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83화 (83/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83화>

83. 엠파이어 오브 홀리 (4)

신성 제국에 한동안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판게아 신성회 소속의 대사제들이 하나둘씩 목숨을 잃는다.

그들은 모두 깔끔하게 살해당했고, 시체 근처에는 지독한 마기가 잔뜩 남아 있었다.

누구에게 죽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정도.

“이거 대사제가 당할 정도면, 이미 마족이 뿌리 깊게 침투한 거 아니야?”

“아니면 다른 황자가 마족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지.”

“에이, 설마.”

다리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던가.

신성 제국의 상인들은 실체가 존재하는 소문을 여기저기로 퍼다 날랐다.

총 네 명의 대사제가 살해당했다.

심지어 그들은 모두 이황자의 편을 자처했던 사람들.

이건 또 다른 정적이 마족의 손을 빌려 그들을 죽였다는 의미로 연결되었다.

“설마 이황자가 자기편을 죽였을 리는 없고.”

“그럼 육황자 카시안인가? 요새 최고로 유명해졌잖아.”

“이 사람아, 숭배자랑 마족을 때려잡으며 유명해진 사람이. 마족을 시켜 대사제를 암살해?”

“아, 그러면 다른 황자의 짓인 건가.”

상인들은 저마다 없는 정보를 쥐어짜며 대화를 나누었다.

아헨 백작령의 본성, 나와 펠리스는 그곳의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주변에서는 내 뜻대로 일이 풀리는 소리가 술술 들어왔다.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맛있다.”

“여행은 재밌으시고요?”

“재밌다.”

펠리스는 단답식으로 답하며 요리를 먹었다.

뭐, 최근에 노상에서 내가 만든 요리를 먹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요리 입문] C등급, 아쉽게도 성장에 바빠 요리 스킬은 숙련도를 올리지 못했다.

그래도 펠리스는 전부 다 먹었으니 먹을 만은 한 거겠지.

‘그에 반해 제일 중요한 신성력은 많이 모았지.’

857점.

신성력은 상당히 많이 모였다.

그로 인해 [성스러운 자]라는 특성이 생기기도 했다.

⬢[???]⬢

?? 완료: (오러(마나)/마기/신성력)

?? 미완료:(?/?)

> 진행도 효과: 은폐(전설), 파괴력 증가(영웅), 저항(영웅)

> 잔여 ??: 0

---------

더해서 신성력의 진행도 효과는 ‘저항’.

원래 이 힘은 방어적인 용도로 많이 사용되기에, 다른 모든 기운에 저항력을 갖추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신성력이 더 오를 줄 알았는데 말이야.

불만이 있다면, 다른 이의 기운을 흡수할수록 스탯이 오르는 수치가 점점 낮아지는 것 정도였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열심히 식사하던 우리에게 주방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식탁에 그릇을 올리며 쪽지 하나를 전했다.

저 사람도 결사단 소속이었나. 나는 제국을 돌아다니며 무수히 많은 그림자를 보았다.

확실히 이 정도면 제국의 권력자들이 공포에 떨 만하네.

‘자, 카시안의 접선 장소는 어디냐.’

지난 2달 동안.

우리는 우선 급한 대로 카시안에게 방해가 될 놈들은 전부 끝장냈다.

목숨이 아깝다면 신성회도 당분간 몸을 사릴 터.

우리는 그 틈에 몰아쳐야 한다.

“라시드 장로가 장소를 보내왔습니다.”

나는 주변을 의식하며 편지를 펼쳐 보았다.

애당초 남에게 들켜서 안 될 정보는 적혀 있지 않았다.

시간과 장소, 간단하게 적힌 정보를 읽고서 나는 종이를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식사부터 끝내고 천천히 움직이시죠.”

식사를 끝낸 뒤.

우리는 본성 뒷문에 있는 허름한 창고로 향했다.

그 앞에는 흑색 옷을 입은 라시드가 펠리스를 보며 무릎을 꿇었다.

“단주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다. 타지에서 그대가 고생이 많다고 들었다.”

펠리스는 라시드를 일으켜 세워줬다.

말수가 적은 사내는 나를 보면서도 살짝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라시드에게 인사를 건네며, 허름해 보이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녹슬고 낡은 경첩이 음산한 소리를 냈다.

촛불 하나조차 켜지지 않은 작은 창고, 꿉꿉한 냄새가 올라오는 곳에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가 있었다.

녹색 머리카락, 다부진 체형. 3번째 벽을 바라보는 오러.

