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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로 살아남기-104화 (104/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04화>

104. 검귀의 50가지 그림자 (1)

나의 어머니는 항구에서 일하는 술집 여급이었다.

역겨운 생선 썩은 내. 술 취한 선원. 언제나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어머니라는 여자.

유년기에 각인된 기억은 그것이 전부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내가 마음을 먹고 숨으면 그 누구도 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내 세상은 어두워.’

나는 홀로 술집 한구석에 쭈그려 앉아 그리 생각하곤 했다.

늘 똑같은 삶에도 변화는 일어났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어머니가 손님을 데려온 날이었다.

하하, 호호.

조용하고 어두운 여관방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처럼 침대 밑에 숨어서, 불편하고 어색한 일들이 멈추기를 기다리며 잠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소리와 움직임이 너무 빨리 멈춘 것이었다.

나는 침대 밑에서 나와 위를 확인했고, 싸늘하게 변한 무언가를 보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어도 생각보다 적응은 빨랐다.

나는 어두운 곳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들의 행동과 말을 유심히 살폈다.

누가 뭐를 어디에 숨겼다더라.

누가 도박판에서 얼마를 땄다더라.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주기적으로 받는다더라.

나는 정보를 토대로 움직였고 혼자서 각박한 세상을 견뎌냈다.

그러면서 차츰 목표가 생겼다. 나는 더욱더 어두워지고 싶었다.

친구가 없어도, 가족이 없어도. 이 공간에 있으면 모두가 충족되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떤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부두를 관리하던 부패한 관리가 어떤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말이다.

그는 검을 차고 어두운 옷을 입고 있었다.

‘요새 자주 보였던 사람이야.’

나는 그 괴한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최근에 항구의 그림자 속에서 사람들을 자주 지켜보던 남자였다.

나는 의구심을 품고서 그를 향해 달렸다.

겁이 나지는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하면 이 어두운 세상과 친해질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아저씨! 아저씨!”

칼날, 그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내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주르륵 흘렀다. 만약 내가 검을 보고 멈추지 않았다면 몸이 갈라졌을지도 몰랐다.

남자는 내 행동에 놀라며 물었다.

“내 검을…… 너는 어떻게 나를 보았지?”

나는 내가 숨어 있던 곳을 가리키며 소상하게 설명했다.

아저씨처럼 어두운 공간에 숨어 모두 보았노라고. 어떻게 하면 그토록 어두워질 수 있느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이며 묻자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는 대단히 특별한 아이로구나.”

그림자.

아저씨는 본인을 그렇게 소개했다.

그는 많은 말을 해 주었다. 내 상처를 치유하고 본인들의 이야기도 기꺼이 말해 줬다.

너도 그림자가 되어 볼 생각이 있느냐?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질어질하네.

나, 김만득은 검귀의 정신 속으로 들어온 직후에 격한 두통을 겪었다.

이 미친놈은 도대체 무슨 삶을 살아온 거지?

‘루카는 진짜 아무것도 아니네.’

내 밑바닥에 가라앉은 정체성도 그 생각에 동의할 정도였다.

그만큼 검귀의 어린 시절은 처참했다.

뭐, 그 사람의 과거가 어쨌든. 지금의 나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죽은 사람 걱정을 왜 하겠는가?

다른 이의 경험을 넘겨받는 것.

그건 상당히 고단한 일이었다.

이미 한 차례 루카의 정체성과 합쳐지며 비슷한 경험을 했어도 절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번에는 상대와의 몰입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일단 다른 기억은 전부 넘겨야겠어.’

실제로 내가 그 사람이 된 것처럼, 혹은 모니터 너머의 영상을 보는 것처럼.

나는 필요에 따라 검귀에게서 내 자아를 분리하거나 결합했다.

유년기를 넘어서 결사단에 들어간 이후.

나는 검귀의 수련을 지켜보며 그가 겪은 깨달음을 몸소 느꼈다.

확실히 그는 천재였다. 잠행술이나 연공법을 포함해 검술에 이르기까지.

검귀가 손대는 무술의 비전이 서서히 그의 것이 되었다.

