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91화>
91. 남부전선 이상 많다 (5)
평의회의 최고 권력 기관.
연방 국무 위원회는 장관급 인사들로 이루어진 정부 내각이다.
그 엄청난 권위를 자랑하는 단체의 수장은 ‘이오시프’ 위원장이다.
현재에 이르러는 완전무결한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의 유년 시절은 순탄하지 않았다.
반동분자.
이오시프는 시작부터 이 꼬리표가 붙은 채로 태어났다.
신문사의 기자였던 할아버지가 연방의 국무위원을 비판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권위, 그 추상적이면서도 확고한 힘이 이오시프의 유년기를 옭아맨 것이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사람들에게 개방적인 나라를 만들기로 마음먹은 거야?’
스칼렛은 이야기를 듣고서 상식적인 이야기를 내놓았다.
보통 연극에 나오는 영웅들은 그렇지. 하지만 이오시프의 선택은 완전히 반대였다.
권위의 최정상에 올라서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현실은 연극을 뛰어넘는 법이니까. 웃차. 스칼렛, 이제 들어간다.’
나는 삼엄한 경비를 돌파하고 건물의 외벽에 찰싹 붙으며 말했다.
연방의 골칫거리. 연방의 지시와 체제에 반항한 사람들은 모두 노동 수용소에 들어간다.
당연히 이오시프도 오랜 시간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후우, 그러다가 연방에서 실시하는 오러 적성 검사에 통과했지.’
‘오! 이제 대 서사시가 시작되는 건가?’
‘그런 셈이지. 이오시프는 기동 갑주의 파일럿이 되었고, 후임으로 지금의 미하일을 만났어.’
‘네가 말했던 연방의 최강자라던 사람?’
‘응, 둘이서 엄청나게 마족을 해치웠지. 찾았다.’
외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나는 거대한 유리창이 있는 방 앞에서 멈췄다.
안에는 여러 사람이 원탁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평의회 연방의 지도, 그곳에는 오늘 동안 일어난 전투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다행히 저들의 공세가 멈춰서 전선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고 있습니다.”
한 장성이 긴장한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회의의 중심, 풍성한 콧수염을 만지던 남자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대악마라는 자가 다시 나타난다면. 막아 낼 방도가 있겠소?”
“그것이…….”
훈장을 옷에 잔뜩 단 남자는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재앙, 인간이 도저히 막아 내지 못할 파멸의 징조를 본 사람처럼 말을 얼버무릴 뿐이었다.
입에 재갈을 문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탁을 둘러싼 다른 장성들도 뾰족한 방법을 내지 못했다.
“위대한 연방의 장군이 겁을 먹어서 쓰겠소! 무능하오! 무능하고 또 무능하오!”
남자의 콧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이전 숙청 시기에 무능한 장군들도 전부 갈아 버렸어야 했다느니, 당신들을 살려 두면 안 되었다느니.
절망에 빠진 남자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과거의 자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위원장 동지, 지금이라도 수도를 지키는 중앙군을 후퇴시킨다면 전선이 훨씬 보강될…….”
“닥치시오!”
위원장은 한 참모가 내놓은 의견에 더욱 격분하며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원탁에 그려진 전선의 모형에는 조금 특이한 부분이 있었다.
중앙군이 수비하고 있는 지역이 전선의 돌출부가 되어 튀어나와 있는 형국이었다.
수비자의 관점에서 돌출부가 튀어나와 있는 것은 썩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중앙군은 수도를 지키고 있잖아. 그게 왜 문재야?”
‘적이 돌출부의 접점을 파고들면 전선이 무너져서 모두 끝장이니까.’
‘오오, 그런 것도 알아? 루카는 대단하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점이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완전히 패배해 전선을 물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주 나빴다.
나는 왜 저렇게 이오시프가 날뛰는지 알 수 있었다.
위원장이 자신이 이름을 박아 넣은 연방의 수도가 돌출부의 중앙에 있었으니.
“그곳은 이오시프그라드요! 다른 도시도 아니고. 나의 권위, 연방의 권위를 대변하는 곳이란 말이오!”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얼마나 더 큰 피해를 볼지 모릅니다!”
다른 장군들도 쉽게 의견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어련할까?
연방은 개전 시점부터 여태까지 수백만의 사상자가 생겼다.
그것도 군인들의 숫자만을 간신히 통계 낸 것이었다.
