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00화 (100/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00화>

100. 컨트롤러 (5)

바다가 불타올랐다.

마족의 함대는 대부분 함선을 잃고 본거지로 패주했고, 우리는 전투의 승리를 본국에 알리며 그대로 항진했다.

마족의 함대는 첫 전투를 마지막으로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비관론자는 어디서 함정을 파고 기다릴 것이라 말했고, 낙관론자는 마족에게는 함대가 남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했다.

결국, 진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마족군의 함대는 모두 궤멸했다.

그 사실은 우리가 암흑대륙의 항구에 도착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적의 함대는 장착된 흑마법진을 이용해 포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항구에 정박한 함선은 소수. 우리의 함대는 우월한 물량을 바탕으로 3일 밤낮 동안 포탄을 항구에 쏟아 넣었다.

“거의 평지가 다 됐군. 남아 있는 적은 있나?”

프레스턴은 처음으로 적의 항구에 상륙하며 말했다.

그 뒤로 나와 클리프, 펠리스가 암흑대륙에 발을 들이밀었다.

정령사 시리엘은 주변의 기운을 감지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주변에서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아요.”

“살아남은 놈들은 전부 남쪽으로 도망가고 있다!”

고양이 수인 베리도 [천리안]을 통해 주변 상황을 감시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기적적으로 사상자는 없었다.

이상한 생선을 잡아먹다가 식중독에 걸린 부상병을 제외하면 말이다.

“휴, 이제 다들 상태가 괜찮은가 봐.”

사고 친 병사들을 치유하고 뒤늦게 상륙한 스칼렛이 이마에 묻은 땀을 훔쳤다.

사방에는 여러 교단의 사제들이 배에서 내리며 땅에 축복을 내렸다.

아무래도 일반인이 활동화기에는 마기 수치가 조금 높은 탓이었다.

“괜찮기는. 본국으로 돌아가면 싹 다 군법 재판으로 넘어갈 텐데.”

“그래도 목숨은 살렸잖아?”

“혹시 모르지.”

판게아의 군법이 지구의 것보다 물렁물렁할 리는 없으니.

나는 스스로 일반인의 한계를 실험한 식중독 병사들에게 잠시 묵념을 했다.

제발 나가 죽어라, 이 폐급 새끼들아.

“그보다, 너무 쉽게 상륙했군. 여기서 버티면 피해가 더 커지지 않겠나?”

“대악마가 있지 않은 한 힘들 겁니다.”

“있으면 좋다.”

나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펠리스의 말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암흑대륙은 크기가 좀 작습니다. 사실 대륙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죠.”

대륙이라는 이미지와는 반대로.

암흑대륙의 크기는 대한민국의 절반에 불과하다.

게다가 마족들이 살기 좋게 만들겠다며, 지형은 전부 평지로 만들었다.

지금만 보아도 항구 너머는 전부 광활한 벌판이었다.

“확실히 방어적으로 쓰일 구석은 없군.”

“애초에, 자기들이 수비자의 입장이 될 줄은 몰랐겠죠.”

곳곳에서는 신성력이 터지며 주변 지형이 정화되었다.

수송함에 타고 있던 군대는 점차 항구 안으로 밀려 들어왔고, 마족의 향취는 점차 연해졌다.

오히려 나는 상륙하기 전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족이 부에르의 트롤로 많이 줄어들긴 했나 보지?’

잘된 일이었다

무사히 판게아의 전 지역을 되찾는다면, 앞으로 있을 마족과의 전쟁에서도 한결 수월할 것이다.

다만 마족놈들이 이렇게 쉽게 물러난다는 건 믿기지 않았다.

“일단 주변에 적들은 없으니, 이곳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도록 하지.”

“예, 수고하세요.”

프레스턴은 자유 무역 연합의 지휘관 자격으로 원정군에 소속되었다.

다른 국가의 군대도 저마다 지휘소를 만들고, 혹시 모를 마족의 반격에 대비하는 모양새였다.

정확한 소속이 없는 사람은 나와 클리프뿐.

스칼렛도 나름대로 록펠스 부대의 군의관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스칼렛은 숙영지 건설을 도와줘. 밥 먹고 푹 쉬려면 숙영지는 필수니까.”

“엄청 중요하잖아. 후딱 도와주고 올게!”

단번에 숙영지의 중요성을 깨달은 스칼렛이 떠났다.

이제 쩌리들은 할 것이 없다.

클리프는 마계와 연결되어 있을 게이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조금 더 전진해서 적이 있나 살펴볼까?”

