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06화 (106/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06화>

106. 검귀의 50가지 그림자 (3)

판게아.

그 지역에 고루 퍼져 있는 세력들의 의지가 한 곳에 응축되었다.

어찌나 사람이 많았는지, 군대를 모두 소집하는 데만 2달이 걸렸다.

대동맹 전진 기지의 사령부. 그곳에는 병력을 이끌고 온 각 세력의 대표들과 참모진이 모여 있었다.

“이제 모두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소.”

신성 제국의 새로운 지배자 카시안이 대화의 문을 열었다.

그는 출신의 불평등을 깨부수고, 악마를 토벌하며 제국민의 신뢰를 얻은 젊은 황제였다.

“나 카시안 폰 스부르크는 대동맹의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어 매우 영광이오.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책무가…….”

총사령관.

카시안이 마계로 떠나는 정벌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누군가 이의를 제기할 상황이었으나 모두의 시선은 카시안의 입을 향했다.

이미 3년이 넘도록 토의를 거쳐 선출한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사단의 틈에 섞여 회의에 참석했다.

마계.

그곳은 내가 했던 게임에서는 보지 못했던 지역이다.

토끼녀와 강아지남에게 들어서 대강의 정세는 파악했으나 직접 보지는 못했다.

미지에 대한 막연한 긴장감이 내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 감정이 공포심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다들 강하구나.”

펠리스가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의미는 조금 달랐지만, 이곳에 모인 자들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판게아의 최강 전력, 그들이 내가 던진 신의 계시를 듣고 여기로 모였다.

“소개하겠소. 제국의 창, 알베르트 마그뉴 후작이오!”

짝짝짝.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 일어서자 장내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황실 마법단장인 트리시아 메이슨 여후작도 소개되었다.

그 둘은 오직 황제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자들로, 모두 마스터급 강자들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1000년이 넘도록 존속된 맹약을 깨트릴 생각이오. 마법단장과 기사단장은 들어라!”

카시안은 일종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의 명령에 황실의 마법단장과 기사단장이 무릎을 꿇었다.

“그대들은 마족의 침략에 맞서 무엇을 하였는가.”

“스부르크 황실을 보호하였습니다.”

“황실의 권위를 지켜 냈습니다.”

둘의 대답은 같았다.

애초에 둘의 직위는 황제의 입김에서 비롯된 것.

세상이 멸망하든 제국이 박살 나든, 두 사람의 임무는 황제를 보필하는 것이었다.

카시안은 그 철칙과 같던 맹약을 부수었다.

“나는 신성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서 명한다. 그대들은 이번 원정에서 황제를 지키지 말지어다. 오직 동료만을 지켜내라!”

“존명!”

“명을 받드나이다!”

이미 정해진 의식이었으나 파급력은 상당했다.

물론, 신성 제국의 황제가 총사령관이니 1차 보호 대상은 카시안이겠지만.

자신들의 고유한 전통을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니리라.

그 후로 각 세력의 소개가 이어졌다.

한 시간, 두 시간.

회의실에 모인 사람만 해도 수십 명인데.

그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의지나 이것저것을 설명하니 정말 시간이 빠르게 녹았다.

스칼렛과 클리프도 재롱 잔치를 한 번씩 하고 들어간 뒤.

“이제 마지막 순서가 남았소.”

카시안은 살짝 지친 목소리로 말하며 청중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 중에서 그의 시선이 멈추었다.

바로 내가 앉은 자리였다.

“이 대동맹의 앞과 뒤에서 힘을 써 준 판게아의 의인! 루카 경이오.”

와아, 무수한 악수 요청!

카시안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잘도 벌였다.

원래 이건 순서에 없었는데 말이야.

나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리 앞으로 나와 주시오.”

카시안은 굳이 나를 불러냈다.

그는 기막을 설치하며 나에게 살짝 귀띔을 해 주었다.

“신성회의 대사제들이 그대가 들었다는 신의 계시에 관심을 가지네.”

카시안은 그리 말하며 회의장의 중심에서 살짝 비켰다.

이게 부메랑이 되어 다시 돌아오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만들어 낸 거짓말이 한 번 더 내 기름진 혓바닥을 요구했다.

‘이제 보니까. 다들 자기네가 최고라고 말해 주길 원하네.’

