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09화>
109. 해피 데스 데이 (3)
헬란 공성전이 마무리된 직후.
나는 총사령관 카시안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회의실에는 알베르트 후작과 트리시아 후작이 참석했다.
인원은 조촐했다. 단순히 정해진 계획을 점검하는 것이니 많을 필요도 없었다.
“이게 저희가 입수한 마계의 전도입니다.”
트리시아 후작은 가죽에 그림을 그려 만든 지도를 펼쳤다.
헬란 성체를 점령하고 부에르가 가지고 있던 물품 중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마계의 구조는 판게아와 아주 비슷했다.
기본적으로 하나의 대륙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것.
한 가지 까다로운 점은 마신의 제단은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정도였다.
‘내 목표는 근원을 얻어 내는 거니까.’
토끼녀도 마신의 힘은 ‘타르타로스’라는 섬에 있다고 했다.
게다가 문제는 더 있었다.
우리가 점령한 헬란은 마계 대륙의 동쪽 끝이다.
그런데 타르타로스의 위치는 대륙의 서쪽 끝이었다.
“우선, 헬란과 경계를 맞댄 지역은 이 두 곳이로군.”
“예, 폐하. 발음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데모니움과 인페르노 영지입니다. ”
트리시아 후작은 마족의 문자를 해석하고 읽었다.
이 또한 들어 본 정보였다.
두 개의 영지에는 각각 그 지역을 다스리는 대악마가 있다.
그 밑으로 악마와 고위 마족들이 줄줄이 소시지로 엮여 있는 형국이고.
“루카 경. 자네가 말한 대로군?”
“네, 신의 계시가 정확히 적중했습니다.”
“좋네. 그렇다면 자네는 말했던 대로 서북부의 데모니움 영지로 갈 텐가?”
“원래 계획대로 하겠습니다. 그곳에는 노예가 많으니까요.”
“음, 신의 뜻이니 응당 그렇겠지.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일을 완수하겠네. 잘 부탁하네!”
대동맹군은 아직 헬란 영지를 완전히 손에 넣지 못했다.
내가 이끄는 대로 본성으로 먼저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계획은 빠르게 부에르라는 거대 변수를 처리하고, 그 뒤에 천천히 영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일단 헬란 영지는 확보하기 어렵지 않겠어.’
영지의 주인은 사라졌다.
그 휘하에 있던 군대는 우두머리를 잃고 혼란에 빠졌다.
다른 대악마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터.
판게아에서 온 원정군이니 대악마들도 신경이 곤두서 있기는 하겠지.
다만 예민한 것과 직접 움직이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럼, 부탁하네. 우리는 자네만 믿고 인페르노 쪽으로 병력을 배치하겠네.”
카시안은 나를 신뢰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는 그와 큰 유대감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보여 준 능력과 진실성 정도는 카시안도 인정했다.
“맡겨 주십쇼.”
나는 본격적인 작전 회의에 들어간 사람들을 두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헬란의 성체는 크기가 매우 거대했다.
안에는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주택이나, 가축을 기를 수 있는 마구간도 있었다.
마계를 공격할 거점으로 쓰기에는 충분하다.
나는 길게 이어진 회랑을 걸으며 내성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것들은 어디에 둘까요?”
“중요한 것들이니, 내성 안쪽에 따로 보관고를 만들어야겠어.”
“그럼, 상부에 건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내에는 군수 담당관들이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중에서 내 눈에 띄는 거대한 상자가 있었다.
상자 안에는 이번 헬란 공선전에서 위력을 발휘한 폭탄이 들어 있었다.
이름하여 ‘인류의 철퇴’.
연금술사, 마공학자, 마법사, 종교인.
판게아의 기술과 인재가 총집합해서 만들어 낸 걸작.
위력은 이전에 오크의 영역에서 썼던 것과 거의 비슷했다.
듣기로는 핵폭탄을 전부 샘플로 넘기는 대가로 리버티 교단이 막대한 이권을 얻었다던데.
뭐, 마틸다가 제안한 내용이니 교단이 손해는 안 봤겠지.
“짜잔!”
웬 토끼가 허공에서 삐죽 튀어 나왔다.
나는 저절로 눈을 찌푸리며 토끼에게 관심도 주지 않고 지나쳤다.