생체 레이더인 두 아인종은 국밥이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확실히 텐트 치고 땅에 못질하는 건 나도 싫으니까.

우리는 항구를 벗어나 적진으로 들어가 보았다.

일반적인 마족들은 움막에서 살았고, 곳곳에 벽돌로 건축된 성의 모습이 보였다.

“병력을 한곳에 모으려는 모양인가 봐요.”

시리엘은 물자도, 마족도, 생활의 흔적도 사라진 주거지를 살피며 말을 흘렸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정확한 사실은 시간이 흘러봐야 알겠지만, 마족이 꽁무니를 말고 도망가는 모습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진군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 * *

포성이 울리고 지면이 들썩였다.

후방에서 쏘아대는 포격, 마족의 요새에 설치된 방어막은 대동맹군의 포탄을 버티지 못했다.

쿠구구. 이윽고 마기로 이루어진 방어막이 무너졌다.

뿌우우!

돌격을 알리는 나팔 소리.

단호한 목소리로 내린 명령에 신성 제국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좌우로는 무역 연합의 군인들과 연방의 군인들이 뒤따랐다.

뒤에서는 한자 동맹의 포격 부대와 시타델의 마법 병단이 마법과 포탄을 날려대며 돌격을 지원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암흑대륙의 내부로 들어오고 한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각 국가의 군대 간에 협동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반복하다 보니 차츰 합이 맞기 시작했다.

“루카, 저기에 악마가 있는 거 같은데. 이번에는 안 가?”

“클리프랑 단주님이 가잖아.”

스칼렛의 물음에 나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을 했다.

따로 순번을 정해둔 것은 아니었으나 전투가 일어나면 저 둘이 항상 선봉에 서곤 했다.

클리프는 폰허부의 성향을 닮아가는 중이었고, 펠리스야 딱히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 저 게이트가 더 신경 쓰인다고.’

나는 안에서 올라오는 짜증과 긴장감을 느꼈다.

어느덧 암흑대륙의 마지막 요새.

모두의 불안한 예감과는 별개로 여태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대악마가 강림한다거나, 마계에서 증원군이 넘어오는 일은 없었다.

‘악마가 있다고 해도, 무턱대고 달려들면 안 되지.’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요새 너머에 있는 거대한 차원의 구멍이 있으니까.

최후의 요새 뒤편으로는 마족이 판게아로 넘어오는 데에 쓰이는 게이트가 보였다.

200년 전에 무너진 차원벽.

지구인은 저 게이트를 콜롬버스 게이트라 불렀다.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듯이, 판게아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 준 의미에서 지어줬다나.

아무튼, 그거야 침략자들의 생각에서 나온 생각이고.

“파멸의 구멍이군.”

찰스 랭커셔는 지식을 자랑하려는 것처럼 은근슬쩍 우리 곁으로 왔다.

판게아의 주민들은 보통 저 게이트를 파멸의 구멍이라고 불렀다.

200년 전에 저 구멍이 출현한 이후부터, 이곳의 사람들은 꾸준히 상처를 받고 고통을 견뎌야 했으니.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선수를 쳤다.

“마법에는 걸리는 게 없습니까?”

“없네.”

시계탑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타델은 이례적으로 모든 대마법사가 총출동했다.

찰스 랭커셔가 여기로 왔다는 이야기는, 여왕이 전선을 걱정한다는 의미였다.

“내 눈으로 저것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단답식으로 내 질문에 대답한 시계탑주는 뭐라고 꿍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게임에서 봐서 전부 아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보니 마음은 더욱 심란하지만.

‘원래라면 암흑대륙을 탈환하면서 게임이 끝나니까.’

세계수의 당부. 감시자들의 존재.

나는 그 두 가지를 머리에 넣고서 열심히 굴렸다.

그러다가 요새 너머에 있는 게이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서둘러 무장을 점검했다.

“저도 전선으로 가겠습니다.”

“응? 분명 혹시 모르니 전력을 남겨둬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알겠네. 자네가 나서주면 병사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을 테니.”

점검을 마치고 전선으로 향하니, 스칼렛이 나를 따라서 달려왔다.

하지만 들것에 실린 채로 뛰어오는 부상병들을 보며 주저했다.

“괜찮아. 지금은 옛날과 다르니까.”

“응, 그렇구나. 그래도 조심해.”

적발의 여인은 내 말의 뜻을 알아차리고 부상병들이 있는 야전 병원으로 달려갔다.

나는 곧바로 오러를 몸에 두르고 전쟁터를 가로질렀다.