나는 청중을 둘러보았다.

리버티 교단과 판게아 신성회의 사제들이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심지어 중간에 낀 마틸다가 자신을 가리키며 제 편을 들어주길 원했다.

세계수의 무녀들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우선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었다.

“흠흠.”

신의 계시.

과연 마족을 물리치고 인류의 대통합을 가져온 신의 이름은 누구일지.

모든 종교인의 시선이 내 입술에 쏠렸다.

“저는 분명 마계를 정벌하고 마신을 무릎 꿇리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내 말에 사제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마틸다는 거듭 본인을 가리키며 엉클 샘을 입 밖으로 꺼내라고 시위를 벌였다.

아니, 애당초 세계수를 제외하면 모든 초월자가 죽었다니까요?

“저는 여러분들의 의혹을 덜 의무가 있으니, 제가 듣고 본 대로 말하겠습니다. 찰스 랭커셔 후작 각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빅토리아 5세의 옆에 앉아 있던 시계탑주에게 말했다.

그는 내 뜻을 알고서 곧바로 심문 마법을 걸었다.

좋아, 일말의 거짓도 없이 의혹을 풀어 주마.

“신, 정확히 말하면 신들은 자신을 강아지와 토끼라고 말했습니다. 두 신은 저에게 케이크를 선물하며 노고를 치하했고, 다 같이 방방 뛰면서 기쁘게 공간을 뛰어다녔습니다.”

나는 오직 진실만을 말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하지만 내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종교인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저 신이 우리가 모시는 신이면 절대 안 돼!

권위고 뭐고 아무것도 없잖아.

마틸다를 포함한 모든 사제의 생각이 이런 식으로 귀결된 듯 보였다.

모든 설명이 끝났고, 나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청중을 바라보았다.

“하? 시발, 뭐라는 거야.”

마틸다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며 당혹스러움을 내보였다.

소녀의 돌발 쌍욕에 반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성회의 사제들도, 세계수의 무녀들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정신이 혼미해졌기 때문이다.

“진실이오. 조금의 거짓말도 없었소.”

그 허무한 상황에서 찰스 랭커셔의 냉철한 분석이 내리꽂혔다.

* * *

며칠 뒤.

암흑대륙에 모인 세력들이 모두 모여 성대한 출정식을 했다.

김시자들이 이야기한, 내가 신의 계시라고 말한 날짜에 맞춰 모든 일이 척척 해결되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대열을 맞추고 약속된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후우, 떨린다.”

스칼렛은 손을 주무르며 긴장감을 풀었다.

나는 그 옆에 서서 활동이 멈춰 버린 게이트를 살폈다.

이제 시간은 다 되었다. 내가 잠시 다른 사람들을 살피는 순간.

“게, 게이트가 움직인다!”

누군가의 외침이 주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다급히 고개를 돌리니 게이트의 색깔이 변하며, 일정한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게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형태.

그것과 굉장히 비슷했으나 게이트는 점차 몸집을 부풀렸다.

“단순히 크기만 커지는 게 아니야.”

스칼렛은 눈에서 빛을 뿜어내며 말했다.

그래, 게이트는 단순히 규모만 커지는 게 아니었다.

많은 수의 인원, 그리고 높은 수준의 강자들을 대량으로 받아 내기 위해 턱을 빼고 입을 찢는 중이었다.

‘원래는 세계수가 게이트의 주도권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막아 냈다고 했지.’

또 감시자들은 본인들이 게이트의 크기가 커지지 않도록 막았다고 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몰라도, 그 덕분에 마족들은 판게아로 넘어오지 못했다.

특히 대악마는 강림 의식이 아니면 판게아로 오는 게 아예 불가능한 정도였다.

그만큼 게이트는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이번에 판게아의 어느 신이 아량을 베풀어 주시나 보지.”

“오오! 완전 든든해!”

스칼렛은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적어도 한동안은 게이트의 크기가 커진 상태로 있을 터.

우리 인간들이 마계로 원정을 떠나는 것이니, 보급이나 인원 보충이 충분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판게아의 신들께서도 우리의 승리를 바라고 있다는 증거다! 선봉은 깃발을 들어라!”