“아, 아앗! 너무해요.”
폴짝, 폴짝.
토끼는 4족 보행으로 내 뒤를 따랐고, 나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초월자라는 얘가 이렇게 경박해도 되나.
누가 보면 애완동물인 줄 알겠네.
“너, 사람에게 보이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에이, 보면 뭐 어때요. 설명해도 아무도 안 믿을 텐데.”
“배짱은 좋네.”
“그리고 뭔 일이 있으면. 우리의 에이스! 김만……. 루카 씨가 알아서 해결해 주실 거잖아요?”
토끼녀와 대화를 나누며 내성을 빠져나갈 무렵.
내 앞으로 두 리볼버를 벨트에 꽂은 총잡이가 나타났다.
그는 손을 들며 나에게 인사했다.
“수고가 많군.”
“단장님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잔당 퇴치야 일도 아니……. 잠시만, 이 토끼는 뭔가?”
“그러니까.”
실험을 해 볼 기회였다.
“신입니다.”
팡!
내 말과 함께 프레스턴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토끼는 미간이 뚫려 뒤로 자빠졌고, 프레스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죽는데?”
“신이 아닌가 보죠.”
다른 사람도 죽일 수 있구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의식을 잃은 토끼를 들어 올렸다.
움직이지 않는다.
1, 2, 3, 4.
나는 천천히 숫자를 셌다.
토끼녀가 말하길, 마계는 마신의 힘이 극도로 약해져 차원 내부에서 활동하는 게 가능하다고 했다.
덧붙여서 물리적으로 나를 도와줄 수는 없다고도 말했다.
5, 6, 7, 8.
숫자는 계속 올라갔다.
프레스턴이 내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자네,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움직였다.”
“응? 정말이군.”
꿈틀.
토끼의 수염이 까딱거리며 움직였다.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고, 토끼녀는 살짝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10초라. 애매한 시간이네.
“안타깝네. 혼자 다닐 수 있었는데.”
“뭐라고?”
“아닙니다. 실은 아까 내성에서 주운 마물입니다. 죽여도 다시 이렇게 살아나더군요.”
“호오, 신기하군. 내가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토끼처럼 생겼는데 말이야.”
“뭐, 더 데리고 다니다 보면 더 알게 되겠죠.”
프레스턴은 토끼녀의 실체를 꿰뚫어 보지 못했다.
나에게는 살짝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그는 어떠한 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확실히 4번째 벽에 다가서며 여러 면에서 성장한 느낌이었다.
‘옛날에는 내 속을 꿰뚫어 봤었던 사람이 말이야.’
속이 비었다.
나는 3번째 벽을 넘기며 그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아냈었다.
지금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더 잘 알았다.
내 몸에는 한계가 없다. 마른 스펀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니, 무엇이든 잘 빨아들이는 이치와 같았다.
“참, 몇 시간 뒤에 간단히 모여서 술이라도 마실 테니. 자네도 참석하게.”
“시간이 되면요.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러자고.”
나는 프레스턴과 인사하고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이곳 사람들은 내가 홀로 마계를 돌아다닐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언제 떠나는지는 몰랐다.
‘굳이 떠들썩하게 알릴 필요는 없지.’
이왕이면 지금 당장 떠나자.
나는 토끼를 한 손에 든 채로 성을 빠져나왔다.
토끼녀는 고통도 제법 느끼는지, 다리를 바둥거리며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제 목덜미 좀 놓아 주세요. 아파요, 아프다고욧!”
* * *
데모니움.
그곳은 헬란 영지의 서북부와 맞닿아 있다.
나는 급한 대로 토끼녀에게 마족어 교습을 부탁했다.
그녀는 내 어깨에 앉아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마계에는 언어가 정말 많아요. 판게아는 주류 언어가 2개이지만, 여기는 그 반대죠.”
“종족마다 쓰는 언어가 다른 건가?”
“네.”
“그러면 네가 알아서 배울만한 언어를 골라서 가르쳐 줘.”
나는 대악마의 지역 안으로 들어가 활동해야 한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들의 언어를 알아 두면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
토끼녀는 앙증맞은 토끼 손을 입에 갖다 대며 고민했다.
“아무래도 마족에서 공용어처럼 쓰이는 [림보 어]와 인마족인 것처럼 다니려면 [인마 어]가 좋겠죠?”
