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89화 (89/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89화>

89. 남부전선 이상 많다 (3)

라그나.

불의 일족을 이끌었던 드래곤은 차원 대전쟁 이후로 혼자가 되었다.

그는 가족과 친척을 모두 잃었고, 낙담하여 스스로 만들어 낸 차원 속에 자신을 수백 년이나 가두었다.

가끔 주제도 모르는 인간들에게 시련을 내리는 것만 빼면 정말 우울하고 절망적인 나날이었다.

‘내가 그런 인간 놈에게 농락당하다니.’

라그나는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마의 기운에 눈을 번뜩였다.

부에르가 쏜 화살들, 라그나는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여 순식간에 본인의 공간을 만들었다.

화살은 라그나가 만들어 낸 공간의 방벽에 부딪혔다.

두두두둥! 둘의 기운이 부딪힐 때마다 주변으로 기운이 튀며 공간 전체를 울렸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마의 화살.

라그나는 그 모두를 막아 내고 주위를 살폈다.

없다.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온 가증스러운 인간은 특유의 오러로 자신의 모습을 숨겨 버렸다.

지금이라도 추적한다면 능히 찾아내겠지만, 라그나에게 그럴 여력은 없었다.

“멸망한 종족의 생존자인가.”

찌지지직.

차원의 벽이 찢어지며 말의 하체와 사자의 얼굴을 한 괴물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활이 들려있었다.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으나 라그나는 상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 나는 싸울 생각이 없다. 그저 똥파리 하나만 찾아서 제거하면 그만이다.

라그나의 음성이 공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단순히 성대로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마나에 자신의 사념을 실어 주위에 퍼트리는 드래곤의 기본기였다.

부에르는 전신을 찌르는 날카로운 음성을 흘려버리며 말했다.

“상관없다. 언젠가는 치워 버릴 적이니.”

활에 다시금 파괴적인 기운이 맴돌기 시작한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드래곤이 멸족하고 라그나는 남은 삶을 조용히 영위하길 바랐다.

종족이 없어진 마당에 싸움이 중요하겠는가.

‘그 이상한 기술들만 아니었다면.’

라그나는 목을 타고 넘어오는 강렬한 분노의 화염을 느꼈다.

인간과 아인종들은 차원 대전쟁 시기부터 기이한 능력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서로 다른 차원이 충돌하며 생긴 여파. 라그나는 천천히 부에르의 육신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 네놈도 정상은 아니군. 나를 이기고 차원을 손에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지금의 판게아는 분열되어 있다. 차원 대전쟁 시절과는 다르지. 네놈들, 드래곤만 해치운다면.”

부에르의 활시위에 화살이 걸렸다.

라그나는 아득하게 희미해진 인간의 기운을 감지하며 포효를 내질렀다.

잠시나마 되찾은 이성과 논리는 잊어버렸다.

눈앞에 있는 적, 차원 대전쟁 시절에 날뛰었던 포식자의 영혼만이 육체에 녹아 그의 불꽃을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도록 만들었다.

- 어리석은 것! 네놈들에게 우리 종족의 긍지를 다시 한번 더 새겨 주겠다!

신의 영역.

모든 생명체의 궁극에 거의 다다른 두 존재의 포효가 하늘을 찌르고 바다를 갈랐다.

* * *

짜란다, 짜란다.

나는 아주 먼 거리에서 두 절대자의 싸움을 지켜봤다.

바다가 뒤집히고 하늘이 쪼개지는 맹렬한 결투였다.

저 단두대 매치에서 살아남은 쪽이 우리와 붙게 되겠지.

어차피 누가 살아남든 정상은 아닐 터. 나중에는 쪽수로 몰아붙여 두들겨 패면 되었다.

“와! 죽는 줄 알았어.”

스칼렛이 젖은 옷을 꽉 짜자 후드득 물이 떨어졌다.

우리는 라그나와 부에르의 첫 격돌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화살과 방어막이 만나며 공간이 일그러졌고, 나는 [투영]을 방어 용도로 사용하여 파편들을 막아 냈다.

‘설마 [투영]으로 만든 세계가 깨질 줄이야.’

스칼렛이 내 능력을 강화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끔찍했던 순간을 머리에서 털어냈다.

“루카, 여기는 평의회 연방의 땅이지?”

얼추 물기를 털어낸 스칼렛이 물었다.

