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95화 (95/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95화>

95. 로드 오브 워 (4)

[스킬: [전투 달인]의 등급이 ‘B’가 되었습니다. 근력+1, 민첩+3, 체력+3]

[스킬: [한손검 달인]의 등급이 ‘D’가 되었습니다. 근력+1, 민첩+4, 체력+2]

상태창의 알림이 나를 깨웠다.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철인]이라는 특성으로 한껏 강화된 신체로도 견디기 힘든 격전이기는 했다.

‘살아는 있나.’

폭발의 여파로 잠시 의식을 잃었던 건가.

저번에 라그나의 일과는 달리, 이번에는 [투영]이 상당히 잘 버텨 준 것처럼 보였다.

하긴 기술이 깨졌다면 다 같이 폭사했겠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내 상태를 점검했다.

시야는 흐릿하고 고막은 먹먹하다.

나는 서둘러 손과 발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고, 주변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살폈다.

의식을 잃은 사람들은 모두 호흡이 평온했다.

“깨어났군.”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

시계탑주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근처에는 앞서서 정신을 차린 펠리스가 전투를 복기하고 있었다.

“다들 괜찮습니까?”

시계탑주와 펠리스는 말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짙은 마기, 주변은 부에르가 남긴 자취로 오염되어 있었다.

나는 몸에 기운을 두르고 폭발의 중심지로 걸어갔다.

주인을 잃은 마의 에너지가 침입자를 공격했다. 겉에 두른 신성력과 오러에 이빨을 드리우고 달려들었다.

“충분히 가능하겠어.”

나는 손을 뻗었다.

펠리스와 찰스는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슈우우, 약간의 잔해만 남은 부에르의 육신에서 검은색 기운이 꿈틀거렸다.

마기는 내 손에 모여들었고 얼마 있지 않아 모두 나의 것이 되었다.

부에르에게서 갈취한 마기는 1431점.

최종적인 마기 수치는 2476점이었다.

오러홀에 감싸 있던 검은색 기운이 더욱 압축되며 내 몸속 깊은 곳으로 숨어 버렸다.

마치 흉포한 늑대가 얌전히 꼬리를 내린 느낌.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마기를 주 에너지 원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계탑주는 지팡이를 내밀며 나에게 다가왔다.

“마인으로 변하지 않는군.”

“변하길 기대했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고 볼 수 있네. 자네가 여태껏 말하고 행동한 것을 부정하는 일일 테니까.”

“마음을 숨기지 않으시는군요. 여차하면 마족으로 몰아 저를 죽일 수도 있을 텐데요?”

상황이 살짝 묘하게 흘러가자 뒤에서 펠리스가 일어섰다.

그녀는 시계탑주에게 살기를 쏘아 보냈다.

시계탑주와 결사단주의 차이, 그것은 나에 대한 유대와 신뢰의 차이였다.

하지만 상황은 더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다.

“나는 바보가 아니네.”

찰스 랭커셔가 차가운 표정을 풀고 웃었다.

그는 평소에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어 떠들었다.

“텔런트는 차원 대전쟁 이후로 아인종과 인간에게 나타났지. 학자들은 신의 기적, 혹은 악마의 유린이라고 했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자네는 텔런트로 악마를 쓰러트렸고, 스칼렛 양은 텔런트로 병자를 치유하고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렸다네. 이게 뜻하는 건 하나지.”

텔런트는 어느 절대자의 안배가 아니다.

찰스 랭커셔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다.

그는 잠시 우두커니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뜸 나를 칭찬하며 말을 이었다.

“참, 여왕 폐하의 고견이 이번에도 적중했군. 자네는 그거 아나? 똑똑한 자와 현명한 자는 다르다는 것을.”

“대충 무슨 느낌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것과 미래를 내다보는 차이 아닙니까?”

“대체로 맞는 이야기지. 나는 똑똑하네, 수많은 이론서를 기억하고 한번 본 마법진은 절대 잊지 않으니. 가히 천재라 할 만하지.”