“일단 [림보 어]부터 알려 줘.”
“후후. 제가 또 가르치는 것에는 한 당근 하죠.”
“그 정도면 컨셉에 파묻혀서 죽겠다. 그만해라.”
나는 주 에너지원을 마기로 교체하고 교습을 받으며 한참을 이동했다.
[통달한 자]와 [천재적 두뇌]의 효과로 학습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이 재능을 가지고 지구로 돌아가면 진짜 편하겠는데?
[스킬: [림보 어]의 등급이 ‘E’가 되었습니다. 지능+2]
나는 금세 아주 기초적인 어휘 실력을 갖추었다.
그리고 갈고닦은 언어 실력을 뽐낼 기회가 찾아왔다.
꼬박 한나절을 이동하니, 정면에 많은 인파와 커다란 성벽이 보였다.
데모니움 영지로 가는 관문 요새, 그 근처에는 영지를 버리고 도망가는 마족군 병사들이 많았다.
“%^@&!”
“비켜! 나도 *(^&%!”
들린다, 들려.
이제 조금씩 마족들의 말이 들리는 듯싶었다.
나는 떨리는 심장을 움켜잡고 가장 뒷줄에 선 마족에게 다가갔다.
마계에서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임프가 그 주인공이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여기가 데모니움 영지로 넘어가는 관문인가요?”
발음은 어눌하고 딱딱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내보았다.
임프는 나를 이상하게 훑어보더니 무어라 말했다.
“^$%*%? 꺼져!”
물론, 열정으로 빚어낸 용감함이 항상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임프의 행동과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아무래도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거, 걱정하지 마세요. 처음이 다 그렇죠!”
토끼녀는 하얀 손을 불끈 쥐며 나를 응원했다.
그래,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겠지.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압축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흑도를 꺼냈다.
그림자 검술 4번, [그림자 난무]
흉악한 마기가 무명을 감쌌다.
짙은 그림자의 색을 대변하듯, 칠흑 같은 기운이 검에 응집되었다.
촤촤촤촥! 나를 기준으로 사방을 향해 먹색의 검강이 쏟아져 나왔다.
“아닛! 아무리 창피하셔도 그렇죠!”
토끼녀가 비명을 토해 내듯 소리쳤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검강을 날려댔다.
주위의 생명체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휴우.”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깊게 뱉어냈다.
관문 바깥쪽에 살아남은 생명체는 없었다.
내 등 뒤에 숨은 가증스러운 토끼 한 마리를 빼고.
“혹시 인성 검사 같은 거 안 받아보셨나요?”
“어차피 다 죽일 생각이었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대동맹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러 올 것이다.
나는 그저 내 동료들이 수고를 덜도록 칼춤을 추었을 뿐이다.
“관문 안쪽에는 아직 살아 있는 놈들이 많네.”
나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관문의 내부로 기감을 펼쳤다.
안에서는 고위 마족을 필두로 수많은 마족이 전투를 준비했다.
나는 뒤로 검을 늘어트리고 앞으로 튀어 나가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키이잉!
[달빛 베기].
그림자 검술의 3번째 기술이 기이한 소리와 함께 장관을 만들어냈다.
수백 개로 불어난 칼날이 길게 늘어나며, 어망처럼 촘촘하게 막을 만들어냈다.
물고기를 향해 입을 벌리듯 분열된 검날이 관문의 성벽을 아우르더니.
슈왁! 깔끔하게 잘리는 소리와 함께 성벽이 통째로 베어졌다.
쿠구구구.
자욱한 먼지.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서 살아남은 것들을 모조리 썰어 버렸다.
하급, 중급, 상급, 고위.
여러 계급의 마족과 마물이 사이좋게 명을 달리했다.
“다 해치웠다.”
“저기.”
토끼녀는 한결 쭈그러진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혹시 화나셨어요?”
“아니거든? 나중에 마족어를 써먹을 때까지만 잘 익혀 두면 되니까.”
“넵, 더 물어보지 않을게요. 근데 혹시 화나셨…….”
슈왁
토끼의 몸이 반듯하게 잘려나갔다.
나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흑도를 칼집에 넣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데모니움 영지. 먼지가 지면으로 내려앉고 관문의 반대쪽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