우리는 둘의 싸움을 피해 평의회 연방의 기슭에 상륙했다.

적진 한복판, 다행히도 부에르가 소환한 검은 구름은 이곳까지 닿지 않았다.

“응, 여기서 곧바로 한자 동맹으로 넘어갈 거야.”

“근데 그렇게 되면 적진을 돌파하는 꼴이잖아.”

“그렇긴 하지.”

물론, 로빈 공작을 부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의 순간 이동은 스칼렛과는 달리 다량의 마나와 체력, 그리고 정신력을 소모한다.

이미 나와 함께 다니며 수차례 마법을 썼고, 핑거톤이나 다른 집단을 옮기며 또 순간 이동을 여러 번 사용할 것이다.

“어차피 적진도 한번 둘러봐야 하니까.”

“알겠어, 근데 루카.”

스칼렛은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몸을 쓰윽 훑으며 물었다.

“그, 아까 신성력과 비슷한 힘을 쓰던데. 그건 뭐야?”

“미안, 아직 말을 안 했었는데. 나도 너처럼 텔런트가 생겼어.”

이전에는 나도 너무 당황스러웠기에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일을 해결하며 내 텔런트를 숨길 수는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나는 손바닥에 마기와 오러를 뽑아냈다.

“너무 놀라지는 마. 신성력 말고도 마기도 사용할 수 있으니까. 혹시 무서워?”

“……아니, 안 무서워. 이 기운은 나를 해치려 하지 않잖아.”

스칼렛의 말대로 [??]의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기운을 더욱 세밀하게 다룰 수 있었다.

마기의 경우에도 완전히 나의 통제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예상대로 눈앞의 소녀는 그리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다 뒤지게 생겼는데 마기든 뭐든. 이길 수만 있다면 상관없겠지.’

라그나, 혹은 부에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죽을 확률이 더 높아 보이는 쪽은 라그나였다.

지금만 보아도 부에르의 곁으로 두 악마가 모여들고 있었으니.

‘쌤통이다.’

이건 수많은 루카의 복수야!

아아, 얼마나 많은 루카가 <라그나의 시련>에서 죽어 나갔는가.

온갖 시련을 겪은 후에 라그나가 마지막으로 내놓는 시련은 동료의 ‘희생’이다.

말 그대로 동료를 하나 희생하라는 이벤트가 뜬다.

당연히 게임에서 클리프와 스칼렛은 그에 반발한다.

‘루카를 동료로 데려가면 스스로 용암에 몸을 던지는 선택지가 있지.’

이유는 이렇다.

본인은 약하니까. 클리프와 스칼렛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

루카의 기억이 내 몸으로 들어왔기에 그 감정을 더욱 끈적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얼마나 뭣 같은 감정인지.

“근데 저 도마뱀 할아버지를 저렇게 둬도 되는 거야?”

이런 이야기를 알 리가 없는 스칼렛이 멀리서 일어나는 전투를 보며 물었다.

어차피 우리의 편이 아니라면 전부 적이라 봐도 무방하다.

라그나는 잠재적인 적. 동족을 모두 잃은 그였기에 잠자고 있던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싱긋 웃으며 스칼렛에게 물었다.

“그럼 다시 돌아갈까?”

“아니, 그건 사양할래. 저기 봐. 공간이 막 휘고 있어.”

스칼렛은 손가락으로 전투가 일어나는 곳을 가리켰다.

그래,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지.

옛날에 소중한 생명을 희생해 준 그로탄처럼, 이제 우리는 새로운 동료인 라그나의 시체를 밟고 전진해야 한다.

“우리, 잊지 말자. 드래곤 일족이 인류를 위해 어떤 희생을 했는지.”

“응, 반드시 승리하자.”

얘도 이제 싸이코 다 됐네.

나는 스칼렛과 함께 라그나를 배웅하고 서서히 북부로 올라갔다.

* * *

평의회 연방.

원래 이곳은 여러 왕국과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그들은 지구인과 판게아인으로 나뉘어 전쟁을 벌였고, 그 때문에 수많은 기아와 가난이 탄생했다.

거기에 마족의 주기적인 침략까지. 그 당시에 이 땅에는 희생자의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끔찍한 전쟁을 끝내겠다는 사람이 등장했다.

그는 모든 종족이 어우러진 나라를 건설하겠다며, 자신이 살던 지역에 ‘평의회’라는 의사 결정 기구를 설립했다.