시계탑주는 판게아에서 가장 마법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다.

빅토리아 5세보다도 더 뛰어난 마법사고, 아마도 앞으로 그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더 높은 성취를 달성한 탑주가 어째서 여왕에게 충성하는지.

그 주제가 시타델 주점의 안줏거리가 될 정도로 그의 능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여왕 폐하는 현명하시네. 자네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이렇게 지원하지 않았나.”

“그게 폐하를 따르는 이유입니까?”

“대단히 경솔한 말이군. 룬덴에서 그 말을 했다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말이지. 하지만 부정하지는 않겠네.”

그는 마법으로 쓰러진 자들의 원기를 북돋아 주었다.

아마 나에게도 이런 식으로 마법을 걸어 주고 있었겠지.

“나는 현명하지 않기에 항상 조심하지. 내 지식을 디딤돌 삼아 내다보지 못하는 미래에서 간신히 파멸을 막아 낼 뿐이라네.”

“저도 현명하지는 않습니다. 탑주님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 자네에게는 이 무모한 계획에 확신이 있지 않았나? 물론, 마지막에는 조금 삐끗한 것처럼 보였지만.”

마지막 순간.

나는 대악마가 다시금 힘을 얻은 이유를 몰랐다.

임기응변으로 잘 끝냈지만, 충분히 도망갈 수 있을 만큼 상황이 여유로웠지만.

하마터면 일이 크게 꼬일지도 몰랐다.

“좀 알려 주게. 그 확신이 어디서 오는 건지.”

탑주는 나를 여왕과 비슷한 부류로 보았다.

논리와 이성을 뛰어넘는 무언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게 없다.

“저도 정보를 통해 유추하고 대비할 뿐입니다. 아쉽게도 다른 건 없습니다.”

“영업 비밀인가. 뭐, 어쩔 수 없지.”

찰스는 재차 마법을 사용하며 말했다.

“자네가 사기꾼이란 나의 예측이 틀려서 정말 다행이군. 다행이야.”

물론, 마지막 말은 내가 동의할 수 없었다.

솔직히 사기꾼이 맞기는 하니까.

* * *

짧은 전쟁은 끝을 맞이했다.

마족들은 대악마의 죽음을 기점으로 전투를 포기하고 도망쳤다.

대악마가 소환한 검은 구름과 포탈은 닫혔으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수밖에 없었다.

추격 섬멸전.

전쟁은 연방의 반격을 기점으로 2달이 되어서야 종식되었다.

정의의 악마, 라피스는 부하와 주군의 뒤를 따르겠다며 홀로 연합군의 진영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반면에 인내의 악마인 ‘모올’은 군대를 이끌고 간신히 암흑대륙으로 돌아갔다.

‘다구리는 인내할 수 없었나 보지.’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푸른 하늘을 보았다.

이오시프그라드 근처의 어느 평원, 검은 구름이 사라진 하늘은 평화로웠다.

마족의 침략으로 영토는 마기로 침식되었지만.

오염된 영토의 정화는 스칼렛의 [에너지 분해]나 신성회의 사제들이 해야 할 일.

지금은 연방의 참모부와 이견을 조율하며, 마족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일이 전부였다.

“왔냐? 옆에 계신 분은…….”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은발의 사내,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대검을 지닌 남자가 내 시선의 끝에 있었다.

그 옆에는 시리엘의 고향인 ‘이르민술’의 제사장도 함께였다.

“처음 인사드리는군요. 유리엘이라고 합니다.”

사려 깊어 보이는 얼굴.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일 정도로 동안이었지만, 그녀의 나이는 이미 500살이 넘었다.

그녀는 클리프를 따라와 본 드래곤과 정의의 악마를 해치우는 데 일조한 강자이기도 했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클리프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다른 게 아니라. 너의 텔런트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다고 하셔서.”

