 전부 파악이 끝났습니다.”
“잘했어. 그러면 레라지에는 아직도 사절을 안 보냈고?”
“넵, 몹시 나쁜 사기꾼 놈들이네요! 일을 끝내면 남은 노예를 보내준다더니!”
“너희도야.”
“네? 저희가 얼마나 순수하고 정직한데요!”
토끼녀가 억울함을 내뱉으며 말했다.
원래 도둑이 제 발을 저리는 법이지.
나는 상대의 반응을 깔끔히 무시하며 길을 걸었다.
‘이제 여기도 곧 있으면 산적 소굴 신세는 면하겠네.’
말파스와 만나고 2주가 흘렀다.
그새 우리의 영토는 배로 커졌고 나름의 형태를 잡아가고 있었다.
우선 말파스의 영토와 노예를 일부 양도받았으며, 여러 종족이 이곳에 소속되었다.
뿔족, 요정족, 와제트족, 아자크족.
현재 우리의 세력은 이 4가지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뿔족은 싸움에 능하고, 요정족은 약재와 연금술에 해박하다.
와제트족은 원래 마계의 모래사막에서 살던 주술사들이었는데,
처음 봤을 때는 반건조 오징어처럼, 수분기가 없는 생김새에 순간 마족인 줄 착각했었다.
“다들 기다리게 해서 미안.”
나는 토끼녀와 함께 어느 성의 내성 안뜰로 들어왔다.
이곳은 원래 데모니움 서북부 자치령의 영주성으로 쓰이던 곳.
지금은 새롭게 형성된 우리 세력의 본거지가 되었다.
“아닙니다, 주군!”
우선 뿔족의 대표로 참석한 깨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요정족의 ‘이바나’와 와제트족의 ‘아누스’가 인사를 건넸다.
마지막으로 영주성의 안뜰을 회의장으로 쓰게 만든 장본인이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자크족의 구원자이시여. 소인은 아자크족의 대표로 오게 된 트리어라고 합니다.”
“어, 반가워. 너무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고.”
나는 거의 8m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아자크족, 그들은 나무의 외형을 한 종족으로 판게아의 엘프처럼 숲에서 살아가던 종족이다.
근력은 바위도 깨부술 정도고, 신체를 이용해 물품을 생산하거나 전투에 쓸 수도 있었다.
“다들 편히 앉아. 깨비야, 너도.”
“넵, 주군!”
나는 각 종족에게 과제를 주었다.
대표들은 자신들이 맡은 분야의 진척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직은 초기인지라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진행하고 있다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다음으로.
어찌 보면 이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
데모니움과 에레보스 영지에 남겨진 동지들을 어떻게 하겠냐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빼빼 마른 턱을 움직이며 아누스가 입을 열었다.
“데모니움 영지에서는 남은 동지들을 풀어줄 용의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남은 노예들을 한 곳에 몰아넣어 수용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미이라의 말을 받은 사람은 깨비였다.
두 종족은 데모니움 영지에서 많이 부리는 노예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일과 관련해서 더욱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에레보스 영지에서도 아직 답변이 안 왔지?”
내가 토끼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물어보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아직은요.”
수용소는 데모니움 본성과 가까이에 있다.
기습적으로 뚫고 들어가서 빼낼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일단 최우선 목표는 많은 동료를 해방하는 거야. 그러니까, 말파스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등을 밀어줘야지.”
나는 걱정이 많은 종족의 대표들을 둘러보며 방긋 웃었다.
그러고서는 압축 주머니에서 통신구를 꺼냈다.
치직, 원하는 채널을 맞춘 뒤에 나는 통신구 너머의 누군가에게 말을 전했다.
“공작 전하, 저 루카입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