그리고 성별과 종족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받아들이며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바로 노동자와 군인과 농부가 하나가 되는 지상낙원을.

응? 뭐랑 비슷하지 않냐고?

착각이다.

무엇을 상상했든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현재 평의회 연방을 이끄는 지도자 이름이 ‘이오시프’란 것도 전혀 무관하다.

종교와 성씨처럼 민족성이 묻어나는 것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연방의 제도를 전 세계에 널리 퍼트리는 게 목표라고 하던데.

‘이래서는 힘들지.’

우리는 꼬막 하루를 이동해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최전방에 도착했다.

스칼렛은 염동력을 해제하며 한때 도시였던 폐허에 내려 주었다.

사방에는 뜯어 먹힌 시체와 파괴된 병기들이 가득하다.

거대한 기동 갑주. 연방의 핵심 전력으로 꼽히는 파일럿의 시체도 이곳저곳에 무질서하게 엎어져 있었다.

쿵! 쿠웅, 쿠웅!

꽤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는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만큼 전쟁이 촉박하게 흘러간다는 이야기.

남부에서 북부로 올라오며 살펴본 피해는 매우 컸다.

“남부집단군은 전부 괴멸이야.”

“남부집단군?”

스칼렛은 내가 내뱉은 단어의 뜻을 몰랐다.

“이 나라는 크게 4개의 집단군과 하나의 중앙군으로 나뉘거든.”

“연합에는 군대가 없잖아. 신기하네.”

“……우리도 군대 있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그렇지. 여기는 정부의 통제를 강력하게 받는 곳이라, 연합처럼 사병이 없거든.”

오오, 스칼렛은 놀라운 일이라며 감탄을 흘렸다.

장비와 병력의 질이 형편없는 동부와 서부를 빼면 주 전력은 총 3개가 남는다.

그런데 남부군이 가루가 되었으니 전력은 2개가 남은 셈이다.

‘원래 암흑 대륙을 정벌할 선봉군으로 썼어야 했는데.’

내 원대한 계획에 살짝 먹구름이 끼었다.

설마 대악마 부에르가 이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연방을 침략할 줄이야.

어쨌든, 지금은 난관을 넘어서는 게 중요했다.

“스칼렛, 지금 당장 전선을 가서 마족의 군대와 싸우자.”

“그러길 기다렸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와 스칼렛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전선의 어느 귀퉁이로 나아갔다.

얼마 있지 않아 우리는 지옥의 한복판을 목격했다.

“제13 형벌 대대 돌격!”

지휘관의 명령에 젊은 남자들이 공포에 질린 채로 돌진했다.

목표는 아군의 전선을 돌파하고 튀어나오는 마족의 군대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돌격하는 곳으로 인간의 고기를 탐하는 마물들이 몰려들었다.

“으.”

끔찍한 광경에 인상이 저절로 찌그러졌다.

변변찮은 무기도 갖추지 못한 경무장 보병들이 찢어지거나, 터져 나가며 죽었다.

나는 스칼렛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내려 줘. 사람들을 도와줄 테니까.”

내 말이 전달되자 염동력의 영향이 점차 사라지며 육신이 부드러운 하향 곡선을 탔다.

마공학 리볼버가 뽑혀 나왔다. 나는 맛있는 식사를 하려던 구울의 머리에 구멍을 뚫어 주며 땅에 안착했다.

이어서 병사 하나를 집어 올린 오우거의 미간에도 검붉은 광선이 꽂혔다.

[스크류 샷], [디바이드 블릿], [코너 샷]

나는 위의 세 가지 기술을 떠올리며 리볼버를 연사했다.

넓은 지역에 여러 광선이 쪼개지며 나아갔고, 급소에 바람이 뚫린 적들의 몸이 허물어졌다.

형벌 부대.

나는 이들이 무엇인지 안다.

전원 죄수나 반동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감시 부대의 명령에 따라 죽음이 결정되는 부대가 바로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쥐어지는 무기는 거의 고물이나 다름없었다.

형벌 부대는 평의회 연방에서도 아주 긴급한 상황에서나 쓰이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는 건 여기가 가장 위험한 전선이라는 뜻이지.’

내가 리볼버를 몇 번 장전하고 쏘니 적들은 모두 쓰러졌다.

이윽고 모든 적이 소탕되었을 때, 나는 나를 멀뚱히 바라보는 이들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다른 나라의 첩자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