결사단의 역사에 있어서 유례가 없는 천재. 그는 열심히 그림자가 되는 계단을 밟았다.

정식으로 그림자가 되어 단주의 양아들이 되고.

신성 제국에서 결사단의 뒤를 캐는 성기사들을 처단하고.

여러 공국과 왕국들에서 결사단의 영향력을 키우고.

수없이 많은 적을 물리치며 검귀는 성장했다.

장로가 되고 3번째 벽을 넘겼으며, 예순에 가까운 나이에 그는 4번째 벽을 두드렸다.

최강자의 반열에 오른 검귀가 단주 자리에 오르는 순간.

그는 여태껏 모든 결사단주의 꿈이었던 한 가지 염원을 천명했다.

“우리의 이상이 실현되려면 한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라곤 제국, 그들이 우리의 다음 목표다.”

검귀의 말에 결사단의 장로들이 바삐 움직였다.

전 지역에 뿌리내린 그림자가 아라곤 제국으로 달려들었고, 검귀도 제국으로 어두운 칼날을 들이밀었다.

나는 이제 끝이 왔음을 느꼈다.

‘검술과 연공법. 여태까지의 기억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야.’

나는 검귀가 살아 숨 쉬는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불필요한 기억은 뛰어넘기고, 그의 무술적 성취를 담아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나의 검술은 그것만으로도 눈부시게 성장했다.

나는 다시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곳에서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아니, 며칠 혹은 몇 달이 지났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건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검의 끝에 다다른 두 인물의 결투, 나도 모르게 그걸 볼 생각에 조금 들떠버린 것이었다.

이윽고 내가 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왔다.

“요사스러운 기운이로다.”

폰허부의 목소리.

나는 검귀에게 최대한 몰입하여 생생한 과거의 현장에 섰다.

검귀는 정면을 막아선 거구의 남자를 보았다.

그의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그림자의 피와 살점이 떨어져 있었다.

“그대의 검은 내 열정과 끈기를 뛰어넘을 수 있는가? 그림자의 주인이여.”

스릉.

검성이 든 광휘의 심판이 음산한 달빛을 뿌리치고 더욱 날카롭게 번들거렸다.

검귀는 아무런 말도 없이 흑도를 뽑았다.

많은 대화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검귀는 달빛에 숨어 아라곤 제국을 침략했고 태양과 가까운 남자에게 걸렸으니.

“말은 필요 없다 이건가? 좋다!”

산, 강, 평야. 숲, 사막.

그 모든 것이 검성의 말이 끝난 직후로 뒤엎어졌다.

숲은 평야가 되었고, 강에서 산이 솟아났다.

평야에서 지하수가 흘러나와 강줄기가 만들어졌고, 그 주위가 거대한 열에 의해 사막으로 변했다.

절대자에 가까워진 자들의 싸움.

검성과 검귀는 그 혈투 속에서 거듭 성장했다.

서로의 한계가 어디냐며 따지듯, 며칠을 먹지도 쉬지도 않으며 검을 주고받았다.

여태까지의 내용은 게임에서 보았던 검성의 기억과 같았다.

촤앙!

검귀가 들고 있던 흑도가 부서졌다.

그는 검성에게 패배했고, 피를 흘리며 간신히 서 있었다.

이제 마지막 수를 주고받으면 끝이야. 나는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그대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것인가.”

문득 검귀가 입을 열었다.

폰허부의 기억에서 검귀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개입해서 바꾼 현재의 일도 아니고, 그 이전의 과거가 게임에서와 다르다니.

이놈들은 도대체 시뮬레이션을 어떻게 만든 거야. 나는 짜증을 내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무엇이 말인가.”

검성은 호흡을 안정시키며 물었다.

검귀가 그렇듯 검성 또한 한계치에 다다른 상황.

검귀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오히려 더욱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를 지켜보는 자가 있다. 아니, 나를 지켜보는 자가 있다. 그는 나의 안에 있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나의 머릿속에, 정확히는 검귀의 머리에 어떤 동작이 떠올랐다.