나는 독수리의 것처럼 부리부리한 눈을 보며 말했다.

“카시안 황자 전하.”

나의 말을 듣고서 그는 공포심과 경계심이 반반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대가 결사단의 단주인가.”

“아닙니다, 여기 계신 분이 결사단의 단주이십니다.”

“펠리스다.”

카시안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크게 놀라워했다.

제국에서는 3번째 벽을 넘긴 무술가를 ‘오러 마스터’라고 부른다.

줄여서는 마스터, 이 제국에 그 정도의 실력을 지닌 사람은 2명이 전부였다.

“설마 결사단에 마스터가 2명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카시안은 심란한 감정을 내비쳤다.

듣기로는 온갖 방법을 사용해서 저 사람을 끌어들였다던데.

그 과정은 단순한 회유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 형태의 협박이나 공갈도 포함된 듯 보였다.

‘하긴 누가 이 음흉한 집단과 손을 잡으려 하겠어.’

역사에 기록된 것만 해도 수백 년.

결사단은 1000년은 아득히 뛰어넘는 세월 동안 존립해 왔다.

그에 맞춰 강제로 아군으로 포섭하는 노하우도 존재할 터.

이 시대의 당주가 광증에 걸린 미친 여자가 아니었다면, 더 무서운 조직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뭔가. 나는 당신들이 준 정보대로 마족을 토벌하느라 바쁘다네.”

카시안은 우리가 말이 없자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펠리스야 저 사람에게 관심이 없으니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은 금이라고, 저렇게 분위기만 잡아 줘도 나에게는 든든한 우군이다.

“황자 전하와의 동맹 요청은 저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니 저와 이야기하시지요.”

단주에게 꽂혀 있던 카시안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또한 내가 대화가 통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요새 소문은 들으셨습니까?”

“소문이라면. 형님을 지원하던 대사제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 말인가.”

“예, 그건 결사단에서 처리했습니다.”

“뭐라?”

카시안의 눈매가 좁아졌다.

신성회의 대사제를 넷이나 죽인 사람이 자신의 동맹이라니.

그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제국의 백성이 아닙니다. 신성회의 종교 또한 믿지 않죠.”

나는 카시안에게 우리의 존재를 재인식해 주었다.

놀라움에 물든 상대의 얼굴은 내 말에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후우, 그들을 죽인 이유야 잘 알겠네. 그럼 그들의 곁에서 발견된 마족의 기운은 무엇인가?”

“마기는 마족의 전유물이지만, 반드시 마족만 쓰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긴 그대들 중에 마족이 있지는 않았겠지. 이해했네.”

카시안은 권력을 원하는 사람답게 자질구레한 것들은 모두 이해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나는 마기뿐만 아니라 신성력도 다루는데?

어차피 판게아는 신에게 기도하면 기적이 자판기처럼 튀어나오는 동네다.

그러니 미국을 숭배한다고 만든 종교가 진짜로 신성력을 갖출 수 있는 거고.

“이해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어차피 의심의 화살은 다른 황자에게 향하겠지요.”

“……아마도 그렇겠지. 나는 마족들을 물리치며 명성을 쌓았으니.”

“그러니 이참에 뿌리를 박으심이 어떻겠습니까?”

“어떤 방식을 말하는 건지.”

카시안은 머리를 한족으로 살짝 기울였다.

고위 마족도 죽이고 숭배자들도 수없이 죽였다.

이 이상으로 뿌리를 박는다면.

“악마 토벌입니다. 다른 황자들이 당황하는 동안 엄청난 공적을 올리는 겁니다.”

“하지만! 악마가 어딨는지 알고?”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희생의 악마.

플록스와 수불라는 적당히 성실한 편이다.

로자리아와 단델리온의 중간. 혼자서 목표를 노리지도 않고, 부하들에게 일을 전부 맡기는 게으름뱅이도 아니다.

그들은 직접 숭배자와 마족의 군대를 다스리고 있다.

‘바로 신성 제국 안에서.’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게 맞지 않나.

나는 허무하게 떠난 단델리온을 생각하며 카시안에게 계획을 알려 주었다.

* * *

신성 제국 북부 변두리.

판게아 대륙에서 최북단에 있는 이 지역의 이름은 발스바르.

군대도, 마을도 없는 설원임에도 엄연히 제국의 영토에 편입된 지역이었다.

그 설원의 어딘가.

한때 군대의 주둔용으로 사용됐던 버려진 요새에서 생명체가 꿈틀거렸다.

