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08화>
108. 해피 데스 데이 (2)
헬란.
부에르 영지의 중심에 있는 본성의 외성벽이 화염에 휩싸였다.
마기와 오러, 신성력, 혈마력.
판게아와 마계에 존재하는 4가지의 기운이 한데 섞여 장관을 빚어냈다.
비명이 터지고, 살점과 핏물이 흩날리며.
“그륵.”
물론, 그 잔인한 일은 여기에서도 일어났다.
내 앞에 쓰러진 노란 머리의 악마. 로자리아가 입에서 핏물을 쏟아 내며 쓰러졌다.
싸움은 압도적이었다.
내가 가진 마기는 이제 거의 대악마에 필적했으니.
“나도 너처럼 원한은 잊지 않아.”
집착은 나도 누구 못지않다.
삶에 대한 집착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게다가 단순히 살아남은 걸 넘어서, 게임의 스토리를 끝내고 마계로 넘어왔다.
지금은 이전에 내 목숨을 위협했던 자를 스스로 처단했다.
“아직, 아직 끝이 아니야!”
로자리아는 바닥을 기며 악을 질렀다.
하긴 이쪽도 집착이 장난은 아니니, 그냥은 끝나지 않겠지.
나는 무심하게 검을 찔러 넣었다.
짙은 마기와 오러, 그리고 신성력을 조합한 검격에 로자리아의 핵이 부서졌다.
그 끈질기던 목숨이 단번에 끊어졌다.
“으, 으으.”
마기의 주인이 사라지자.
그녀의 몸속에 있던 마기들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이제 근원을 받아들일 그릇이 완성되었다.
[특성: [악마]의 효과가 제거되었습니다.]
[특성: [대악마]이(가) 개방되었습니다.]
[[대악마]의 효과로 효율이 100%만큼 추가로 증가합니다. 응축된 마기가 차원의 본질에 영향을 줍니다. 마기가 극독에 가까운 독성을 가집니다. 악마나 그와 비슷한 영약 이하의 효과를 받을 수 없습니다.]
[특성: [나는 전설이다]의 효과가 제거되었습니다.]
[특성: [통달한 자]이(가) 개방되었습니다.]
[[통달한 자]의 효과로 숙련도 상승치가 300%로 변경됩니다. 차원의 본질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3154점.
나는 상태창에서 새롭게 적힌 마기의 수치를 읽었다.
[통달한 자]의 효과가 더해지자, 이전과는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발짝 나아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전에 3번째 벽을 넘어서며, 나는 차원의 본질에 위력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 자체가 틀렸어.’
따지자면 이전에도 차원에 위력을 가할 수는 있었다.
다만 그건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우물 안의 모든 걸 알았다고 해서 세상을 다 알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이제야 우물 밖으로 나와 세상을 봤을 뿐이다.
쾅!
등 뒤에서 들린 폭발음에 지축이 흔들렸다.
아군은 내 전투가 끝난 시점에 본성의 외곽을 넘기 시작했다.
헬란 성체를 점령하는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내가 할 일은 다 했어.’
수비대에서 가장 강한 로자리아가 방금 쓰러졌다.
그녀를 쓰러트린 것만 해도 이미 높은 공로를 세운 셈이었다.
나는 성벽으로 가지 않았다. 오히려 성체의 깊은 곳으로 갔다.
“네놈은 누구냐!”
다른 성벽에서 지원 온 마족들.
그중에는 ‘웨어울프’라는 제법 희귀한 마족도 섞여 있었다.
나는 허공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림자 검술 1번, [잔상 꿰뚫기]
공중을 가른 검의 꼭짓점.
칼날의 끝은 분명 아무것도 찌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 앞을 막아섰던 마족들은 일제히 피 분수를 뿜으며 절명했다.
자유롭다. 그리고 강하다.
4번째 벽을 넘겨 초월자가 된 것도 아닌데, 벌써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이러니 다들 초월자가 되고 싶은 거지.”
검귀도, 대악마도, 전대 시계탑주들도. 아마 검성도.
모두 이 경지에 오르고 더욱 심해진 힘의 갈증을 얻었을 터.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둘러 본성 내부로 들어갔다.
“누구냣!”
“부에르님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아라!”
