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97화>
97. 컨트롤러 (2)
클리프는 좋은 상대였다.
나를 위협할 기술을 가졌으면서, 나보다 몇 보는 느렸다.
따라서 안정적으로 대련을 펼치며 텔런트의 등급을 올릴 수 있었다.
“후우, 후우.”
거친 숨소리가 상대에게 들렸다.
은색 머리카락은 땀에 절어서 바닥에 붙어 버렸다.
거의 2시간 동안 격전을 벌였으니, 오러도 바닥나고 여러모로 힘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괴물 같은 놈.”
클리프가 나를 째려보며 칭찬을 해 줬다.
나와 녀석은 연방의 일을 처리하며 수없이 대련했고, 모든 결투에서 승리자는 항상 나였다.
사실, 당연한 결과이기는 하다.
‘나는 클리프와 동급의 오러에, 신성력과 마기도 가지고 있으니까.’
특히 마기의 경우는 이미 웬만한 악마의 수준을 넘어 버렸다.
보통 대악마나 폰허부급의 강자가 되려면 능력치가 3000점을 넘어야 한다.
그런데 내 마기의 양이 2500점 정도이니.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냐?”
“이건 사기야, 사기! 정정당당하게 오러만 사용해야지.”
어떻게 한번을 못 이기냐.
클리프는 씩씩거리며 일어서더니, 이오시프그라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게?”
“이제 곧 자유 연합으로 돌아간다며. 나도 채비는 해야지.”
“그래, 나도 좀 있다가 갈게.”
클리프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약 2달, 나는 클리프와 종일 검을 섞으며 꾸준히 텔런트의 숙련도를 올렸다.
그 결과로 A등급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
?? 완료: (오러(마나)/마기/신성력)
?? 미완료:(?/?)
> 진행도 효과: 은폐(전설), 파괴력 증가(전설), 저항(영웅)
> 잔여 ??: 1
---------
준비는 모두 끝났다.
세계수는 분명 초월자의 힘인 ‘근원’을 주겠다고 했지만, 아직 나에게는 그걸 받을 힘이 없었다.
오러나 다른 기운을 3000점 이상 올려서 그릇을 만들어야 할 터.
‘이제는 다른 기운으로도 검술을 펼칠 수 있으니까.’
[??] 스킬이 A등급을 달성하면서 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오러를 조금만 사용해도 검술을 펼칠 수 있게 된 것.
물론, 순수한 오러만을 사용했을 때보다는 검술의 위력이 일정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일단 남아 있는 혈마력부터.”
나는 압축 주머니에서 저번에 흡수하지 못했던 혈정을 꺼냈다.
몽글몽글하게 모여 있는 붉은 물체, 뚜껑을 열고 손바닥에 혈정을 올리니 스르륵 자취를 감추었다.
혈관을 따라 돌아가는 혈액의 속도가 갑자기 더욱 빨라졌다.
팔을 비롯한 신체 곳곳이 꿀렁거리며 묘한 느낌을 주었고, 일련의 변화가 끝나자 상태창이 반응했다.
[텔런트: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의 진행률이 상승합니다. 혈마력+267]
[특성: [밤의 귀족]이(가) 개방되었습니다.]
[[밤의 귀족]의 효과로 혈마력의 효율이 10% 상승합니다. 혈마력을 소모하여 부상을 치유하며, 혈마력을 외부로 응집할 수 있습니다.]
걸어 다니는 회복 포션.
나는 흑도를 들어 손에 깊은 상처를 냈다.
고통과 함께 손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상황이 나빠지지는 않았다. 베인 상처는 금방 아물었으니까.
‘됐어.’
이제는 진짜 잘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
나는 뿌듯함을 느끼며 텔런트에 새로 추가된 부분을 살폈다.
진행도가 올라가며 혈마력에 관한 새로운 효과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 진행도 효과: 은폐(전설), 파괴력 증가(전설), 저항(영웅), 갈취(희귀)
갈취라.
사전적인 의미로는 억지로 빼앗는다는 의미일 텐데.
정확한 능력은 사용을 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상태창을 닫고 건물의 수리가 얼추 끝난 도시를 향해 걸었다.
‘여기도 슬슬 사람 사는 느낌이 나기 시작하네.’
