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14화>
114. 마족과 춤을 (4)
에레보스 영지.
대악마 말파스가 다스리는 이 땅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순식간에 영지 내부를 휩쓸고 다녔다.
비마족 노예들의 구출, 그리고 습격.
습격자들은 마을과 요새를 돌아다니며 마족들을 보이는 족족 처단했다.
대략 3주.
제법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에레보스 영지의 충격은 가라앉을 새가 없었다.
토벌대를 보내도 단 몇 시간 안에 전멸하는 판국에 무얼 어떻게 하겠는가.
하루가 멀다고 농장이 쑥대밭이 되고, 광산의 노예가 풀려났다.
요새를 점령해 무구류를 빼앗아가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오늘은 저기가 좋겠어.”
나는 언덕 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바라보았다.
에레보스 영지 소속의 작은 장원, 그곳은 마족들의 희귀 약재를 생산하는 약초밭이었다.
30cm 정도의 신장, 투명한 한 쌍의 날개.
맞은편에 있는 작업장에는 특이하게 생긴 요정족들이 분주히 날개를 펄럭이며 움직였다.
깨비도 그들의 외관을 살피고서 설명을 해 주었다.
“주군, 저들은 요정족입니다. 약초 재배와 연금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거로 유명합니다.”
“완전 능력자들이네. 숫자도 한 150명쯤 되고.”
마침 전문직 종사자들이 필요하던 참이다.
뿔족은 생산직 쪽으로는 영 젬병이니, 전투를 보조해 줄 종족도 많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첫 먹잇감은 저곳이었다.
나는 눈알을 굴리며 혼잣말처럼 말을 툭 뱉어냈다.
“그나저나, 오늘도 말파스 쪽에서 조용하네.”
“그러긴 하네요. 일주일 전에는 악마와도 붙지 않았습니까?”
“악마를 2명이나 죽여서 그런가. 더 보내지는 않네.”
슬슬 움직일 때가 되긴 했을 텐데.
나는 눈을 감고 [초감각]과 [통달한 자]를 통해 주변의 기운을 살폈다.
대악마급의 마기를 얻은 뒤부터, 정신을 집중하면 아주 먼 곳의 일까지 순식간에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부에르와 라그나가 먼 곳에서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말이다.
“우리 영토랑 데모니움 쪽도 조용해. 다른 전투 부대도 그대로 있고.”
“그럼, 다행이네요. 이대로 몰아붙이죠?”
에레보스 영지를 습격한 첫 주에는 외곽 지역만 돌아다녔다.
2주 차에는 살짝씩 영지 내부로 들어왔고, 이제는 거의 중심에 가까워진 상태.
이 정도면 대악마가 순식간에 이동할 수도 있는 거리다.
‘데모니움에서 군대를 살짝 전진 배치하긴 한 것 때문에 참고 있는 건가.’
대악마 레라지에는 영토 보호를 빌미로 자신의 군대를 영지의 서부 경계에 배치했다.
당연히 말파스 입장에서는 압박이 될 터.
이 상황에서 습격자를 잡기 위해 직접 나설까.
머리털이 전부 빠져 버릴 정도로 고민하고 있겠지.
“저희는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깨비는 내 선택에 힘을 보태 주었다.
내 주변에는 200여명의 뿔족 전사들이 함께 있었다.
1000명에 달하는 전사 중에서도 나름대로 정예 병력이었다.
“굳이 겁먹을 필요가 있을까?”
“없습니다.”
“저희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다시금 야성을 되찾은 놈들의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이들처럼 나도 공격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저 장원을 관리하는 고위 마족이 뱀파이어거든.
‘이제 하나만 더 잡으면 1000점이 넘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지.’
말파스?
오라고 해라. 놈과 내 실력은 비슷하다.
뿔족 전사들과 멀리 떨어져서 싸우면 거리낄 것도 없다.
“한 가지 부탁만 하자. 만약 내가 신호를 보내면 모두 전속력으로 도망쳐. 그리고 저번에 빼앗은 동부 성체로 퇴각해.”
200명의 결사대.
그들은 모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뿔족 전체는 아니더라도, 나를 완전히 믿고 의지하는 놈들은 생겼다.
이제는 정말로 내 사람들이라는 느낌.
나의 세력이 완성되어 가는 걸 보니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면 가자.”
나는 신형을 날리며 달려 나갔다.
그 뒤로 200명의 근육맨들이 지면을 밟으며 뒤따랐다.