쌍둥이 악마로 유명한 희생의 악마가 이끄는 마족의 군대였다.

그르르르, 한 마족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요새의 지휘관이 머무는 곳으로 갔다.

흔히 ‘놀’이라 부르는 하이에나의 외형에 이족보행이 가능한 마족이었다.

“주인이시여, 설원의 경계 부근에서 제국의 군대가 발견되었습니다.”

쿵, 3m에 필적하는 거대한 체구의 놀이 무릎을 꿇으며 다급한 상황을 설명했다.

장군의 것처럼 화려한 갑주를 입은 놀에게 보고를 받은 사람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인간의 군대라니? 그자들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오라버니, 어서 이리 와보세요.”

“나도 들었다. 그 숫자는 얼마나 되느냐?”

“1만이 조금 넘습니다. 신성회 소속의 사제들도 있다고 합니다.”

요새 안쪽에서 나온 소년과 소녀.

그들은 머리 길이와 옷의 형태만 다를 뿐, 완벽히 똑같은 외형을 취하고 있었다.

턱시도를 입은 소년이 ‘플록스’,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수불라’.

둘은 똑같은 자세로 골몰하더니, 이내 같은 답을 내놓았다.

“아마 우리의 존재를 알고 찾아왔겠지.”

“확실하죠.”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 이르지만, 어쩔 수 없어.”

“제 생각도 그래요, 오라버니.”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 같은 외형에, 행동마저 똑같으니 두 쌍둥이는 뭔가 오싹한 느낌을 주었다.

둘은 서로 다른 입으로 같은 명령을 내뱉었다.

“둠그레이, 그대는 요새의 병력을 이끌고 선봉대장으로 인간의 군대를 맞이하라.”

상대가 정확한 위치를 알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기는 조금 이르지만, 언젠가는 결전을 벌이게 될 운명이었다.

몇 달 전, 악마들에게는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시기를 앞당겨 대악마 부에르가 판게아에 강림한다는 정보였다.

“공격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최대한 들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오라버니.”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대악마의 원군을 기다리며 최대한 버텨 보는 수밖에.

무엇보다 두 악마는 본인들이 조직한 군대의 힘을 믿었다.

“명을 받드나이다.”

거대한 놀이 땅을 박차고 사족보행으로 요새를 뛰어나갔다.

그 뒤를 이어 요새에 주둔하던 수천의 놀들이 병장기를 이끌고 사라졌다.

쥐의 무리를 보는 것처럼, 신속하고 재빠른 기동력이 바로 그들의 장기였으니.

“수불라, 너는 설원 동쪽의 군대를 소집하거라.”

“플록스 오라버니는 설원 서쪽의 군대를 소집하세요.”

둘은 발스바르 설원 각지에 퍼진 마족의 군대를 결집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군대는 최소 인원을 빼고 모두 빠져나갔고, 요새의 내부는 차가운 바람과 하늘에서 내리는 눈으로 채워져 갔다.

두 악마도 요새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촤악.

요새 내부에 있던 놀들의 머리가 일시에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둘의 지점으로 검붉은 번개가 내리꽂혔다.

콰아앙! 섬광을 동반한 공격에 바닥이 무너지며 돌조각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바닥에 내리꽂힌 흑도의 사내가 둘의 시야에 잡혔다.

하지만 사내의 존재감이 스르륵 사라지더니, 요새의 내부가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기습이다.”

“적습이에요.”

플록스의 손에는 투박한 쌍검이 생겨났다.

반면에 수불라의 손에는 화려한 장식이 달린 검은색 지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은 요새를 정리한 두 인영의 존재감을 느끼고 서로 등을 맞댔다.

“적은 둘이다.”

“만만한 적은 아니에요.”

둘은 시야를 비롯한 모든 감각을 공유한다.

서로 180도를 나누어 감각을 집중하면 어떠한 적의 공격에도 대비할 수 있었다.

뽀드득, 뽀드득. 긴장감이 한창 무르익던 와중에 눈을 밟으며 걷는 소리가 두 악마에게 들렸다.

“여자?”

플록스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흑발에 황금색 눈동자. 그는 기운이 철저히 감춰진 여인을 보며 단번에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림자였군. 너희들이…….”

쉬익.

그의 말문이 열리는 순간, 플록스가 여인에게 집중하며 생긴 사각지대에서 칼날이 날아들었다.

플록스의 팔이 반쯤 잘리며 붉은 혈액이 새하얀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윽!”

그는 찰나의 틈에 가까이 다가온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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