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88화>
88. 남부전선 이상 많다 (2)
드래곤.
태어날 때부터 최강으로 태어나는 생명체.
일반적으로 ‘해츨링’이라고 불리는 새끼 용도 보유한 마나의 양이 5위계 마법사 수준은 된다.
게다가 단순히 나이를 먹어 성체가 되면 7위계에 준하는 마나를 다룰 수 있다.
이른바 개사기.
금수저나 다이아 수저를 뛰어넘는 마나 수저.
다만 이 어마어마한 종족은 차원 대전쟁을 거치며 판게아에서 자취를 감췄다.
멸종, 아마 그 단어를 사용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나는 뜨거운 지면을 밟으며 말했다.
“스칼렛, 우리는 게임을 할 거야. 술래잡기 알지?”
“예전에 많이 해 봤지. 대악마랑 술래잡기를 한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다만 목숨을 건 술래잡기라는 것 정도만 알아 둬.”
“……괜찮아. 우리는 언제나 살아남았으니까.”
스칼렛에게는 믿음이 있다.
바로 나에 대한 믿음. 그 하나의 신념이 주변의 간섭을 모조리 배제하고 올곧게 직진하는 모양새였다.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열기도, 대악마에 대한 무서움도.
그녀에게는 없다. 오히려 나보다도 나를 더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힘이 되긴 하네.’
2년 전에 모든 것에 휘둘리던 소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굳이 로빈을 돌려보내고 스칼렛을 택한 이유에는 이런 점도 포함이 되었다.
어떤 미친 계획에도 스칼렛은 응해 주니까.
“여긴.”
스칼렛이 살짝 긴장된 음성을 냈다.
드래곤은 그 존재만으로도 생명체에 두려움을 선사한다.
그녀는 뭔지 모를 위압감에 눈에서 빛을 뿜어내며 정면을 응시했다.
“이상해. 분명 허공인데 막혀 있어.”
[간섭]의 능력.
스칼렛은 세상의 진리를 꿰뚫어 보는 시선을 통해 정면이 막힌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일반적인 시야로 본다면 높게 솟아오른 화산으로 향하는 길목일 뿐이었다.
“여기야. 우리의 목적지가.”
나는 그리 말하며 오러를 뿜어냈다.
시련에 도전할 자격, 다 죽어 가는 변태 도마뱀의 장난감이 되기 충분하다는 의지가 몸에서 터져 나왔다.
“이 한낱 피조물이 지고의 어르신께 도움을 청하나이다!”
오러를 담은 외침에 주변이 요동쳤다.
나는 일반적인 영어가 아닌, 사라센에게 배웠던 [브리아 어]로 소리를 질렀다.
반응은 바로 오지 않았으나 이 방법이 라그나의 시련을 받는 방법이었다.
“스칼렛, 여기서는 나에게 모두 맡겨 줘. 알겠지?”
혹시나 일을 그르칠까 하는 마음에 나는 스칼렛에게 먼저 주의를 줬다.
적발의 여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어서 단순한 허공이었던 공간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붉고 뜨거운 벽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성. 화산으로 보이는 풍경이 왜곡되고 뒤섞인 끝에 나타난 것은 실로 대단했다.
“흐읍!”
스칼렛은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지르려던 것을 참아냈다.
성체처럼 보이는 저 건물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그림자 검술의 [투영]처럼 술자가 본인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나와의 차이점은 저 공간을 수백 년이 넘도록 유지했다는 것.
끼이이이익!
거대한 문이 열렸다.
성의 문 안에서 웬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묘한 기운을 나타내며 나타난 여인은 우리에게 성의 경계 안쪽에 서서 말을 걸었다.
“도전자라고 하셨습니까?”
여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마치 기다리던 장난감을 본 어린아이처럼, 그녀의 섬뜩한 미소에 스칼렛은 어깨를 떨었다.
나는 성의 경계에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옛 문서에서 라그나님의 이야기를 보고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하지만 어르신께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 남을 돕지 않으십니다.”
“그, 그런가요?”
나는 당황하는 척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정체 모를 여인은 살갑게 웃으며 경계 밖으로 발을 살짝 내밀었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젊은 호걸들의 재롱 잔치를 좋아하시거든요. 그보다 동료와 함께 오셨군요.”
“동료는 같이 들어가면 안 됩니까?”
나는 스칼렛을 바라보며 한 발자국 더 뒤로 갔다.
여인은 아예 성 밖으로 걸어 나오며 바짝 다가왔다.
[초감각]이 경고하는 섬뜩한 미소와 함께.