아직은 경험이 부족하지만 연공법과 검술 덕에 실력은 나날이 늘어갔다.
그림자 검술 2번, [환영 활보]
나는 약초밭에 다다랐을 무렵 기술을 펼치며 적들을 베면서 나아갔다.
목표는 고위 마족의 뱀파이어.
앞을 막아서는 놈들의 멱을 따고 나아가자, 곧이어 이곳의 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대악마 말파스 님의…….”
“네네, 알고 왔어요.”
서걱.
뱀파이어의 목을 단숨에 썰어 버리고 칼을 심장에 꽂았다.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린 적의 몸에서 붉은 기류가 흘러내렸다.
오메, 이 귀한 것을.
나는 곧바로 손을 뻗어 혈마력을 취했다.
[특성: [고귀한 혈통]의 효과가 제거되었습니다.]
[특성: [밤의 제왕]이(가) 개방되었습니다.]
[[밤의 제왕]의 효과로 효율이 50%만큼 추가로 증가합니다. 응축된 혈마력이 공간에 영향을 줍니다. 혈마력으로 사망에 이른 몸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고위 마족이나 그와 비슷한 영약 이하의 효과를 받을 수 없습니다.]
확인한 혈마력 능력치는 1054점.
1주일 전에 500점을 넘기며 얻었던 [고귀한 혈통]이 사라졌고, 새롭게 [밤의 제왕]이라는 특성이 생겼다.
설명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거의 불사에 가까운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텔런트 쪽에서도 ‘갈취(전설)’로 바뀌어 더욱 강력하게 남의 것을 뺏을 수 있었다.
‘이거 느낌이 이상한 게, 이제는 적의 기운을 뺏어서 능력치도 올릴 수 있겠는데?’
영웅 등급까지만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단순히 적의 기운을 빼앗아 내가 사용한 기운을 충당할 뿐.
그런데 지금은 적의 능력치를 갈취할 수도 있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 시험할 놈이.’
나는 주변을 살피며 강한 마족들을 찾아다녔다.
그 순간, [초감각]이 찌릿하며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대악마가 내뿜는 기운이 느껴졌다.
- 모두 요정족을 데리고 동부 성체로 퇴각해!
나의 사념이 200명의 전사들에게 퍼져나갔다.
명령이 하달된 직후, 전사들은 일말의 미련도 가지지 않고 요정족들을 덥석 낚아챘다.
그러고선 우리가 지나 온 길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뭔가 납치하는 느낌이긴 한데.’
사소한 건 나중에 신경 쓰자.
적은 대악마, 지금은 에레보스의 주인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공포심에 도달하는 큰 긴장감은 들지 않았다.
적수를 상대하러 간다는, 그런 종류의 짜릿한 감각이 몸을 맴돌았다.
파아앙!
지면을 걷어차며 날아올랐다.
대악마 말파스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
나는 허공을 발로 차며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 * *
30분.
나와 말파스가 만나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대악마는 군대를 이끌고 나를 맞이했다.
악마 하나를 대동했고, 본성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위 마족 십수 명도 데려온 듯 보였다.
“어차피 다른 놈들은 전부 쓸모없을 텐데 말이야.”
나는 먼 거리에서 혼잣말처럼 문장을 쏟아 냈다.
그러자 몇만에 이르는 대군의 중심에서 사념 하나가 도착했다.
- 그대가 시작한 일이오. 감히 대악마에 맞서려던 자의 최후를 천하에 알리겠소.
생각보다 예의가 바르네?
상대의 태도가 어찌 되었든, 그의 군대는 나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예의 바른 말투와 다르게 말파스의 입장은 아주 뚜렷했다.
‘그렇다면 누가 어리석은지 알려 줘야지.’
나는 살짝 감추고 있던 마기를 풀어헤쳤다.
몸이 가볍다. 나를 옭아매던 모든 저항감이 저만치로 물러났다.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다리를 움직였다.
작은 바람이 불었다.
내가 사뿐하게 지면을 박차며 일으킨 바람.
그 바람이 바로 옆에 있던 이름 모를 마계의 꽃을 흔들었다.
바람이 꽃을 흔드는 찰나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마족군의 중심부에 혜성처럼 떨어졌다.
푸화아아!
파멸의 송곳니.
거대한 대검이 들린 내 팔이 움직이자 주변이 불바다가 되었다.
쫄몹 처리에 이만한 무기가 없지.
