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96화>
96. 컨트롤러 (1)
적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살짝 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적이라, 그렇다면 나를 죽이기 위해 이곳으로 부른 건가.
다만 그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세계수의 초대에 응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와 같은 이유로 평정을 되찾았다.
“저를 죽이기 위해서 굳이 몸소 나서실 필요는 없겠죠.”
“생각보다 겁이 많으시네요.”
“겁이 많으니까, 여기까지 온 겁니다.”
세계수는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한 채로 일어섰다.
“설명을 해 드려야겠죠? 그런데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복잡하시다면 제가 묻죠. 저를 데려온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름은 모릅니다. 정체도 모릅니다. 하지만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죠.”
우리는 그걸 아는 게 없다고 말하기로 약속했어요.
나는 여유로워 보이는 상대의 태도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세계수는 본인이 앉아 있던 거대한 나무에서 희한하게 생긴 열매 하나를 땄다.
“그들은 차원의 외부에 있는 자들입니다. 차원 안에서 존재하는 저나 마신과는 다른 자들이죠.”
“외부라면.”
왕실의 보고에서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
역시 그 사람이 나를 여기에 데려왔나. 나의 추측이 맞았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있었다.
“저를 찾아왔던 여자는 마족이 차원에서 격퇴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렇겠죠. 그자들에게 마족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일 테니까요.”
세계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대강 이해가 되었다. 판게아를 두고 3개의 서로 다른 초월자가 싸우고 있다.
대충 구도는 이렇다는 말이지.
“케이크가 하나인데, 포크가 3개인 걸로 이해하면 되겠군요.”
“틀렸습니다. 이 세계는 저희의 것이었습니다. 다른 집의 사람이 포크를 들고 온 걸, 같다고 보면 곤란합니다.”
저희, 그리고 그들.
리버티 교단에도 신은 있고, 판게아 신성회에는 정말 많은 숫자의 신이 있다.
세계수가 말하는 ‘저희’라면 아마 그들이 모시는 신이 분명했다.
반대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자들도 다수라는 의미일 터.
게다가 나는 세계수의 말에서 어떠한 돌파구를 보았다.
“글쎄요. 정작 그 케이크는 포크에 찔릴 생각이 없는걸요.”
“그런 소리 하지 마시죠. 이방인.”
세계수의 음성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상대는 나를 제압할 수 있다. 정신을 조종하든, 무력으로 찍어 누르든.
그런데 내가 이렇게 도발을 해도 세계수는 경고만 줄 뿐.
무언가 능동적으로 나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능력이 없는 건가?’
내가 아는 상식의 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대는 초월자. 기껏해야 마스터급에 도달한 내가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니다.
아직은 조금 더 떠봐야 알겠는걸.
“이방인이라, 틀린 말은 아니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판게아의 주민도 아닙니다. 어째서 당신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까?”
“저는 당신의 목숨을 쥐고 있으니까요.”
“글쎄요.”
안 그런 거 같은데.
나는 살짝 말을 흘리며 실실 웃었다.
여기서 갑자기 전지전능한 힘을 보여 준다면?
그렇게 된다면 싹싹 빌어야지. 어차피 내가 필요하다면 살려는 둘 것이다.
내 태도를 본 세계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판게아를 그자들에게 바친다면, 당신을 무사히 내버려 둘 것 같나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당신은 나의 신이 아닙니다. 굳이 제가 명령에 따를 필요는 없죠.”
“…….”
상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억지로 성질을 긁었지만, 천벌 같은 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세계수는 조심스럽게 팔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으니, 당신의 처지를 정확히 말씀드리죠.
내가 원하는 건 세계수의 하수인이 아니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최소한 무늬만이라도 동업자가 되어야 했다.
다행히 내 도박은 통했고 세계수는 한발 물러섰다.
“말씀하시죠.”
“당신의 텔런트. 우연히 얻은 그 힘이 그자들의 모든 계획을 망쳤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차원 외부에 머무는 자들. 우리는 그자들을 ‘감시자’라고 부릅니다.”
세계수의 설명은 한동안 이어졌다.
