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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로 살아남기-84화 (84/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84화>

84. 킹 메이커 (1)

플록스는 빠르게 뒤로 몸을 날렸다.

잘려나간 팔은 단숨에 아물었고, 쌍검을 휘두르며 마기를 압축해 만든 검강 다발을 쏟아 냈다.

콰과과과! 칠흑색의 검강이 폭사하며 요새의 한 축이 무너져 내렸다.

“도대체 여기를 어떻게!”

플록스의 외침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들은 최근 2년 동안 본인들의 위치를 교묘히 숨겼다.

숭배자와 마족을 제국에 끊임없이 파견하면서도, 이 설원에 마족의 본대가 있으리라는 짐작은 못 하게 만들었다.

‘원래 그게 인생의 묘미지.’

나는 곧바로 [암적뢰]를 펼쳤다.

검붉은 섬광 속에 숨은 내 모습이 직선으로 튀어 나갔다.

직선으로 뻗은 번개는 하나가 아니었다.

가만히 서서 미끼의 임무를 수행한 펠리스도 나와 똑같은 기술을 펼쳤다.

‘아가씨, 작전대로 가시죠.’

나는 오러에 사념을 담아 펠리스에게 쏘아 보냈다.

나의 몫은 수불라, 펠리스의 몫은 플록스.

우리는 각자 하나씩 쌍둥이를 맡았다. 내가 지팡이를 든 소녀를 맡은 이유는 하나다.

제가 더 약하거든.

쩌엉!

수불라의 마기 방패와 내 참격이 만나며 굉음이 일어났다.

쌍둥이의 얼굴에 드러났던 당혹감이 사라졌다. 이제부터는 전면전.

나는 검붉은 안개를 뿜어내며 신형을 흔들었다.

‘이놈들은 개별적으로 상대하면 단델리온보다 약하지.’

수불라의 주특기는 흑마법.

그녀의 지팡이에서 마기가 터져 나오더니, 발밑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환영 활보], 수십 개의 환영이 나타나며 상대가 목표를 특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잠행술로 전신을 뒤덮으며 상대의 측면을 노렸다.

그림자 검술 3번, [달빛 베기]

무수히 많이 분열된 칼날이 짐승의 입처럼 쩍 벌어졌다.

이어서 길게 늘어난 검강이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슈와앙! 바람이 갈라지며 일대에 커다란 흉터를 만들었다.

‘수불라는?’

그 순간, [초감각]이 미래의 위협을 전했다.

나는 바로 고속으로 이동하며 자리를 떠났고, 내가 서 있던 지점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6위계 수준의 마법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산성비, 용암 지대, 번개 폭풍 등등.

높은 위계의 마법이 연달아 터지며 요새는 폐허 이상의 무언가로 변해 갔다.

‘감각에도 전혀 걸리지 않아. 이거는.’

카모플라쥬.

상대의 감각을 속여 자신의 존재감과 실체를 가리는 마법.

나는 주변을 살피며 난장판이 된 주위를 살폈다.

유일하게 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 새하얀 눈이 내려앉은 지역에 낯선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림자 검술 5번, [암적뢰]

내 몸이 순간 정지하더니 검붉은 벼락이 되어 해당 지점으로 쏘아졌다.

지점에 가까워질수록 감각이 악마의 존재감이 잡아냈다.

내가 지면에 떨어지는 순간.

“바보.”

비웃음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함정이네. 그녀는 내가 했던 방식을 응용해서 자신을 미끼로 만들었다.

우우웅! 허공과 발밑에서 막대한 마기의 기운이 느껴졌다.

주변에 수많은 흑마법진을 깔아놓고, 공간 자체에 카모플라쥬 마법을 적용한 것이었다.

‘이래서 여벌의 목숨이 중요하다니까.’

그림자 장막.

흑도에 마나를 흘려보내자, 검을 기준으로 내 신체가 연기로 변해 버렸다.

쾅! 콰과광! 수불라의 함정이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공간이 붉게 물들었다.

춤추듯 불타오르는 맹렬한 화염. 나는 그 속에서 감각이 잡아낸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림자 검술 4번, [그림자 난무]

조금 전의 기술에 비하면 약한 기술.

화염 속에서 발현된 검강 다발이 소녀 악마에게 향했다.

상대는 도망가거나 하지 않았다. 마기 방패를 전개하며 다음 마법을 준비할 뿐이었다.

[암적뢰]보다 관통력이 약한 기술이니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했겠지.

“허?”

그러던 수불라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검붉은 검강의 표면 아래에서 흘러나온 백색의 기운. 은은한 빛을 띤 검강이 폭풍이 되어 마기 방패를 찢어발겼다.

