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13화 (113/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13화>

113. 마족과 춤을 (3)

에레보스 영지의 관문 요새.

데모니움 영지의 서북부와 맞닿아 있는 경계 지역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검 한 자루를 뽑고서 터덜터덜 걸어왔다.

사내가 요새에서 40m쯤 되는 거리에 도달했을 때.

후우우우.

그의 신체에서 진득한 마기가 흘러나오며 검과 신체에 달라붙었다.

섬뜩한 기운에 관문을 지키고 있던 에레보스 영지의 마족들이 관문의 너머를 살폈다.

창백한 피부의 뱀파이어. 깔끔한 예복을 입은 마족이 호통을 쳤다.

“이 앞은 대악마 말파스님의 영역이다! 침입자는 정체를 밝혀라!”

지휘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붉은색 기운이 실렸다.

마기가 섞여 더욱 파괴적으로 변한 호통에 부하 마족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데모니움 영지의 사절이 아닐까요?”

어느 상급 마족이 물었다.

흡혈귀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 땅은 노예 반란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저자는 데모니움의 사절이 아니다. 다들 공격을 준비하라.”

고위 마족의 호령에 맞춰.

관문 안의 마족들이 저마다 원거리 공격을 준비했다.

흑마법부터 시작해 화살과 저주에 이르기까지. 온갖 공격이 관문 요새를 찾아온 낯선 남자를 향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건가. 침입자를 처단하라!”

슈슈슝.

잡다한 공격이 허공을 지나 남자의 위치로 떨어졌다.

쿵, 쿠궁! 주변 일대가 초토화되며 흙먼지와 폭발과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어느 한 마족이 입을 열었다.

“해치웠나?”

답을 듣기 위함은 아니었다.

긴장된 상황에서 희망이 섞인 감탄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엉뚱한 방향에서 들렸다.

“아니, 아쉽게도.”

“그런가. 아직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용케 알았네.”

“커, 커허허헉!”

응?

모두가 관문의 외부를 바라보는 이 순간.

뒤쪽에서 어느 사내의 단말마가 들려왔다.

그들은 등골이 쭈뼛쭈뼛 서고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예복을 입은 뱀파이어.

본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던 고위 마족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의 손에 목이 붙잡힌 것이었다.

상대의 손목에 깃들어 있는 기운 때문인지 뱀파이어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우두둑.

창백한 목이 비틀리며 축 늘어졌다.

갈색 머리의 사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손날을 세워 지휘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푸욱, 살을 뚫고 들어갔다가 나온 손에는 붉은색 수정이 들렸다.

“슬슬 혈마력도 많이 필요했는데 딱 맞춰서 나와 주네.”

슈우우우.

지휘관이 가지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모조리 흡수되었다.

붉은색 수정의 모습도 완전히 사라질 무렵.

“좋아. 이대로 3명 정도만 더 흡수하면.”

남자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위 마족을 놓아주었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상대는 허수아비가 된 마족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혹시 에레보스 영지에는 뱀파이어가 많아?”

압도적인 기세에 눌린 마족들이 리듬을 타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그 말을 남긴 직후에 눈앞의 남자가 사라졌다.

고조되었던 긴장감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뭐, 뭐야. 방금.”

“대장님께서 돌아가신 건가?”

고위 마족이다.

일개 병졸들쯤은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죽일 수 있는 실력자.

그런 마족이 눈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죽어 버렸다.

관문 위에 있던 마족들은 멍한 상태로 허공에 질문을 던져댔다.

쿵! 갑자기 큰 소음이 들리더니 크고 거대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서, 성문이 잘렸다!”

“기습이다! 기습이다! 다른 지휘관분들은 어디 계신 거야?”

아비규환의 현장.

불시에 공격당한 마족군은 우왕좌왕하며 지휘관을 찾아 돌아다녔다.

대장이 죽었다면 응당 아래 계급의 지휘관이 나서야 할 터.

그러나 상급 마족 중에서 나서는 이가 없었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 마족들은 이미 죽어 버린 상급 마족들의 시체를 발견하고 말았다.

“주군께, 뿔족의 긍지를 보여 주자!”

와아아!

때마침 무너진 성문으로 수백의 근육질 덩어리들이 모여들었다.

앞서서 달려오는 남자의 외침을 시작으로 요새는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었다.

일방적인 학살, 거대한 덩치와 검으로 무장한 뿔족 전사들이 마족들을 참살했다.

노에 반란군의 에레보스 침략.

그 소식이 전해진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 * *

나와 뿔족 전사들은 에레보스로 향하는 관문을 점령했다.