저 앞에서 눈치 좋은 카시안이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 있지 않아, 대마법사들이 게이트로 진입해도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화려하고 우아한 카시안의 검이 앞을 가리켰고, 황실 기사단장은 함성을 내지르며 부하들을 이끌었다.

“선봉대! 전진 앞으로!”

정예로 이루어진 2만 명의 물결.

1차 원정대가 출발하기 앞서서 꾸려진 선봉대의 숫자는 엄청났다.

모두가 오러나 마나를 다뤘고, 자신의 세력 안에서 엘리트 취급을 받던 자들이었다.

알베르트가 이끄는 선봉대의 목표는 주변 지역의 점령.

그들이 전령을 보내거나, 하루가 지난 시점에 1차 원정군의 본대가 출발할 예정이었다.

물론, 나도 그 선봉대의 일원이었다.

“클리프, 스칼렛. 가자!”

오와 열을 맞춰 전진하는 병력을 제치고.

우리는 주저 없이 게이트를 향해 뛰어들었다. 내가 먼저 끈적해 보이는 막을 뚫고 나아갔다.

그 뒤로 클리프와 스칼렛의 모습이 보였다.

미지의 세계.

대부분의 사람은 마계를 그리 생각했다.

실제로 그곳을 본 적은 없었지만, 나는 사정이 살짝 달랐다.

이미 감시자들이 마계의 생김새를 보여 주고, 현 상황을 상세하게 알려 주었으니까.

‘일단 게이트 주변의 확보가 중요해.’

쭉 뻗은 통로가 펼쳐졌다.

SF영화에서 웜홀을 통과하듯, 공중으로 떠오른 상태로 내 몸이 이동되었다.

끝이 보인다. 나는 흑도를 뽑고서 마기가 느껴지는 입구를 보았다.

슈우우욱.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과 함께.

내 눈으로 땅거미가 짙게 깔린 세상의 풍경이 밀려들어 왔다.

이어서 앞서 뛰어들었던 신성 제국의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무기를 든 하급 마족들을 참살하며 전진하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비명은 거의 한쪽에서만 들려왔다.

게이트를 지키고 있던 마족들은 정예 기사들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나는 적진을 파고들어 높게 지어진 탑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마족들이 세운 건축물. 송곳 같은 첨탑과 관문처럼 생긴 요새가 한눈에 들어왔다.

‘암흑대륙에 지어진 건물과 비슷해.’

이곳은 대악마 부에르가 다스리고 있다는 땅. 헬란 영지.

마기가 느껴지지만, 이만하면 일반인도 지낼 수 있을 수준은 되었다.

오히려 부에르가 만들어 낸 검은 구름보다 마기의 밀도가 낮았다.

내가 주변을 관조하고 있자, 클리프가 수백의 마족을 분쇄하며 다가왔다.

“루카! 여기가 네가 말했던 곳이 맞아?”

지금 처음 와 봤거든?

나는 신의 계시로 마계의 상황을 알아냈다며, 작전 계획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렇기에 클리프의 물음을 그냥 넘겨 버릴 수는 없었다.

“응, 맞아. 일단 내려가서 주변 일대를 싹 정리해야 할 것 같아.”

게이트에서는 지금도 꾸역꾸역 선봉대가 넘어오고 있다.

아군에게 압사당하지 않으려면, 가능한 적들을 죽여 길을 터 줘야 했다.

내 말을 알아들은 클리프는 적의 진형으로 몸을 날렸다.

‘스칼렛이나, 기사단장은 열심히 싸우고 있고.’

우리의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연방에서 인류가 당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마족들이 혼비백산이 되어 후퇴를 거듭했다.

제대로 진형이 짜이지 않은 마족군은 금세 궤멸하였다.

악마는커녕, 요새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고위 마족 하나가 전부였다.

“나도 계획대로 움직여야겠지.”

고오오오.

내 몸속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다른 기운들을 겉에서 둘러싸고 있던 그림자 연공의 오러.

그 은밀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밀려났고, 그 자리에 거칠고 흉포한 기운이 자리 잡았다.

마기.

이 세상에 가장 어울리는 기운이 몸에서 흘러나왔다.

눈에서는 검은색 아지랑이가 일렁였고, 시선의 끝은 요새 내부에 있는 고위 마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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