폐허 같던 건물들에서 제법 생동감이 느껴졌다.
당연히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증발했고, 산업 기반이 대부분 파괴되었기에 재기하려면 수십 년은 걸리겠지만.
그나마 곡창 지대가 연방의 북부에 있어서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니까.’
나는 인사를 전할 겸.
이전부터 미하일에게 주장했던 일의 확답을 받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미하일의 사무실.
나는 어엿한 국무 위원회 안에서도 중책을 맡은 사람을 찾아갔다.
심지어 계급도 한 단계 높아져서, 이제는 상장이 아니라 육군대장이 되었다.
나는 견장에 별이 4개 달린 남자의 앞으로 갔다.
“바빠 보이십니다.”
“보는 바와 같다. 저번에 말했던 일의 결과를 듣기 위함인가?”
미하일은 얼굴을 들지 않은 채 서류에 사인하며 물었다.
연방은 오랜 세월 동안 전란이 끊이질 않은 나라다. 그렇기에 전쟁과 관련된 기술이 굉장히 발달하였다.
특히 오러 연공법과 기동 갑주가 그에 해당한다.
“회의는 해 보았지만, 반발이 컸다.”
“이해는 합니다. 국가의 중요한 기밀을 팔아치우는 행위니까요.”
“그 이상이다. 평의회 연방의 근간이자 역사이지.”
또 값을 올려치려 하네.
연방의 모든 것들은 이번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그나마 농업 시설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국가 자체의 존속이 위험해질 뻔했다.
“어차피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말씀드린 것 이상을 드리기는 힘듭니다.”
“알고 있다. 내가 힘들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이건 무역 연합에 보내는 제안서다.”
상처로 가득한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진짜 개무섭네, 나는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미하일이 건넨 문서를 받아들었다.
제목이나 다른 내용은 넘어가고.
‘좋아, 좋아.’
기동 갑주와 관련된 기술의 공개.
그리고 연방의 파일럿들에게 가르치는 오러 연공법도 공개.
내가 원하는 내용은 전부 들어가 있었다.
뒤에 적힌 내용은 무역 연합에서 물품을 값싸게 공급하라는 내용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이로써 인류의 평화에 한 걸음 더 다가섰네요.”
“그런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의문이 드는군.”
“뭐가 궁금하십니까.”
“연방의 기동 갑주는 최강이다. 그걸 다루기 위한 연공법도 최강이고.”
“다른 건 몰라도 연공법이 최강이라기에는.”
연방의 연공법.
이름부터 웅장한 [혁명 연공]은 영웅 등급이다.
이 연공법은 기동 갑주를 조작하는데 특화되어 있으며, 학습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즉, 재능이 부족한 사람도 쉽게 배울 수 있다.
“큼큼.”
“아! 당연히 최강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위원회를 구워삶았습니까?”
“별 것 없었다.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서, 거수투표로 결정했지.”
“……정말 합리적인 의사 결정 방법이네요.”
미하일은 내가 바라던 대로 국무 위원장이 되지는 않았다.
대신에 다른 선배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위원회의 중책을 맡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왜 저러나 싶었는데.
‘위원장이 되면 전장에 나가지 못하니까.’
뭐, 오히려 잘된 일이다.
앞으로 연방의 군대는 연합군의 최전방에서 활약해야 하니까.
나는 서류를 받고서 평의회 연방을 비롯한 판게아 전 대륙의 지역을 살폈다.
그 아래에는 마계로 향하는 게이트와 암흑대륙도 그려져 있었다.
“연방은 준비가 끝났습니까?”
“최대한 기일에 맞추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지. 솔직히 말하면 이런 상황에서 원정을 떠나는 건 쉽지 않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땅을 빼앗는다면, 연방의 사람들에게도 뜻깊은 일이 되겠죠.”
“반드시 그래야지.”
우리의 다음 목표.
이제 판게아의 각 세력은 마족의 대규모 침략을 인지했다.
그러니 적을 물리친 순간부터, 우리의 목표는 암흑대륙의 완전무결한 탈환이었다.
‘암흑대륙은 마족이 만들어서 탈환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뭔가 탈환이라고 말해야 용기가 나고 그러잖아.