본성 내부에는 시종처럼 보이는 자들이 많았다.
그자들도 전부 중급 마족 이상, 상급이거나 고위 마족인 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나는 그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며 전진했다.
이윽고 나는 어느 공간에 도착했다.
대전, 혹은 알현실.
시타델에서 처음 여왕을 만났던 곳과 비슷한 공간이 보였다.
검은색 계열의 금속으로 제작된 웅장한 문이 나를 막아섰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거대한 문이 스르르 열렸다.
- 들어오라.
부에르의 사념이 공간을 울렸다.
어? 이거 이제 나도 할 수 있는데.
내 얼굴에서 헛웃음이 슬쩍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고오오.
나는 부에르의 기운을 간단히 밀어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상대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대악마라는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살아 있는 수준이었다.
- 많이 아픈가 보지?
내 사념이 똑같이 공간에 널리 퍼졌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제 연료가 다 떨어진 모양이네.
나는 흑도를 뽑은 상태로 길고 쭉 뻗은 공간을 걸었다.
그리고 보았다. 공간의 끝에 놓인 권좌.
그곳에 앉아서 힘겹게 몸을 가누고 있는 사자 갈기의 사내를.
“내 성체가 마음에 드나?”
“넓어서 좋은데, 조금 황량하긴 하네.”
크르르르.
부에르는 내 대답을 듣고서 소리를 냈다.
얕은 분노 사이에는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상대는 일부러 나를 불러냈다.
저 몸으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대악마가 직접 여기로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적의보다는 동정이었다.
“근데 우리가 이렇게 살가운 상대는 아닐 텐데?”
내가 살짝 짜증스러운 어투로 쏘아대자.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이다. 초월자에게 놀아나는 노예의 얼굴을 말이다.”
부에르가 두 입꼬리를 위로 잡아당겼다.
기분 나쁘네. 나는 기감을 퍼트려 주위를 살폈다.
역시나 함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생각보다 겁이 많군?”
“그 집념 때문에 여기까지 왔거든? 빨리 용건이나 말하고 뒤져.”
부에르의 상태는 아주 안 좋았다.
소위 말해서 뒤지기 일보 직전. 내가 흑도로 콕 찌르면 꽥하고 죽을 수준이다.
그도 죽음을 직감했는지 본론으로 주제를 이끌었다.
“세계수가 너를 죽이려 했다.”
이건 좀 강한데?
나는 흥미를 느끼며 눈썹을 움찔거렸다.
“흐흐흐, 의아함을 느끼지 않았는가. 내가 전투의 막바지에 갑자기 강해진 것을.”
“맞아. 그건 좀 물어보고 싶긴 했지.”
전투 당시에는 워낙 긴박했던지라 부에르의 의중을 살피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에 그는 전투에서 승리했다며 웃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혹스러움에 가까웠다.
힘을 증폭시킨 본인도 놀라고 있었다.
“설마 세계수가 네게 힘을 준 거야?”
“비슷하다. 내 대부분의 힘이 판게아에 넘어올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런데 본체 격의 분신이 폭발하며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대악마는 판게아로 넘어올 수 없다.
강림 의식을 통해 분신의 자격으로 판게아에 머무를 수 있다.
대악마가 그런 짜증 나는 방식을 이용해야 했던 이유는 하나다.
판게아라는 차원과 게이트를 세계수가 지배하고 있었으니까.
“한 가지 알아 둬야 할 건. 게이트의 주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세계수의 소유라는 것이다.”
“흠. 죄인의 넋두리 같은 건가? 남 탓이 좀 심하네.”
“뭐라?”
“네가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뒤질 일도 없었겠지.”
부에르의 말은 제법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장단대로 움직이기는 싫었다.
내가 상대의 말을 부정하자, 부에르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억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너희의 신은 너희를 지킬 생각이 없다.”
“음. 어, 그래. 잘 알았어.”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큰둥하게 답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새삼스럽게. 나는 흑도를 들어서 부에르를 가리켰다.
“마신께서 살아 계셨다면 이런 애송이에게…….”
부에르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신세를 한탄했다.
그의 말처럼 마신은 죽었다.
정확히 하자면 죽은 것이나 다르지 않다.
“마기는 좋은 곳에 쓸게.”