“위원장 동지! 이오시프그라드의 전장은 오늘도 3만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이대로 수도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군대가 버티지 못할 겁니다!”
“최소한 외국의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대로는 국가의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할 겁니다!”
격론이 오가고.
거의 주먹다짐 직전까지 간 회의는 급기야 파행되었다.
장군들은 얼굴이 새빨개진 상태에서 방문을 열면서 나갔고, 위원장은 근처에서 대기하던 장교를 불렀다.
“미하일은 어디 있는가! 당장 저 반역자들을 잡아들이라고 하게!”
“미하일 상장은 부대를 시찰한 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지금은 이곳에 없습니다.”
“젠장! 미하일, 미하일. 분명 내 친우라면 이 수라장을 돌파할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분명 그래야만 해!”
“위원장 동지, 침착하십시오. 지금 이럴수록 냉정하셔야 합니다.”
“다 필요 없다. 다 필요 없어! 네놈부터 당장 밖으로 꺼져라!”
격분한 남자는 호위 병력과 장교들을 내쫓았다.
이어서 나 홀로 연극을 펼치기 시작했다.
뭐, 처리할 경비병이 없으면 스칼렛이 수고를 덜어서 좋지.
“미친놈들. 수도에서 병력을 물리거나 외국에 구원을 요청하면. 그러면, 내 권위는 어떻게 되겠냔 말이다.”
중얼중얼.
우리 이오시프는 혼잣말도 잘해요.
나는 손에 마기를 머금었다. 다행히 유리창에는 어떠한 보호 장치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만큼 급하게 수도에서 도망 나왔다는 말이지.
내가 마족이 죽인 것처럼 위장해 미치광이를 처단하려던 순간.
‘루카, 저 사람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아. 예전에 처자식 전부 잃고 길에서 방황하던 아저씨 기억나?’
‘갑자기 그건 왜.’
‘그러다가 아저씨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했잖아. 왠지 그때랑 비슷해서.’
‘지붕 위에서 떨어져 죽으면 전부 자살이냐. 누군가 일부러 죽…….’
오호?
역시 스칼렛은 최고의 히트맨이다.
확실히 여기까지 와서 악마가 위원장을 죽였다는 게 현실성이 떨어지기는 하지.
나는 손톱에 머금었던 마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림자 잠행술]을 유지하며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스칼렛, 저 사람 좀 재워 봐. 내 생각이 뭔지 알겠지?’
‘으음, 알겠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어서 좋네.
원탁에서 열을 삭히던 위원장이 갑자기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뭔.”
이오시프는 일반적으로 2번째 벽을 넘긴 사람들과는 달랐다.
미하일과 함께 불패의 신화를 이룩한 전쟁 영웅이었다.
물론, 지금은 노망난 아집 덩어리지만.
“끄윽. 그으윽.”
스칼렛의 정신 간섭에 맞서던 상대의 저항은 싱겁게 끝났다.
곧바로 그의 몸이 넘어졌고, 나는 무사히 그를 받아 냈다.
‘권총 정도는 있겠지?’
군인 출신답게 위원장의 혁대에는 권총집이 있었다.
나는 근처 의자에 남자를 앉히고 그의 손이 권총을 쥐도록 만들었다.
그 뒤로는 간단했다. 상대의 목을 젖히고 총구를 턱에 갖다 대 방아쇠를 눌렀다.
탕!
정적을 깨는 총성.
나는 순식간에 밖으로 빠져나와 창문을 닫고 조용히 반응을 기다렸다.
두두두두, 시끄러운 군화 소리와 함께 회의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위, 위원장 동지!”
밀실 살인, 혹은 자살 사건 탄생이네.
다급한 병사들의 음성을 들으며, 나는 다시 원래의 장소로 복귀했다.
* * *
짹짹짹.
새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나와 스칼렛은 묶인 상태로 밤을 지새운 것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의외인 사실이 있다면.
“일어났나?”
우리를 감시하던 군인들은 꿋꿋이 잠을 버티고 있다는 정도.
오오, 유능해. 나는 속으로 엄지를 세워 주며 칭찬했다.
“그보다 약속했던 분은 언제 오는 겁니까.”
“우리도 모른다. 마족의 침공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도시가 부산스러운 느낌은 있군.”
남자는 창문 밖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러던 그때, 군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주변 동료들에게 소리를 외쳤다.
“오, 오셨다.”
