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11화 (111/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11화>

111. 마족과 춤을 (1)

“그렇군.”

적막하고 웅장한 공간 안에서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권좌에 앉아 차갑게 눈을 빛내는 존재.

마계의 대악마이자 데모니움 영지의 주인은 부하의 말에 분노를 곱씹었다.

“현재 사라진 노예의 수는 2만이 넘으며, 용맹의 악마가 다스리고 있는 영지 서북부에 자리를 잡았다는 정보입니다.”

“이제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인가?”

“예, 하지만 에레보스 영지와 우리 영지 사이에 자리를 잡아 토벌이 힘듭니다.”

“크르르. 쥐새끼 같은 놈.”

누군가 한 달이 넘도록 데모니움을 휩쓸었다.

문제는 상대의 정체도 알 수 없다는 것.

영지 전체가 그의 영역 안이지만, 도저히 침략자의 기운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반란군의 덩치는 커졌고 더는 막무가내로 영지를 휩쓸지 못했다.

‘이제 슬슬 군대를 보내야겠군.’

지금은 군대를 마음껏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니 최대한 속전속결로 이 노예의 반란을 매듭지을 필요가 있었다.

괴물의 모습을 한 존재가 권좌에서 일어났다.

등에는 검은색 피막과 발톱이 달린 날개가 있었고, 손톱과 발톱은 길게 자라 위협적이었다.

레라지에.

짐승의 것을 닮은 그의 신체에서 마기가 흘러나왔다.

이것은 그가 분노했다는 상징. 보고를 올린 하이 리치는 고개를 숙이며 벌벌 떨었다.

“좋다! 조화의 악마여. 그대는 당장 노예들을 이끌고 영지에 자리 잡은 침입자의 정체를 밝혀내라!”

레라지에의 명령은 토벌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영지를 침략했지만, 직접 나서지도 않았다.

대마법사의 수준에 필적하는 하이 리치를 겨우 수색 명령에 사용했다.

이유는 굳이 입 밖으로 내밀 필요가 없었다.

“모스코스! 근심을 덜어 드리도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적의 정체가 밝혀질 때까지. 용맹의 악마도 지역에서 물러서라고 말해두도록.”

“예, 다른 악마들에게도 특별히 신중하도록 말하겠습니다.”

전력 손실은 최대한 피하라.

조화의 악마, 모스코스는 이런 주군의 뜻을 최대한 헤아렸다.

그는 뼈만 남은 척추와 경추를 굽혀 예를 표하고서 자리를 떠났다.

쿠웅, 문이 닫히고 넓은 공간 안에는 레라지에 혼자만이 남았다.

부하가 떠나자, 레라지에는 소의 뒷다리를 닮은 하체로 넓은 공간을 돌아다녔다.

“하필 우리의 영지라니.”

침입자는 분명 인간이다.

실력이 얼마나 강할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긴장감을 가질 만한 일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악마급 실력자 중에서 은신 능력이 뛰어나다면 대악마의 기감을 속이기도 하니까.

다만 심각한 건 현재 상황이었다.

마신은 죽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 마신의 힘을 탈취한 상태.

여러 대악마들은 마신의 신탁을 받지 못한 지 꽤 오래되었다.

애당초 차원 대전쟁 시절부터 많은 힘을 소비한 마신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배신.

레라지에는 한 단어를 떠올렸다.

마신은 모든 마족의 어버이다. 그런 존재를 어느 대악마가 먹어치웠다.

게다가 본인이 마신인 것처럼 신탁을 내려 다른 마족들을 속이기까지 했다.

명백한 신성 모독에 대악마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반목했다.

푸르카스, 발라크.

레라지에는 두 대악마의 이름을 씹어 뱉어냈다.

지리적으로 마신의 힘을 취했을 가능성이 큰 대악마는 그 둘이었다.

하지만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대악마와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영지 경계에 자리를 잡았다는 침략자를 처리하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대군주시여!”

그가 생각을 점차 정리할 무렵.

거대한 문을 열고 한 고위 마족이 안으로 들어왔다.

허락도 받기 전에 멋대로 들어온 것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레라지에는 우선 부하의 보고를 들었다.

“무엇 때문이냐.”

“용맹, 용맹의 악마가 침입자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고위 마족도 아니고.

단순히 영지 내에 있는 작업장이나 마을이 아니다.

본인이 이끄는 다섯 악마 중의 하나가 벌써 죽었다니?

“침입자의 정체는 확인하였는가?”

“그게, 마기를 다루는 인마족이라는 정보밖에는.”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레라지에의 인중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다른 대악마의 술책이란 말인가.