만약 수불라가 검강의 위력을 보고 방심하지 않았다면 안 통했을 터.

방심을 유도하고 간단히 상대를 무찌른 것이었다.

“끄아아악!”

악마의 비명.

방패가 소멸하고 그대로 검강에 노출된 악마의 몸이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하게 갈라졌다.

나는 온몸이 찢어진 채 바닥에 쓰러진 소녀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신성력은 마기와는 상극이다. 특히 ‘저항’의 효과가 추가된 신성력은 상대의 기운에 간단히 저항한다.

“크흐, 흐허억.”

수불라가 걸레짝이 된 몸을 일으키자 검은 기운이 줄줄 흘러나왔다.

광폭화를 통한 2페이즈는 없었다. 마기의 핵이 심각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융합한 기술의 위력이 강하다는 거지.

‘저쪽도 이제 거의 끝나가네.’

프록스의 쌍검술은 분명 대단한 수준이다. 괜히 악마는 아니니까.

하지만 펠리스의 실력은 그것을 가뿐히 상회해 버렸다.

나는 꾸물꾸물 바닥에 붙어 몸을 가누는 수불라에게 바짝 다가갔다.

“오라, 오라버니. 소녀는 이제 싸울 수 없습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나는 악마의 두 팔을 잘라냈다. 재생력이 사라진 육신은 더 이상 치유되지 않았다.

희생의 악마, 플록스와 수불라는 다른 악마에 비해 개별적인 능력은 조금 떨어진다.

대신에 아주 무서운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놈들은 동시에 죽여야 뒤탈이 없지.’

둘 중 하나가 먼저 죽어 버리면?

뭐긴 뭐야. 고생길이 훤히 열리는 거지.

‘어디 보자. 어차피 펠리스는 싸움에 끼어들면 화낼 거고. 응?’

생명의 불씨가 거의 꺼져 가는 악마의 몸에서 마기의 기운이 강하게 일어났다.

오호, 아예 핵을 폭발시켜 자살하시겠다? 진짜 맛있겠는데.

나는 잠행술을 펼치며 수불라의 지팡이와 핵에 손을 뻗었다.

슈우우우, 칠흑의 색을 담은 기운이 내 손으로 빨려 들어온다. 수불라는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안 돼. 안 돼.”

어허, 너무 쪼잔하게 그러지 마세요.

나는 상태창을 키고 마기가 증가하는 양을 보았다.

확실히 내가 흡수하는 기운은 상대가 가진 것의 50%를 넘지 않는다.

아니, 40%를 안 넘을지도 모른다.

‘효율은 조금 별로인가.’

수불라를 죽이지는 않았다.

적당히 마기를 빨아먹고 움직이지 못하게만 만들어 놓았다.

수불라가 마기의 통제력을 거의 잃었기에, 이렇게 살아 있는 상태에서도 기운을 흡수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전투의 폭음이 사라진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지가 전부 잘린 플록스를 끌고 오는 펠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즐거우셨나요?”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것이 신기하긴 했다. 나중에는 재생력이 점점 떨어져서 실망했지만.”

펠리스는 자기 위로를 끝내고 현자 타임이 온 사람처럼 무감정하게 말했다.

나도 전투 중이라 잘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미친 사람처럼 날뛰던 것 같았는데 말이야.

단주는 다 죽어 가는 소녀 악마의 위로, 몸통과 머리만 남은 플록스를 포개며 말했다.

“그래도 즐거웠다. 이번 여행은.”

정말 아군이어서 다행이야.

나는 두 악마와 펠리스를 번갈아 보았다.

혹시 저 사람도 막타를 원하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 때문이었다.

역시나 펠리스는 살짝 아쉬운 듯 두 악마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하나를 죽이고 다른 하나가 강해진 상태에서 또 싸우면 안 되겠나?”

물론, 우리의 단주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말 스릴 넘치게 사는 사람이야. 게임에서는 그러다가 죽었지만.

나는 고개를 격하게 흔들며 결사단주를 만류했다.

그러자 펠리스는 콧김을 후욱 내뿜으며 자리를 떠났다.

“알아서 처리해라.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아직 끝은 아니니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그런가?”

“네, 사라센 장로가 부탁한 디저트가 남았거든요.”

“네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기대하지.”

펠리스는 요상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선 나에게 둘을 맡겨두고 라시드의 접선지로 떠났다.

그림자 검술 6번, [투영]. 나는 주위에 오러로 된 장막을 퍼트리며 나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1000점을 넘길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나는 수불라에 이어, 플록스의 마기를 최대한 흡수했다.