밖을 내다본 군인은 문을 바라본 상태로 뻣뻣하게 굳었다.
이어서 계단을 올라와 문이 열리자, 견장에 3개의 별이 달린 회색 머리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부대 차렷! 군단장…….”
“됐네, 자네들은 방에서 나가 쉬도록 하게.”
무게감이 실린 목소리.
군인들은 곧바로 명령을 이행했다.
나 또한 묘한 카리스마를 느끼면서, 미하일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를 당장 도와줄 수 있는가?”
연방군의 핵심 전력인 독립 기동 군단의 사령관.
미하일이 나에게 처음 건넨 말은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말이었다.
하지만 넙죽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
“갑자기 연방의 태도가 변한 느낌입니다. 절 이곳으로 보낸 사단장은 외국의 도움을 받는 걸 부담스러워 했거든요.”
“외국과의 협력에 반대하던 위원장 동지께서 돌아가셨다.”
이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나는 의도적으로 동공을 살짝 키웠다.
옆에 앉아 있던 스칼렛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크게 동요하는 모습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얘도 의외로 눈치가 빠르니까.
“우리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우리를 감시하던 군인들은 밖에서 조사를 받았다.
뭐, 저렇게 해 봤자 진실을 알 수는 없겠지만.
스칼렛의 정신 간섭은 마법이나 주술이 아니기에 마나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즉, 물증은 없다.
그게 내가 당당하게 위원장을 암살한 이유이기도 하고.
“다만, 그대의 오러. 그리고 실력을 보자면…….”
“맞습니다. 연방의 지도부에 다가가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미하일은 결사단의 정체를 알고 있다.
확실히 내 오러의 특성을 확인한다면 의심을 받을 만하지.
나는 굳이 상황을 빠져나가려 하지 않고, 이 상황을 이용해 더욱 강력한 신뢰를 형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상하시는 일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걸 증명할 수 있나.”
“이미 답을 내려놓으신 것처럼 보입니다만. 만약 제가 움직였다면 여기 군인들이 몰랐겠습니까?”
내가 말을 끝내자 뒷문이 열리며 군인이 들어와 미하일에게 보고를 올렸다.
놈들이 기막을 사용했기에 대화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내용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보고를 마친 군인이 나가고, 미하일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나를 보았다.
“나는 위원장께서 자살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분은 항상 강철 같은 분이셨으니까.”
“저는 직접 뵌 적이 없기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잠시 말을 멈추고 나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믿길 바랍니다. 지금 인류가 협력할 때입니다.”
“부정하지 않겠다. 그럼 우리에게 신뢰를 줘라.”
“저는 연합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시타델과 협력하고, 결사단주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성 제국과도 연이 있죠.”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믿음직스러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관은 없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니까.
“제 말을 못 믿겠다면, ‘갈색 수염’ 길드의 영역으로 가 보시면 됩니다.”
“거기는 국경에 있는 자유 도시군.”
“맞습니다. 저는 여기에 남겠습니다. 대신에 대표로 이 여자를 보내면 제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내 말에 목숨을 걸겠다.
이런 뜻이 전달된 탓인지, 미하일은 오래도록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신에 지금부터 그대를 피의자 신분으로 대우하겠다. 합당하다고 생각하나?”
“상관없습니다. 일단 제가 연방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걸 증명해야, 그다음에 건설적인 대화가 가능하겠죠.”
나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렸다.
스칼렛의 눈에서 불안함과 걱정이 동시에 드러났다.
그래도 저 걱정은 좀 고맙네. 나는 사념을 날려 스칼렛을 설득했다.
‘괜찮아. 일이 잘 안 풀리면 네가 구해 주러 와. 나는 널 믿으니까.’
신뢰한다는 말에 스칼렛은 이견 없이 내 결정에 따랐다.
애당초 위원장을 암살한 시점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내 죄야 얼마 있지 않아 벗겨질 것이고, 연방의 통치권은 자연스럽게 미하일에게 넘어갈 테니.
‘그렇게만 된다면, 마족과의 전쟁에서 연방을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지.’
권위에 심취한 이오시프와 다르게, 미하일은 사고가 유연한 편이다.
외국과 협력할 줄 알고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오랜 관습을 깨트리기도 한다.
그러니 연방의 차기 리더는 저자가 적합했다.
‘그보다 생에 첫 빨간 줄이 국가원수 살해 혐의라니.’
내가 진짜 굉장한 삶을 살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