내 흑도가 움직였다.
* * *
3968점.
나는 마기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부에르의 몸에는 마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로 본체가 판게아에서 죽었다고 말했지.’
부에르는 세계수가 열어 준 게이트를 통해 힘의 대부분을 분신으로 넘겨 보냈다.
하지만 스칼렛의 텔런트가 에너지를 과하게 증폭시키며 폭주해 버렸다.
때문에 부에르의 힘 대부분은 소실된 것이었다.
“응?”
알현실에서 나오는 내 앞에 창을 든 남자가 섰다.
알베르트 후작. 그는 이번 헬란 성체 점령전에도 선봉을 맡았다.
그는 두텁게 자란 콧수염을 떨며 입을 열었다.
“대악마는 그대께서 처리하셨소?”
알베르트는 어딘가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음! 아주 훌륭한 일을 해내셨소. 선봉군도 외벽을 통과해 내성으로 들어오는 중이라오.”
“잘되었군요.”
나는 말을 마치고 알베르트를 지나쳤다.
그는 알현실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내 뒤를 쫓아오며 말했다.
“그런데 대악마와는 무슨 일이 있으셨소?”
“그런 건 왜 물으십니까.”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순순히 목을 내놓았나 궁금했을 뿐이오.”
알베르트 후작은 게임 내에서도 기사도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고지식한 거로 따지면 시계탑주보다 한 수 위다.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으며 사실대로 말했다.
믿거나 말거나. 그건 본인의 자유이니.
“그냥. 신이 우리를 버렸다고 하더군요. 게이트의 문을 연 사람도 판게아의 초월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 과연 악인다운 죽음이로다! 끝까지 인류의 분란을 조장하는군.”
글쎄 그건 알 수 없겠는데요. 아저씨.
점점 진실이 수렁 속으로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초월자가 굳이 착하고 정의로울 필요는 없지.
‘이번에 얻은 것들이나 정리해 보자.’
믿을 수 있는 건 나의 힘이 전부니까.
우선 나는 [대악마] 특성을 손에 얻었고, 4번째 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텔런트 창에서도 효과가 파괴력 증가(신화)로 바뀌었다.
이제 어떻게 해서든 ‘근원’만 구할 수 있다면.
“오, 저기를 보시오.”
내 뒤에서 열심히 입을 놀리던 알베르트.
우리가 건물 밖으로 나오자, 그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판게아 대륙의 지도가 그려진 깃발. 대동맹군의 상징이 가장 높은 첨탑에서 펄럭였다.
“선봉대장께서는 부대를 정비하셔서 내성을 공격하시죠.”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소이다. 그대께서는 어쩔 생각이오?”
“내성에 아직 잔당이 많습니다. 먼저 가서 처리해 놓겠습니다.”
“든든하구려! 그럼, 무운을 빌겠소!”
저 양반은 그래도 호의적이네.
알베르트 후작은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한 점의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손에 얻은 힘의 크기를 재단해 볼 겸.
나는 내성의 다른 구역으로 움직였다.
슉.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검을 휘둘렀다.
열심히 외성으로 이동하던 마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허물어졌다.
검귀와 결사단이 꿈꾸었던 완벽한 그림자.
나도 그 추상적인 이상향에 가까워진 감각을 받았다.
‘이제 검술의 7번과 8번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고.’
아직 오러로는 두 기술을 발현하기 힘들다.
하지만 마기를 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면 가능했다.
내성의 마족들을 정신없이 대부분 쓰러트릴 무렵.
찌릿.
[통달한 자]와 [초감각]의 조화.
무언가가 차원에 힘을 가하며 이쪽으로 넘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다급하게 뒤를 돌아봤고, 그곳에는 높이 1m 크기의 제법 거대한 토끼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만득 씨!”
“개새끼?”
“네, 맞아요! 저 개새끼……. 아뇨, 토끼입니다!”
깡충! 깡충!
귀엽게 생긴 토끼가 제 자리에서 두 발을 구르며 뛰었다.
설마 도움을 주겠다는 게.
“그 생각이 맞아요! 제가 직접 마계의 정확한 정보를 알려 드리려고 왔어요.”
차라리 강아지남이 오든가.
나는 귀엽게 다가오는 토끼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