안 그래도 흉악하던 레라지에의 인상은 더욱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 * *

“와아!”

“루카님 만세! 만만세!”

뒤에서 나를 향한 열렬한 응원이 들려왔다.

발아래에는 분명 용맹의 뭐라고 소개하던 놈이 죽어 있었다.

이름이 뭔지 기억이 안 나네.

“뭐, 약하기도 했고.”

단델리온보다 살짝 강한 정도.

악마들의 수준을 고려하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용맹하게 철퇴를 들고 도전하는 자세는 좋았다.

죽었지만.

“주군, 주변에 살아남은 적은 없습니다!”

채석장에서 구해 줬던 최초의 뿔족 무리의 일원.

지금은 내 오른팔이 된 ‘깨비’가 늠름한 근육을 뽐내며 다가왔다.

원래는 깡말라서 좀비처럼 생겼었지만, 그새 뿔이 자라나고 점차 힘을 되찾는 중이었다.

“그래, 수고 많았어. 저번에 구출한 동료들은?”

“아직 뿔이 완전히 돌아오고 있지는 않습니다.”

깨비가 근육질의 몸을 비틀어 뒤쪽의 상황을 보여 줬다.

의욕을 잃은 얼굴, 자유에 대한 공포.

다리에 걸려 있던 구속에서 풀려나자, 그들은 자신을 억압하던 도구를 애틋하게 보았다.

“걱정하지 마십쇼. 저희가 잘 타일러서 용맹한 전사로 바꿔 놓겠습니다.”

깨비가 당찬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그의 팔뚝을 툭 쳐줬다.

그는 한 달 전에 나에게 손을 들어 질문하던 늙은 뿔족이었다.

‘그냥 노안일 뿐이었지만.’

나는 또 뿔족의 촌장쯤 되는 줄 알았지.

알고 보니 그냥 혈기왕성한 노예 청년이었다.

그는 뿔이 다시 자라나 자신감을 되찾았고, 나에게 손수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지금은 충실한 수하가 되었고.’

나는 피떡이 된 채 쓰러진 다른 마족들을 살폈다.

데모니움 영지의 서북부, 이곳의 뒤쪽은 산이고 앞에는 제법 넓은 강이 흐른다.

말 그대로 외적을 막아 내기 편한 곳이다.

게다가 더 서쪽으로는 ‘에레보스’라는 다른 영지가 있다.

아마 레라지에는 지금쯤 골머리가 썩고 있을 것이다.

웅성웅성.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나는 고개를 돌려 강의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마족군의 깃발, 조금 전에 도착한 마족의 군대가 아직 저기에 많았다.

“상부에서는 뭐라고 했나?”

“조화의 악마께서 곧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이곳에서 대기하라고 하십니다.”

“그게 사실이더냐? 허!”

초월자에 가까워진 기감은 매우 많은 내용을 알려 주었다.

저기에 있는 고위 마족은 내 강함을 간접적으로 이해했다.

악마의 상대가 아니다. 대악마가 직접 나타나지 않으면 힘들 터.

대충 이런 판단을 세우고 있겠지.

“유능하네.”

물론, 레라지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본인이 나서야 일이 해결된다는 걸.

근데 이를 어쩌나 자칫 잘못하면 정말로 전쟁 시작인데?

‘에레보스 영지도 신경 써야 하고, 근처의 다른 대악마가 빈집털이를 할지도 모를 일이지.’

나는 어렸을 적에 X타크래프트를 했기에 빈집털이의 악몽을 잘 안다.

그거 내가 당해봐서 잘 아는데 졸라 빡치거든.

그렇다고 여기서 마냥 기다려 줄 생각은 없다.

슈슉.

발을 구르자 내 신형이 사라졌다.

스칼렛의 [공간 이동]처럼 나는 순식간에 적의 숙영지 상공에 나타났다.

철컥, 리볼버에 오러를 장전하고.

파파파파파팡!

아래쪽에 느껴지는 생명체를 향해 오러탄을 난사했다.

저격에 가까운 명중률로 적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가까스로 첫발을 견뎌낸 고위 마족에게는 특별히 [스크류 샷]을 가득 담아 쏴줬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텅 빈 숙영지에 가득 쌓인 식량 창고를 보았다.

‘깨비야. 마족들 다 죽었으니까, 사람들 시켜서 무기랑 식량 좀 챙겨가라.’

나는 깨비에게 사념을 보내고 다시 땅에 안착했다.

그때였다.

다른 생명체의 기운.

나는 공간을 넘어 이동하는 무리를 감지했다.

적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했는지, 곧바로 병력을 증원한 듯싶었다.