1번부터 8번까지. 나는 이미 [검귀식: 그림자 검술]의 모든 기술을 보았다.

‘근데 지금 떠오른 이 움직임은 뭐지?’

나는 당황한 채로 검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강아지남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열람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그래서는 제대로 깨달음을 가져오지 못하니, 차원에 남겨진 검귀의 정보를 그대로 재현한 것에 가까웠다.

혹시?

이 검귀는 나의 존재를 알아챈 걸까.

나는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검귀는 되고, 나는 안 되는 벽. 그것이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검귀와 검성은 최후를 직감하며 각자 검을 들었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만.”

스릉.

광휘의 심판이 검귀를 향해 겨누어졌다.

검귀도 칼자루를 들기는 했다. 다만 반쪽짜리 검의 목표는 검성이 아니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검귀는 무엇을 보았다.

“너를 배면. 나는 완전한 그림자가 되는가?”

완전무결한 어둠 속으로.

서늘한 검귀의 말은 어째선지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베어주마, 검귀와 검성이 동시에 움직였다.

- 위험해욧!

순간 세상이 암전되었다.

내 귓가를 후벼 파면서 들어온 토끼녀의 음성이 깊은 관계가 있으리라.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언가 아쉽다는 감정이 스멀스멀 일어났다.

“작은 오류가 있었습니다.”

체스판의 세계로 돌아온 나에게 강아지남이 말했다.

나는 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검귀의 일생을 살피느라 내 몸의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탓이었다.

다행히도 증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금방 다리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어지럽네.”

“다른 이의 몸에서 오랫동안 있었으니까요. 상태는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

“내가 얼마나 있었는데?”

토끼녀는 강아지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런 일은 짬 처리하지 말고 스스로 좀 해 보라고.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를 보고 있으니, 강아지남은 묵묵히 날짜를 계산해서 알려 주었다.

“3년 하고도 9개월입니다. 김만득 씨의 수준을 고려하면, 그 이하로 시간을 단축하는 건 힘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괜찮아.”

나는 수면 마취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시간은 딱 예측한 만큼 지나갔고, 내가 얻은 깨달음은 상당했다.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느낌. 육체는 내가 기억으로 들어가기 전과 똑같았다.

그러나 검술과 연공법에 대한 이해도는 검귀의 것과 필적했다.

‘그보다, 이놈들의 태도가 수상한데.’

검귀가 마지막에 펼친 검술.

그것은 그림자 검술에도 속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기술이었다.

검귀는 나를 베려고 했다. 육체와 단절되고 감시자들의 보호를 받고 있던 나를 베겠다니.

원래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목표는 완수했으니까, 나를 판게아로 돌려보내 줘.”

일단 이 일은 덮자.

내가 본 검귀의 마지막 검술은 지금의 내가 사용할 수 없다.

검귀의 경험을 토대로 많은 부분이 성장했으나 아직은 정면으로 부딪칠 입장은 안 되니까.

“네, 그렇게 해 드릴게요! 강아지, 준비됐어?”

“물론이죠. 판게아로 가는 포탈을 바로 열어 드리겠습니다. 그전에 마계의 상황을 조금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마계에 대한 정보라.

이건 확실히 들어볼 만하겠는데.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강아지남의 말을 들어보았다.

“말해 봐.”

“지금의 마계에는 대악마들이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판게아와 통하는 게이트는 부에르의 영토와 이어져…….”

강아지남의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넣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3년 9개월. 나에게는 고작 며칠 정도의 느낌이었으나 제법 긴 시간이 지나갔다.

당초에 목표로 했던 검술과 연공법은 물론이고, 나는 마지막에 또 다른 무언가도 얻었다.

내가 본 검술이 어떤 능력을 갖췄는지는 몰라도.

‘이건 놈들의 안배가 아니야.’

강아지남은 차원의 흔적을 토대로 검귀의 인생을 재현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검귀는 자유 의지를 갖추고 움직였다는 뜻.

4번째 벽에 가까워진 존재라면, 초월자의 힘을 알아챘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어찌 됐든 지금은 시간이 필요해.’

나는 두 초월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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