그 뒤에는 다른 곳을 들리지 않고 곧장 영지 동부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다른 영지들도 반란군의 소식을 들었으니, 혼선을 주기 위해 중간 지점을 잘라 버릴 필요가 있었다.

“주군, 저기가 동지들이 말한 성입니다.”

깨비가 손가락으로 제법 방비가 잘된 성체를 가리켰다.

대악마들은 보통 영지를 몇 개의 자치령으로 잘라 효율적으로 통치했다.

그 중에서 저 성은 에레보스 동부 자치령의 영주성이었다.

나는 깨비가 가리킨 곳으로 기감을 펼쳤다.

“음, 악마 하나가 있네.”

대악마 말파스의 핵심 간부.

악마 중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흑도를 뽑고서 곁에 모인 전사들을 둘러보았다.

대략 1000명에 가까운 병력이 모두 내 입에서 튀어나올 명령을 기다렸다.

“여기는 나 혼자만 간다. 너희는 모두 대기하고 있어.”

“예? 우리도 싸울 수 있습니다!”

내 말에 깨비가 검을 꽉 쥐며 말했다.

그와 비슷한 뜻을 가진 전사들도 많았다.

그동안 마족에게 당한 울분을 갚아 주기 위해 모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으로는 이해해도 그대로 두는 건 위험하다.

“이건 명령이야. 언제까지 도적 떼처럼 굴 거야?”

“아, 죄송합니다.”

확실히 아직은 산적이랑 거의 비슷하긴 하지.

레라지에도 그걸 알아챘는지, 데모니움 영지에서 보낸 노예 중에는 뿔족이 거의 없었다.

여러 종족들이 한 곳에 뭉치면 자연스럽게 다툼이 일어나는 법.

놈들은 일부러 우리 세력 안에서의 분란을 꾀하고 있다.

게다가 뿔족 안에서도 완전히 위계질서가 잡혀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깨비가 대표로 있기는 하지만.’

태생부터가 호전적인 놈들이다.

제대로 무력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뿔족 안에서 불만이 쌓일지도 몰랐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해결해 나가야겠지.

“내 명령에 불만이 있다면 지금 이야기해. 다음부터는 그럴 기회도 안 줄 거니까.”

나는 좌중을 두 눈으로 쓸면서 포고하듯 말했다.

물론, 반기를 드는 뿔족은 없었다.

속으로는 싸우고 싶을 테지만, 그동안 내가 보여 준 압도적인 강함을 부정하지는 못할 테니까.

“좋아, 모두 여기에서 대기해.”

나는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성벽으로 뛰어갔다.

저 멀리 점처럼 보이던 건축물이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왔다.

적들은 내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고, 나는 마기를 내뿜으며 악마가 있는 장소를 눈에 고정했다.

그림자 검술 5번, [암적뢰]

흑색 전류가 튀었다.

콰앙! 하나의 벼락이 돌벽을 깨부수며 지면에 꽂혔다.

주위 기물을 박살 내며 전류는 멈추지 않고 한 차례 더 번쩍였다.

검은빛이 도는 두 개의 단검. 무기를 꺼내든 상대가 360도로 회전하며 내 검을 막았다.

채앵!

금속이 부딪히며 강렬한 마찰음으로 내부를 가득 채웠다.

다크 엘프, 붉은 천으로 입가를 가린 어두운 피부의 사내가 보였다.

우리는 각자 상대의 허점을 노리며 검을 주고받았다.

깡! 까가가가강!

불꽃이 튀고 마기가 요동친다.

상대의 실력은 악마 중에서도 상당히 높았다.

정순하게 단련된 마기가 나의 급소를 노리며 쏟아졌다.

희미한 상대의 존재감이 감각을 어지럽히며 틈이 생기도록 유도했다.

‘침묵의 악마라고 했던가.’

벤라더.

나는 토끼녀가 말해 준 이름을 떠올렸다.

말파스의 부하 중에서 가장 강력한 악마가 바로 이놈이구나.

[환영 활보], [달빛 베기]. 나는 두 개의 기술을 연달아 펼치며 놈을 압박했다.

100개가 넘는 환영.

거기에 더해서 환영이 지닌 검이 엄청난 숫자로 분열되며 공간을 점령했다.

못해도 1만이 넘는 검격이 동시에 악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흐읍.”

놈은 숨을 집어삼켰다.

내 기습에도 차분하게 대응하던 다크 엘프가 당황한 것이었다.