“아뇨, 오히려 동료가 있어야 시련에 도전하실 수 있습니다. 영웅에게는 응당 동료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다행이네요. 사실 여기 제가 가져온…….”
나는 품속으로 손을 넣었고, 여인이 목을 빼며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내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검 자루로 갔다.
촤악! 체액이 튀며 여인의 목과 육신이 분리되었다.
“루, 루카!”
스칼렛은 물론이고.
머리가 독립되어버린 여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흑도에 묻은 보라색 체액을 털어내며 말했다.
“스칼렛 준비해.”
나는 검을 거둬들였다.
어차피 상대는 싸워서 어떻게 해 볼 수준이 아니다.
나는 우선 경고를 해 놓고, [브리아 어]를 통해 둥지 안에 있을 상대에게 외쳤다.
“3000살도 넘게 먹은 놈이 어린 여자 사역마에 빙의해서 뭐 하는 짓이냐! 나이가 아깝다. 이 도마뱀 새끼야! 진짜 존나 쪽팔린다. 느그 동족은 이러는 거 아냐? 아! 전부 뒤져서 모르지?”
의도적인 도발이 성에 날아가 꽂혔다.
판게아의 드래곤도 여타의 게임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들과 비슷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놈들은 무지막지하게 강하고 또 한도 끝도 없이 감정에 충실하다.
구우우웅!
아니나 다를까.
라그나가 만들어 낸 고유의 차원이 공간을 울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붉은 벽돌들이 뜨거운 마그마처럼 변했다. 주변 대지가 이글거렸고 나는 스칼렛을 왼팔에 끼고서 오러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예상했던 대로 되긴 했네.’
우리가 화염 지대에서 벗어날 무렵.
그제야 스칼렛은 본인이 내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내 속도가 빨랐다는 소리다.
“이제 뭘 해야 할지 알겠지?”
“응. 루카, 어느 방향이야?”
나의 손가락은 동족을 가리켰다.
자유 연합과 평의회 연방은 남부 해협이라 불리는 좁은 바닷길을 사이에 두고 양분되어 있다.
우리는 저 화가 잔뜩 난 늙은 변태 드래곤을 이끌고 해협을 넘을 생각이다.
- 이 몸을 능멸한 죄를 죽음으로 갚아라!
붉은 화염.
아니, 그런 모양새를 갖춘 드래곤이 포효를 내질렀다.
스칼렛은 [에너지 분해]를 이용해 여파를 줄였으며, 나도 오러를 전개하며 포효에 담긴 기운을 막아 냈다.
샤아아아.
스칼렛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 육신에 힘이 깃들며 가뜩이나 빠른 속도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척하면 척. 그녀는 내가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었다.
“스칼렛, 딱 봐도 위험한 느낌이 들면 [공간 이동]을 사용해.”
“맡겨 둬.”
대화는 끝났다.
이 이상의 대화를 나눌 여력은 없었다.
화염의 드래곤, 인간으로 치면 장로급에 해당하는 라그나가 날개를 퍼덕이며 우리에게 달려왔으니까.
‘공격이 하나라도 적중하면 골로 간다.’
이름하여 죽음의 마라톤.
나는 창공에서 열기를 내뿜으며 쫓아오는 라그나를 보며 연방의 남부로 향했다.
* * *
날씨는 화창하고 그 흔한 구름이 한 점도 없다.
때때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화염구가 떨어지는 것 빼고는 아주 좋다.
그리고 지면에서 마그마가 솟아오르거나, 갑자기 공간이 왜곡되는 것도 좀 없었으면 좋겠는데.
콰앙!
느닷없이 정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분명 나에게 겁을 줘 다리를 멈추려는 수작이겠지.
하지만 그런 방식은 먹히지 않는다. 나는 오러와 신성력을 동시에 사용하며 방어막을 만들어 냈다.
지금은 텔런트 따위를 숨길 만큼 여유롭지 않으니까.
- 크르르르, 도망가는 꼴이 바퀴벌레를 보는 것 같구나.
하늘 위에서 분노에 찬 극찬이 들려왔다.
지금 마음껏 욕해 두셔! 나는 폴짝폴짝 뛰며 공격들을 전부 피해 냈다.
찌릿, 그러던 와중에 아까부터 열심히 울려대던 [초감각]이 나에게 절대적인 임종을 알렸다.
“스칼렛!”
나는 주변의 공기와 마나가 위쪽으로 흡수되는 걸 느끼고 소리쳤다.
슈욱, 순식간에 우리의 위치가 4km 정도 이동되었다.
스칼렛의 [공간 이동]이 펼쳐지며 찰나의 순간에 먼 거리를 뛰어넘은 것이다.
푸화아아악!