차원 내부에서 군림하는 초월자들과 차원 외부에 머무는 감시자들.
세계는 크게 두 종류의 ‘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시자들은 호시탐탐 우리의 자리를 빼앗고 초월자를 대신해서 신의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감시자.
그들은 차원 외부에 있기에 내부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대신에 차원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보며 초월자가 영향력을 잃는 순간에 치고 들어온다.
모두 차원의 바깥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차원 대전쟁도 감시자들의 짓이라는 이야기군요.”
“네, 지구와 판게아의 악연도, 마족의 침략도 모두 그들이 외부에서 차원을 충돌시켜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세계수는 연거푸 감시자들이 진정한 악의 축이라고 주장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최소한 초월자들에게는 악명이 높은 것처럼 보이네.
나는 적당히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생각했다.
‘여기서 믿을 만한 정보가 뭘까.’
나는 감시자를 향한 세계수의 악담을 들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판게아의 초월자들, 마신, 감시자. 이렇게 셋이 판게아를 노리고 있다.
거기에 세계수는 위기에 처해 있고, 나를 여기로 데려온 자들은 감시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 나쁜 놈들이 판게아의 다른 신을 모조리 죽였다니까요? 이게 정말 무슨 일인지! 이제는 판게아에 저 말고 다른 초월자는…….”
“전부 죽였다고요? 저는 그러면 강한 쪽에 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를 했다.
초월자여 평안히 잠들기를. 이런 예의를 갖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출구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세계수는 황급히 내 앞을 막아섰다.
“당연히! 당연하게도 승산은 이쪽이 높죠. 이곳은 제가 태어나고 자란 차원이니까요.”
“다른 초월자들은 전부 쓱싹 당했다면서요?”
내가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세계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야, 방심하고 있었으니 그렇죠. 이제는 쉽게 안 당합니다. 게다가 당신도 있잖아요?”
내 몸값이 그 정도라는 말이지?
예측한 것보다 나는 꽤 높은 가치를 인정받은 듯 보였다.
“저를 높게 평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지만. 그놈들이 바보도 아니고, 저에게 아무런 장치도 없이 이곳에 데려오지는 않았을 텐데요.”
“물론이죠. 원래라면 당신의 영혼에 일종의 송신기와 디코이를 붙여서 감시했을 거예요.”
“다른 초월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말인가요?”
“맞아요.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죠. 당신과 루카의 영혼이 섞여 버렸으니까요.”
나의 정체성은 루카와 섞였다.
그 과정에서 감시자들이 나에게 심어 놨던 감시 체계가 무너졌다는 말이었다.
송신기와 디코이가 무용지물이 됐다면, 세계수가 나에게 접근한 것도 이해되었다.
“지금의 당신은 어떤 초월자도 쉽게 소유할 수 없을 겁니다. 아주 복잡한 상태거든요.”
“원래 저를 여기로 데려왔던 자도 말입니까?”
“예, 루카의 영혼이 섞이며 미묘하게 이곳의 차원과 결속되어 버렸거든요. 그래서 저에게 기회가 온 것이기도 하고요.”
뭐, 나에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여태까지는 강제적으로 누군가를 위해 일한 것이라면. 이제는 프리랜서가 되어 몸값을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이니.
“여러 정보를 알려 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이대로 있고 싶습니다.”
나는 세계수의 품에 안기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과연 상대가 순순히 따라 줄지, 아니면 강제로라도 나를 본인의 수하로 삼을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우선 이렇게 이야기라도 해 봤으니 됐습니다.”
“생각보다 쉽게 놓아 주시는군요.”
“당신의 의중을 알았으니 됐습니다. 그보다 한 가지. 당신의 구미가 당길 이야기를 해 드리죠.”
정말로 본인 마음대로 나를 조종할 수는 없는 건가?
상대는 일단은 넘어가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그러고는 본인이 들고 있던 열매를 보여 주며 말했다.
“당신은 판게아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그래 보이긴 합니다.”
“그럼, 마지막 하나가 무엇인지는 아시나요?”