검격이 닿기 직전. 놈의 입을 묶고 있던 천이 풀렸다.

‘이미 알고 있다고.’

침묵의 악마, 벤라더.

그는 말파스의 부하 중에서 최강이자 암살과 기습의 대가였다.

게다가 그의 입에는 환술을 거는 3번째 눈이 숨겨져 있다.

모든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오직 감각만으로 놈에게 접근했다.

캉! 촤악!

모든 수가 봉인된 순간.

벤라더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침묵의 악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내 검격을 받아쳤다.

다만 그게 전부였다. 튕겨낸 칼날이 무색하게도 수없이 많이 나뉜 칼날들이 뒤이어 그를 덮쳤다.

“침묵의 악마가 맞기는 하네.”

아주 조용하게 가셨다.

진짜 이것들은 컨셉 하나는 오지게 잘 지키네.

나는 수백 조각으로 나뉜 다크 엘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제야 반응들이 오네.’

내가 벽을 뚫고 들어온 곳은 성체의 어느 탑.

승부 자체는 신속히 끝냈지만, 소리를 들은 자들이 아주 많았다.

나는 부서진 벽을 나오며 [그림자 난무]를 펼쳤다.

“모, 모두! 피해…….”

응, 늦었어.

독성을 품은 마기가 내성의 안뜰을 쓸어버렸다.

소음을 듣고 탑으로 가까이 온 마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깔끔히 정리되었다.

그중에는 내가 찾던 놈들도 많았다.

“오. 뱀파이어다.”

한때 흡혈귀였던 액체 괴물.

슬라임처럼 바닥에 붙어 버린 피떡에 손을 뻗었다.

슈우우우, 붉은 기운이 마기와 분리되어 내 손바닥을 휘감았다.

[특성: [밤의 귀족]의 효과가 제거되었습니다.]

[특성: [고귀한 혈통]이(가) 개방되었습니다.]

[[고귀한 혈통]의 효과로 효율이 30%만큼 증가합니다. 혈마력을 외부로 응집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혈마력이 치명상을 빠르게 치료합니다. 상급 마족이나 그와 비슷한 영약 이하의 효과를 받을 수 없습니다.]

혈마력이 500점을 넘기며 새로운 특성이 나왔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성 내부의 적들을 살폈다.

뿔족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마족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

이제는 전사들을 불러들여도 괜찮을 듯싶었다.

‘깨비야, 전사들 데리고 이쪽으로 와.’

사념을 날려 명령을 내린 뒤.

나는 외성으로 이동하며 마족들을 처리하고 외성 문을 열어주었다.

깨비와 뿔족 전사들의 눈동자에 빨갛게 물든 성의 풍경이 비쳤다.

“살아남은 놈들이 있으면 죽이고, 무기들과 물자는 전부 회수해.”

“예, 알겠습니다!”

뿔족 전사들의 충성심이 쭉쭉 올라가네.

아니, 두려움인가? 뭐가 어쨌든 뿔족에 끼치는 내 영향력은 더욱 상승했다.

내가 명령을 내리고 외성 문으로 의자를 가져와 앉자, 깨비가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주군. 그런데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뭐가.”

“저번에는 적당히 타협했는데, 초반부터 너무 세게 가는 게 아닌가 해서요.”

데모니움 영지에서는 마족군과의 대결을 피하며 노예들을 되찾는 데 힘썼다.

한데 왜 지금은 대놓고 전투를 벌이는 거냐?

깨비가 가진 의문은 대충 그런 것이리라.

“밑천을 푸는 것뿐이야. 여태까지는 내가 꽤 강한 악마라는 느낌이었잖아.”

“예, 그렇죠.”

“이제는 그 이상을 보여 줘야지.”

데모니움에서는 영토와 부하들을 얻었다.

그게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만만하기 때문이다.

대악마가 나선다면 언제든지 처단할 수 있는 수준.

그렇기에 레라지에는 나를 지원해서 다른 대악마와 격돌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말파스에게 죽으면 놈에게도 이득이니까.’

한 마디로 일회용 소비품이다.

한번 어그로를 끌고 상대의 영지에 타격을 주면 좋다고 생각하겠지.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거든. 전면전으로 갈 거야.”

“정말입니까!”

“그래, 당연하지. 이제부터 협상은 칼로 한다.”

깨비는 기대하던 대담을 들었는지 빵빵한 근육을 징그럽게 움직였다.

저런 놈들을 노예로 길들인 마족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 의자에 앉아 말했다.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가서 너도 거들어.”

네가 여기서 노닥거릴 짬밥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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