안 그래도 자유 무역 연합을 포함해, 모든 지역에서 특정한 여론이 들불처럼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끈질기게 인류를 괴롭힌 마족의 종말.
그 기회가 코앞에 왔다고 신문사나 국영 매체, 결사단의 첩자들이 끊임없이 입을 놀렸기 때문이다.
빼앗긴 영토를 탈환해?
200년에 가깝도록 이어진 전쟁에 종지부를 찍어?
아, 이건 못 참지.
연락 수정구를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세계 각지에서 암흑대륙으로 군대를 파견하자는 여론이 강해졌다나.
그럼, 이제 나는 위에 놈들이나 구워삶으러 가야지.
“연합에 가서 일을 끝내고 곧 다시 보죠.”
“무운을 빌겠다. 몸 성히 갔다 오도록.”
“몸이 성하길 바라는 건, 이 제안서에 반대할 놈들에게 해 두시고요.”
달칵.
등 뒤에서 사무실의 문이 닫혔다.
미리 정해 둔 공터에 도착하니 핑거톤의 사람들과 스칼렛, 그리고 클리프가 보였다.
베리와 시리엘은 한자 동맹의 연합군을 결성하겠다고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도 이 일이 끝나면 다시 시타델로 돌아가도 되겠나?”
로빈 공작은 마법진의 마무리 작업을 하며 물었다.
신성 제국의 신성회는 아직 연방에 남았고, 시타델과 결사단은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다시 돌아간 뒤였다.
우리 운전사님도 쉬어야 다시 열심히 일하겠지.
“당분간은요. 재충전도 하시고 그동안 수련도 하셔야죠.”
“당분간이라니. 로빈, 당장 도망쳐!”
“처음 물어보는데, 썬데이는 언제 사라집니까?”
“썬데이는 내 유일한 혈육이라네.”
여왕 폐하는요?
나는 그리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거대한 마법진에 올라서자, 익숙한 빛이 터지며 순식간에 공간이 이동되었다.
콜록, 콜록. 주변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스칼렛이 머물고 있던 세컨드 시티의 어느 호텔이었다.
“수고 많았네. 우리는 일단 요새로 돌아갈 건데, 자네는 먼저 어디로 가겠나?”
“데이브 회장님을 만나고 데모크라시 타운으로 가야죠.”
“그렇군. 나도 대표님에게 말해두도록 하겠네.”
“부탁드립니다.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핑거톤의 힘이 필요하니까요.”
“부탁이랄 게 있나? 나와 자네의 목표는 같으니 그럴 필요 없네.”
프레스턴은 부하들을 이끌고 호텔 로비를 빠져나갔다.
주위에서 호텔의 관계자들이 얼이 나간 채로 다가왔지만, 스칼렛이 나서서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지금은 오후 3시니까. 아빠는 본사 건물 안에 있는 임원 회의실에 있을 거야.”
“급한 일이니까, 예의에 어긋나도 이해해 주시겠지?”
“뭔데, 무슨 일인데.”
“응, 그럴 거야!”
클리프는 오랜만이라 우리의 방식을 잘 몰랐다.
우리 셋은 스칼렛의 [순간 이동]을 통해 순식간에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금 회장님께서는…….”
응, 나는 돼.
회장님 딸이 있는데 누가 우리 앞을 막을쏘냐.
우리가 지나가는 길 뒤에는 사과하는 클리프의 목소리만이 처연하게 남았다.
덜컥! 나는 모든 직원을 뿌리치고 임원 회의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회장님!”
“아빠!”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는 에어컨을 종일 트나, 왜 이렇게 싸늘해.
나는 머리와 등에 푹푹 날아와 박히는 차가운 시선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왔다.
데이브는 상석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지금은 임원 회의 중이라네. 나중에…….”
“기업가는 이해득실을 잘 따져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시간이 부족한 분이시니 일단 검토해 보시죠.”
나는 상석까지 다가가서 데이브 회장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평의회 연방에서 제안한 서류.
데이브는 종이를 팔락거리며 내용을 읽어 보더니, 회의실에 앉아 있던 임원진에게 말했다.
“회의는 잠시 중단하지. 다들 나가 있게.”
두 번째 별을 첫 번째로 올려 보낼 구세주.
데이브는 내가 내민 동아줄을 몰라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