심지어 대부분 상급 마족들로 포진된 정예 부대였다.

‘마중 인사나 가 볼까.’

나는 거칠고 난폭한 마기를 내뿜으며 속도를 올렸다.

파공성이 들리며 내 육신이 쏘아져 나갔다.

파파파팍!

흑도를 휘두르며 공간을 넘어온 적의 군대를 꿰뚫었다.

내 목표는 군대를 이끄는 ‘하이 리치’.

분명 조화의 악마라고 했던 레라지에의 측근이었다.

쩌엉! 순식간에 중심을 돌파한 내 검이 어떤 힘에 막혔다.

“네놈은. 인간이 아니군?”

“말이 짧아.”

나는 B등급에 오른 [림보 어]를 구사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림자 검술 2번, [환영 활보]

내 신형이 안개처럼 변하며 주변 지역을 감쌌다.

이 기술은 원래 환영을 만들어내는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환영이 겹쳐지며 검은 안개가 생성되었다.

당연히 내 존재감은 이 안개 속에서 더욱 희미해졌다.

효과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주변 마족들이 픽픽 쓰러졌다.

원래는 단순한 안개에 불과했으나 이 기술은 마기가 에너지로 사용되었다.

마기에 포함된 엄청난 독기가 내 의지대로 마족들의 목숨을 취했다.

“헛된 수작을!”

하이 리치는 주변에 공간을 왜곡시키며 결계를 쳤다.

자신의 공간을 공고히 하며 독기를 몰아낼 요량이었다.

천천히 숨 막혀 죽는 쪽이 좋은가 보지?

마의 기운.

내 속에 잠들어 있던 마기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단순히 기운을 담아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하이 리치가 구현한 결계의 기운이 흐트러졌다.

“어때 무섭지?”

“크윽!”

솔직히 저런 결계 따위 얼마든지 깨부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너무 많은 패를 까 버리게 되면 정말로 대악마가 나설지도 모른다.

악마 중에서는 상당히 강한 편.

내가 원하는 평가는 일단 그 정도면 충분했다.

“잠시만! 잠시만!”

마침 해골 대마법사는 대화를 시도했다.

나도 사방에 퍼졌던 기운을 갈무리하며 상대를 놓아 주었다.

“대화를 원하는 건가?”

나는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하이 리치는 턱뼈를 딱딱 부딪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이 어느 때인 줄 알고 그러는가!”

“저녁 먹을 시간?”

“부에르님께서 돌아가시고, 그분의 영지가 인간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장난은 집어치워라!”

“그게 이 싸움을 멈출 이유가 될까.”

내 물음에 상대는 황당한 듯 턱을 축 늘어트렸다.

“애당초. 그 어눌한 [림보 어]는 왜 사용하는 것인가?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내가 이 언어를 배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살짝 열은 받았지만, 저렇게 진짜 악마라고 생각해 주니 정말 고마웠다.

그렇다면 ‘협상’이라는 걸 해 볼 수 있으니까.

“내가 모시는 주군이 누구인지 알릴 생각은 없다.”

“지금 더 해 보겠다는 건가. 여기서…….”

“그건 우리 쪽의 문제가 아니라서 말이야.”

나는 살짝 헷갈리게 말을 흘렸다.

우리 쪽이 아니라면 마계 대륙 동부의 영지와는 관련이 없다는 건가.

해골의 의심이 천천히 서쪽의 대악마들에게로 향했다.

뭐, 숨 막히는 눈치 게임은 당신들끼리 하시고.

“사실, 이렇게 뿔족의 전투력이 상승하면 그대로 군대가 생기잖아.”

“그자들은 마족이 아니다. 신성한 전쟁에 누굴 끼워 넣는 건가!”

“그렇긴 하지만, 지금 데모니움 영지는 주변에 적이 많잖아. 내가 도와줄게.”

“……하?”

상대의 입에서 바람이 새어 나가는 소리가 났다.

아니, 영지를 들쑤시고 개판을 치더니만 갑자기 도와주겠다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라는 말이냐. 대충 이런 반응이었다.

“싫어? 원래 내 군주께서는 다른 대악마님들을 도와서 전쟁에 참전하라고 하셨거든.”

“그럼,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게 아니더냐!”

“나도 군대가 있어야 전쟁을 하지. 아니면 너희 영지에서 줄 것도 아니잖아.”

갈수록 가관이다.

이내 해골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입을 열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손바닥을 내밀어 그의 포효를 잠재우고 말했다.

“잘 생각해 봐. 이건 주변 영지를 견제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나는 그리 말하며 실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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