요새에서 날아오는 포격 마법을 무명을 뽑아 쳐내고, 클리프와 펠리스가 뛰어든 요새 내부로 단숨에 난입했다.

적들은 내 존재를 감지하지도 못하도록, 그토록 빠르게 적의 수장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저 녀석들이 모올 님을!”

“막아라, 저 둘을 막아!”

정면에 두 고위마족이 보였다.

그 둘은 주변에 있던 트롤과 흑마법사들에게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손가락의 끝에는 두 검사에게 매타작을 당하고 있는 악마가 보였다.

양팔에 착용한 두 개의 방패. 단단하게 굳어 있는 육신.

인내의 악마라는 별명처럼 아직 모올의 몸은 조금의 상처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림자 검술 5번, [암적뢰]

파직, 나는 몸에 가속을 붙이며 그 장소로 날아갔다.

앞을 막아서고 있던 두 고위 마족은 뒤늦게 가슴이 뚫리며 육신이 허물어졌다.

“뭐야? 가자고 할 때는 싫다더니만.”

“칫, 잘 망가지지 않아서 좋았거늘.”

내 기운을 감지한 두 검사가 저마다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둘에게 대꾸하지 않고 모올을 몰아붙였다.

내 신형이 늘어지면서 칼날이 상대의 몸을 연달아 내리쳤다.

깡, 까가가가강!

도저히 살을 베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단단한 쇳덩어리, 재생력이 좋은 로자리아와 다르게 모올은 애초에 신체가 너무 단단했다.

그러나 절대적이지는 않다.

그림자 검술 3번, [달빛 베기]

칼날이 수십 개로 늘어나며 일시에 같은 곳을 베었다.

붉은색 액체가 흘러나오며 상대는 뒤로 자빠졌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상대의 모습을 보았고, 동시에 내 손바닥에서도 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펠리스는 나에게 다가와 강제로 내 손을 펼쳐 보았다.

손바닥이 찢어져 손잡이가 더욱 빨갛게 물들었다.

“금방 나을 겁니다.”

“안다. 그렇다 해도 혼자 상대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누구에게?”

나는 입으로 대답하지 않고 바닥에서 일어나는 악마를 가리켰다.

뚜벅, 뚜벅. 내가 신은 부츠에 요새의 돌바닥이 닿으며 이런 소리가 났다.

“어째서, 어째서 너희는 증원군이 오지 않는 거지?”

“너희가 알 필요 없다. 인간.”

모올의 신체가 회복되더니 외부에 딱딱한 장갑이 다시 자라났다.

그는 거대한 방패를 내밀었고, 나는 [환영 활보]를 펼치며 뛰어들었다.

지잉! 모올은 두 방패를 부딪치며 강력한 진동을 만들어 냈다.

“커헉.”

내장이 뭉개지며 핏물이 울컥 올라왔다.

뒤에서 펠리스의 고함이 들렸으나 나는 혈마력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상대의 품에 안겼다.

“네놈, 무슨!”

팔로 상대의 목을 밀치고 정강이를 걷어찼다.

상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인 덕분에 상대의 반응은 느렸다.

그렇게 모올을 압박하며 요새의 벽을 부수고 게이트로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짓이냐!”

방패가 흉기가 되어 안면을 후려갈겼다.

목이 돌아가고 이빨이 튕겨 나갔어도 금세 상처가 회복되었다.

나는 육탄 돌격으로 상대를 밀어붙였다.

고오오오.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웬만한 언덕만큼 거대한 몸집의 게이트가 내는 소리였다.

나는 게이트를 가리키며 여기까지 끌려온 모올에게 물었다.

“어째서 게이트가 이 모양이지?”

“알 필요 없다.”

“아니, 반대겠지. 너도 모르는 거야. 어째서 게이트가 작동하지 않는지를.”

내 말에 상대는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 미세하지만 이 게이트는 내가 보던 것과 다르다.

단순히 모니터 너머에서 보았던 것과 다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한 형태를 안 봤다면 몰라도, 여태껏 수없이 게이트를 본 입장에서는 확연하게 차이가 느껴졌다.

나는 의도하지 않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게이트의 상태가 이상해. 마치 멈춰서 식어버린 용암처럼.”

모올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혼잣말을 듣고서 정곡을 찔린 것이었다.

그 순간, 아주 작고 조용하게 과거에 들어보았던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의 선물은 마음에 드시나요? 김만득 씨.”

소리가 전해진 방향은 게이트의 안쪽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