마기를 너무 흡수하면 내가 마족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이런 고민도 해 봤으나 내 텔런트는 단순히 기운만을 뽑아냈다. 덕분에 마족의 미친 재생력도 가지지는 못하지만.

[특성: [소악마]의 효과가 제거되었습니다.]

[특성: [악마]이(가) 개방되었습니다.]

[[악마]의 효과로 효율이 50%만큼 추가로 증가합니다. 응축된 마기가 공간에 영향을 끼치며, 마기가 맹독성을 가집니다. 고위 마족이나 그에 준하는 영약의 효과를 받을 수 없습니다.]

최종적으로 마기의 능력치는 1042점.

거기에 더해 둘을 깔끔하게 끝내자, 상큼한 알림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스킬: [전투 달인]의 등급이 ‘C’가 되었습니다. 근력+1, 민첩+3, 체력+3]

[스킬: [한손검 달인]의 등급이 ‘E’가 되었습니다. 근력+1, 민첩+4, 체력+2]

펠리스와의 대련으로 무지막지하게 오른 패시브 스킬.

죽을 고비를 넘기며 구른 끝에, ‘달인’이 달리게 된 스킬들도 모처럼 등급이 상승했다.

* * *

카시안 군의 주둔지.

그 안은 여러 세력의 군대로 나뉘어 있었다.

하엔 백작의 군대와 카시안을 따르는 귀족들.

그리고 이번에 새로 합류한 판게아 신성회의 사제들도 함께였다.

다그닥! 다그닥!

중갑을 입은 채로 말에 탄 기사가 다급하게 주둔지를 가로질렀다.

기사의 말이 멈춘 곳은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막사.

육황자 카시안의 침소와 회의실을 겸하는 장소였다.

“황자 전하. 설원의 서쪽과 동쪽에 마족의 주둔지가 있다는 보고입니다.”

기사는 막사에 들어와 무릎을 꿇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상했던 내용이었기에 동요하거나 놀라는 자들은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마족의 선봉대와 일전을 치렀으니까.

“역시 전하의 총명함은 신성 제국 전체를 아우르십니다!”

“분명 레트 신께서 전하를 차기 황제 폐하로 생각하고 계신 게 분명합니다.”

신성회의 각 종파 사제들이 침이 마르도록 카시안을 칭찬했다.

최근에 신성회의 대사제들이 우후죽순 죽어 나가며, 신성회의 사제들은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그러던 무렵에 나타난 구세주, 마족 토벌로 유명한 카시안이 신성회에 손을 내밀었다.

“칭찬은 고맙게 받겠으나, 이제 시작이라는 걸 알아뒀으면 좋겠네.”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암, 그렇고 말고요.”

카시안의 정보를 토대로 마족 토벌군은 발스바르 설원으로 왔다.

여태까지는 카시안이 말한 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모두 그 정보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궁금해했지만, 육황자가 워낙 최고의 주가를 달리니 누구도 쉽게 질문을 하지 못했다.

작전 회의가 끝난 뒤.

카시안은 막사에 모인 귀족들과 사제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어서 내부에 있던 가신들과 병사, 하인들도 전부 막사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어딘가 초조하면서도 긴장감이 어린 표정으로.

‘이제 다 나갔네.’

나는 오러를 막사 주변에 둘러싸 기막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림자에 숨은 채로 사용하고 있던 잠행술을 해제하며 앞으로 나섰다.

카시안은 입을 떡 벌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엇! 언제부터 그곳에 있던 것인가!”

뭘 놀라고 그래.

나는 카시안에게 두 악마가 쓰던 전리품을 던지며 말했다.

지팡이와 쌍검. 마기를 모두 뽑아내니 장식품에 불과한 기물들이었다.

“악마들은 모두 해치웠습니다. 이곳도 성공하셨군요.”

“그렇네. 자네도 수고가 많았네.”

카시안은 테이블에 놓인 두 무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를 소집하고, 신성회에 손을 내밀고. 발스바르 설원으로 진격하고.

이 모든 일은 나의 조언에 따른 결과였다.

“저희도 덕분에 악마를 빠르게 처치할 수 있었습니다.”

“아닐세. 내가 황제에 오르면 반드시 사례하겠네. 결사단에게도, 그리고 자네에게도 개인적으로. 어떤가?”

이건 무슨 꼬드김이지?

카시안은 은근히 나의 배신을 바랬다.

아무래도 황제가 된 이후에 결사단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보험을 들어놓고 싶겠지.

준다면 굳이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응, 이미 넌 허수아비야.’

기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신성 제국.

이들은 양질의 오러 사용자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결사단 수중에 신성 제국이 들어온다면 큰 전력이 될 터.

‘무엇보다 카시안도 텔런트 보유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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