나는 마족군 내부를 파고들어 연달아 대검을 휘둘렀다.
[스킬: [양손검 숙련]의 등급이 ‘C’가 되었습니다. 근력+2, 체력+1]
[스킬: [양손검 숙련]의 등급이 ‘B’가 되었습니다. 근력+2, 체력+1]
스킬 숙련도가 쭉쭉 올라간다.
송곳니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어김없이 세상을 태워버릴 불길이 치솟았다.
하급과 중급은 물론이고, 상급과 고위 마족에 이르기까지.
내가 지나간 길에는, 모두가 공평하게 불타 죽는 화려한 무대가 펼쳐졌다.
“놈!”
오른쪽.
나는 앞으로 구르며 상대의 공격을 회피했다.
쿠왕! 지면을 깨부수는 굉음과 함께 붉은 털의 늑대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마기를 응집해서 손톱을 길게 연장하더니 나에게 달려들었다.
고독의 악마, 브라이어.
놈의 손톱은 확실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의 마기에 닿으면 혈마력으로도 치유가 힘들었다.
토끼녀에 따르면, 연인과의 이별처럼 상처가 잘 낫지 않는다나 뭐라나.
물론, 상처를 입을 일이 없다.
화아아악!
대검을 휘두르자 악마와 나 사이에 거대한 불길이 일었다.
벽처럼 생성된 화염이 브라이어를 막아냈다.
나는 그동안 여유롭게 송곳니를 집어넣고 무명을 뽑았다.
그림자 검술 6번, [투영]
검은색 기운이 위세를 떨쳤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한 마리 늑대. 상대가 지닌 일념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불시에 펼쳐진 이 개미지옥은 모든 걸 삼켜버릴 기세로 아가리를 벌렸다.
“큿!”
압도적인 차이에 상대가 두 팔을 휘둘렀다.
그가 마기를 응축해 날려 보내자, 고도로 압축된 강기가 나를 노리고 날아왔다.
그런 거로 되겠는가. 브라이어는 이미 반쯤 내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투영]에 저항할 힘이 없다면 결과는 똑같다.
“늦었어.”
상대의 공격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윽고 마기로 구현한 [투영]이 그를 완전히 감쌌다.
오러로 펼친 게 아니었기에 내부의 풍경은 상당히 달랐다.
암적색이 아닌 칠흑. 빛이 닿지 않는 지옥의 끝에 떨어진 느낌을 주었다.
나는 곧바로 늑대 인간에게 참격을 날렸다.
- 귀공은……. 누구요? 다른 대악마의 충복이 아니었소?
촤악!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브라이어의 가슴이 벌어졌다.
원래는 완전히 죽여 버릴 작정으로 휘둘렀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말파스의 개입, 대악마의 의지가 내 공간을 밖에서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운 좋은 놈.’
나는 장막을 걷어 내고서 대악마의 위치를 살폈다.
하늘 위, 시선을 올리자 공중을 날고 있는 생물체가 보였다.
다 죽어 가는 늑대 인간을 내버려 두고, 나는 지면을 차며 수직으로 상승했다.
- 지금이라도 멈추겠다면 귀공을 보내 주겠소.
말파스는 꾸준히 이 공간 전체에 본인의 사념을 퍼트렸다.
가까이서 본 말파스의 모습은 다른 대악마들처럼 기괴했다.
머리와 상체는 까마귀에 그에 걸맞은 검은색 날개를 가졌고, 하체는 사람과 똑같았다.
소위 말하는 까마귀 인간의 모습이 저럴까.
“너도 원래 싸우러 왔잖아?”
나의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나를 죽여 버릴 작정이었겠지.
어? 근데 이 악마라는 놈 세잖아?
겨우 악마의 수준이 아니다. 자신이나 레라지에와 비슷한 대악마.
그리 결론을 내렸으니 이토록 낮은 자세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리라.
즈으으응.
말파스가 날갯짓을 하며 팔을 허공에 휘둘렀다.
차원의 법칙을 상당히 벗어난 기술.
그가 억지로 끌어모은 자연의 마기가 한곳에 뭉쳤다.
본래라면 다룰 수 없는 기운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일시적으로 주변 일대의 마기 밀도가 낮아질 정도로.
‘그런 기술이 너만 있는 줄 알아?’
자연의 마기를 모을 수는 없지만.
저것에 대항할 기술 정도야 있다.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말파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흑도를 앞으로 내밀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림자 검술 7번, [개기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