우리의 뒤쪽.
정확히 말하면 원래 우리가 서 있었던 일대가 불타올랐다.
원래는 황무지 그 자체였기에 불탈 게 없었지만, 드래곤의 브레스는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심지어 [그림자 장막]도 안 통하고.’
무명에 내장된 이 스킬은 대단히 뛰어나다.
오러를 많이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거의 무적에 가까운 효과를 발휘하니.
효과 시간 자체가 짧은 것만 뺀다면 정말 최고의 스킬이다.
다만 드래곤 브레스에게는 이 스킬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모, 모래가 불타올라!”
스칼렛은 여러 번 이 장면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라그나의 브레스는 모든 걸 불태운다. 공간 자체를 집어삼키는 것이기에 내가 어떤 방식을 쓰던 결과는 똑같다.
게다가 속도도 내가 드래곤보다 살짝 우위인 수준이니, 브레스를 속도로 피할 방법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순간 이동으로 도망치면 되지.’
단순히 브레스를 피하는 용도라면 로빈 공작보다 스칼렛이 더 좋다.
로빈의 순간 이동은 예비 과정이 필요하지만, 이 빨간색 머리는 그런 게 거의 필요 없다.
무엇보다 약 올리면서 도망가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잖아.
- 크아아아!
화나지? 열 받지?
도주 특화에 관련한 전문가가 무려 둘이나 된다.
우리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
나는 스칼렛이 준 강화 효과를 받으며 열심히 드래곤의 공격을 피해 냈다.
이윽고 우리의 앞에 시원한 물줄기가 펼쳐졌다.
“어떡해! 루카, 바다야!”
나 못 믿어?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바다로 몸을 날렸다.
내 발가락 끝이 물에 닿았다. 몸은 수면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고 나는 곧바로 반대쪽 발을 내밀었다.
물에 빠지기 전에 다음 발을 내밀면 수면 위를 달릴 수 있습니다. 참 쉽죠?
‘이제부터는 한숨 놓겠네.’
드래곤 브레스는 여전히 무섭다.
하지만 화염의 드래곤답게 라그나의 다른 기술들은 물 근처에서는 위력이 다소 떨어진다.
나와 스칼렛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 라그나의 기술들을 회피하며 평의회 연방으로 향했다.
위험하고 기상천외한 여행이 무르익던 무렵.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이냐.
하늘에 높이 뜬 라그나가 드디어 생각이라는 것을 했다.
그래, 좋은 질문이야.
내가 라그나를 동료로 받아들인 까닭은 이렇다.
저놈은 마족과 싸울 생각이 없으니까.
드래곤들은 차원 대전쟁 시절에 마족들과 싸웠다.
그 과정에서 모든 드래곤이 절멸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드래곤이 라그나였다.
라그나는 크게 실망하여 방구석 폐인이 되었으며 여태까지 분리된 차원 속에서 칩거하며 살아왔다.
그 덕분에 대악마가 침공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게임에서는 판게아가 개판이 되어도 끝까지 나서지 않았지. 뭐, 동족이 멸족한 마당에 싸울 이유는 못 느꼈겠지만.’
그러니 조금 거칠더라도 억지로 이끌어 줘야지.
나는 끊임없이 공격을 피하며 해협을 횡단했다.
그러던 사이, 저 멀리에서 점차 평의회 연방의 영토가 드러났다.
“땅 위에 검은색 구름이.”
스칼렛은 눈에서 빛을 뿜어내며 말을 흘렸다.
나도 보았다. 저 구름은 개가 전봇대에 오줌을 갈기는 것과 같다.
마족의 활동 구역임을 주장하는 일종의 영역 표시에 가깝다.
- 크르르르.
한동안 잠잠하던 라그나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공중에 멈춰 섰다.
저 검은색 구름 너머에서 본인과 비슷한 강자의 존재를 인지한 것이었다.
라그나는 분노를 곱씹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 오늘은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이미 늦었어.”
네가 보았는데, 부에르가 보지 못했을 리가 없잖아.
나는 뒷말을 삼키며 감각이 전해 주는 또 다른 위협을 느끼며 몸을 틀었다.
[오버 클럭], 나는 이미 스칼렛의 기술로 한 차례 강화된 몸에 더욱 힘을 실었다.
번쩍!
그 직후에 평의회 연방 쪽에서 시커먼 빛이 터졌다.
벌써 공간을 뛰어넘어서 여기까지 온 건가? 정말 성실하기도 하셔라.
나는 신성력과 오러를 최대한 전개하며 라그나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마법사로 치면 8위계에 해당하는 최강자들의 싸움이 시작될 참이었으니까.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이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