“들어보니, 오러와 신성력, 그리고 마기를 모두 다루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굳이 빼지 않고 말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몰라도, 이미 높은 사람들은 내 텔런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내가 인류의 적이 아니라는 인식만 있다면, 알려져도 크게 상관은 없으니까.

“보십시오.”

나는 곧바로 텔런트를 사용했다.

각기 다른 기운이 구처럼 뭉쳐서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

몇 바퀴 손바닥에서 굴리다가 기운들을 한 곳에 뭉치기도 하며,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다.

“죄송하지만, 루카님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가요? 저는 또 몰래 처리하려고 오신 줄 알았습니다.”

연방의 일이 끝날 때까지 나와 클리프는 대화하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 둘이서 이야기를 하자는 쪽지를 읽고서, 스칼렛과 펠리스도 떼어 놓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상당히 수상한 상황은 맞았다.

‘초감각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아.’

세계수의 제사장.

유리엘은 게임이 끝날 때까지 클리프를 도와주는 조력자다.

그도 당연한 것이 저 은발의 국밥이는 세계를 수호하는 용사로 지명받았기 때문이다.

유리엘은 내가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사실, 저희는 세계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게 저와 관련이 있는 일인가 보군요.”

“맞습니다. 바로 본론부터 말해 드리죠. 혹시 최근에 텔런트를 얻고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급하게 클리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말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나도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그냥, 너에게 세계수님께서 전할 말이 있다는 것만 들었거든.”

“그래서 바쁜 와중에 너를 이르민술로 부른 거고?”

“그렇다고 하셨어.”

나는 유리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아주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느낌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공간도.’

나는 유난히 주변이 적막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유리엘이나 클리프의 소행이 아니다. 세계수가 직접 우리가 서 있는 공간에 힘을 가하고 있었다.

함정인가? 그렇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수가 나를 처리하려 했다면 이런 방식을 썼을 리가 없다.

“이 대화를 들으면 안 되는 자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유리엘은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악마나 대악마가 엿듣기라도 한다는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세계수가 악마나 대악마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테니.

“마신이군요.”

악마와 마족들이 섬긴다는 신.

마신이라면 세계수가 두려워할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유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세계수님의 부름에 답하시겠습니까?”

여러 가지 고민이 오갔다.

마신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나는 열을 내는 국밥이를 잠시 쳐다보았다가 유리엘에게 손을 뻗었다.

만약 국밥이라면, 나를 해치려는 일에 선뜻 나설 리가 없으니까.

유리엘의 손.

나는 세계수의 뜻대로 그와 대화해 보기로 했다.

엘프의 하얗고 미끈한 손바닥이 울퉁불퉁한 내 손바닥과 닿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이 맞닿았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생리적인 현상으로 눈을 깜빡였다.

“오셨습니까?”

여인이면서 남자의 느낌과도 비슷한.

성별을 특정하지 못하겠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는 순식간에 변해 버린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숲이 답답할 정도로 울창하지요?”

웃음소리와 함께 나를 이해한다는 취지의 말이 들렸다.

숲이었다. 지평선조차 보이지 않고 하늘조차 가려 버린 울창한 숲.

나는 그 중심에 서서 정면에 있는 거대한 나무를 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부터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다.

여자로도, 남자로도 보이는 상대는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사실 최근까지는 당신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거든요.”

게임에서 보았던 세계수와는 다르다.

하긴 생명체의 틀을 벗어나서 초월자가 되었으니 외형은 별 상관이 없으리라.

상대의 의중은 몰랐지만, 내가 물어볼 것은 하나였다.

나는 앞으로 발을 옮기며 물었다.

“당신이 나를 판게아로 데려왔습니까?”

내 물음에 세계수는 웃었다.

그리고 햇살보다도 더 투명하고 밝은 느낌을 내며 말했다.

어떠한 악의도,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당신을 데려온 자는 나의 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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