마나, 혈마력, 신성력, 마기.
이 4개는 내가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는 게임에서 전혀 보지 못했다.
“아마 모르실 줄 알았습니다. 필멸자에게는 알려지지도 않았거든요. 그건 ‘근원’입니다.”
“근원이요?”
“네, 모든 초월자들의 근간이 되는 힘이죠. 차원의 힘을 온전히 다루는 힘이기도 하고요.”
차원의 힘을 다룬다니, 근원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해 보였다.
만약 그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많은 일이 가능해 보였다.
내 생존에도 훨씬 유리할 테고.
“제안하겠습니다. 만약 저와 손을 잡으신다면 판게아에 존재하는 근원의 일부를 드리죠.”
“이미 감시자들에게 많은 초월자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제가 그들이 근원을 취하는 걸 막았으니까요. 만약 그들이 근원까지 차지했다면, 이런 복잡한 방식을 쓰지도 않았을 겁니다.”
세계수는 갑자기 손뼉을 쳤다.
짝,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내 뒤쪽에는 못 보던 포탈이 열려 있었다.
나는 출구를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근원을 지금 받아 볼 수는 없습니까?”
“당신은 아직 그릇을 준비하지 못했거든요. 검성과 비슷한 급은 되어야 힘을 견뎌 낼 수 있어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는 말이군요.”
세계수는 내 말에 수긍하며 말을 받았다.
“그래요. 아!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에게 접촉할 겁니다. 부디 현명하게 행동하세요.”
“만나지 말라는 말은 안 하시는군요?”
“적을 알아야 대비를 하겠죠. 저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당신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못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보죠. 그리고 근원들은 잘 가지고 있으세요. 나중에 저에게 줄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대화를 마쳤다.
* * *
다시 돌아왔다.
나는 유리엘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1초, 2초.
우리 근처에 서 있던 클리프도, 땅 위를 기어가던 이름 모를 벌레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아.’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이 현상의 이유를 알아냈다.
세계수는 시간을 정지하고 나와 대화한 것이었다.
좀 더 기다리자, 유리엘의 손바닥이 이전처럼 매끄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화는 잘되셨습니까?”
유리엘은 희미하게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일단은요.”
“어? 내가 왜 여기에 있지.”
클리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봤다.
기억을 잃은 건가. 하긴 세계수의 적에게 이 사실을 숨기려면 이러는 게 편하겠지.
유리엘도 세계수로부터 무언가 지시를 받았는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저는 용무가 끝났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친우끼리 회포를 푸시는 데에 방해가 될 테니까요.”
굳이 가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 멀리 날아가 버렸다.
“갑자기 가 버리셨네. 맞다! 네가 말한 그 왕실의 보고 말이야. 날 죽이려고 환장했어?”
“잘 살아남았으면 된 거지.”
어쩐지 그냥 넘어가나 했다.
나는 역정을 내는 클리프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게다가 스승님의 검도 이렇게 얻었잖아?”
“그래서 다행이지. 다음부터 이렇게 속여만 봐.”
하하, 국밥이 주제에.
나와 클리프는 투덕거리며 오랜만에 둘이서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 수련하느라 죽을 뻔했느니, 본인의 스승이 얼마나 괴상한지와 같은 푸념이었다.
“후우, 알겠어요. 그만, 그만!”
대화하던 클리프는 스승님과 이야기하더니 나를 보았다.
“아무래도 한판 붙어야겠지 싶은데. 스승님께서 저번의 수모를 갚으래.”
“호오, 자신은 있고?”
“물론이지. 이제 대악마도 쓰러트려서 할 일도 없잖아.”
“글쎄.”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흑도를 뽑았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 같다는 느낌은 왜 드는지.
세계수가 말한 초월자의 힘. 그걸 얻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했다.
슈우웅, 나의 의지에 맞춰 3개의 기운이 검신을 따라 깃들었다.
‘일단 텔런트의 숙련도를 올리는 게 급선무겠지.’
정면에 선 은발의 사내.
클리프는 광휘의 심판을 뽑아 들고 나를 호기롭게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