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82화>
82. 엠파이어 오브 홀리 (3)
훈련의 성과는 만족스러웠다.
[??]을 C등급까지 올렸고, 당당히 잔여 횟수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아까운 점은 횟수가 2개가 아니라는 점.
혈정과 신성력을 동시에 흡수할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그건 힘들었어.’
나는 알타이르 산맥에서 마나가 기묘하게 꺾이는 지형을 찾아냈다.
그곳에 그림자들의 표식을 갖다 대니, 숨겨진 지형이 드러나며 성역의 봉우리로 향하는 길이 보였다.
찌릿.
[초감각]이 위협적인 무언가를 경고했다.
의도적인 내는 살기와는 거리가 멀었고, 마치 본인도 모르게 내뿜는 그런 종류의 기운이었다.
설마 또 한판 뜨려고 오는 건가.
‘이제는 그냥 안 당해.’
나는 옆구리에 착용한 흑도를 의식하며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와라, 내가 죽더라도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길 테니.
실제로 죽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런 의지를 다지지 않는다면 그 상대와 대적하기 힘들었다.
“왔느냐.”
뿌연 안개 같은 공간을 지나 안으로 들어오니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오늘은 냅다 칼부터 뽑진 않네?
나는 눈앞의 여인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귀환이라. 듣기 좋은 말이구나. 그 편지는 받았다. 말리크가 전해 주더구나.”
“예, 이번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말리크 장로는 어디 있습니까?”
“당분간 요양이 필요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그 사람 딱히 다치지도 않았는데. 무슨 요양이 필요하다는 거지.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뒤에서 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따라온 아신이 말을 해줬다.
“말리크 장로님은 단주님이랑 대련을 했습니다.”
“어쩌다 그런.”
“그게, 편지를 받으신 단주님이 워낙 기뻐하셔서 그만.”
아신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정말 웃긴 이야기네요! 나는 단델리온을 쉽게 죽이며 떨어진 긴장감을 한층 더 끌어 올렸다.
펠리스는 잠시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무언가 기억이 났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말리크는 기뻐했다. 나에게 한 수 배웠다며 웃었으니. 기분이 좋았다는 거겠지.”
“요즘은 뜸했는데, 그 사람도 제정신은 아니었죠.”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성역의 봉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사라센 장로가 있는 비둘기 탑, 내가 내부로 들어서자 나이 많은 장로가 후다닥 달려왔다.
“단주님, 그리고 구도자님. 때맞춰 오시는군요. 마침 신성 제국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이번에도 카시안 황자가 우리의 정보로 숭배자들을 토벌했답니다.”
“의도대로 착실히 기반을 만들고 있군요.”
나는 그동안 카시안과 공조한 자료들을 둘러보았다.
결사단은 예정대로 육황자인 카시안에게 접근했다.
어차피 황자로 태어난 순간부터 선택지는 두 개밖에 없다.
평생을 바보인 척 연기하면서 살던가, 아니면 모두를 무릎 꿇리고 황제에 오르던가.
그런 차에 결사단이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어찌 잡지 않을 수 있을까.
‘카시안은 황제가 되기를 선택했지. 그게 흐름이기도 하고.’
둘의 동맹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여태까지 결사단은 내 정보를 토대로 마족들의 은신처를 카시안에게 알려 주었다.
더불어 경쟁자의 약점을 말해 주거나, 세간에 소문을 퍼트려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일황자의 일이 대표적이다.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일황자는 권력 구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사라센은 비둘기 탑 한곳에 마련해 둔 칠판 앞에 섰다.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일황자. 그는 트리어 후작가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존재임이 드러나고 마법을 통해 유전 관계를 확인하였다.
지금은 황자라는 이름을 잃고 감옥에 갇혀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트리어 후작가와 왕비는 진즉에 경쟁 파벌에 숙청당했고.
“삼황자의 마인즈 후작가는 오랫동안 저질러 온 탈세 행위가 발각되어 배상금으로 영지 재정에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삼황자는 지지기반을 잃고 거의 무늬만 남은 상태입니다.”
“잘하셨습니다. 결사단의 정보력은 정말 대단하군요.”
“전부 구도자님의 견해 덕분입니다. 저희는 물증을 찾아냈을 뿐입니다.”
대략 1년 하고도 반년.
그 세월 동안 사라센은 신성 제국의 유력한 황제 후보 둘을 밀어냈다.
이제 황제의 권좌는 무주공산. 잘난 놈들이 나가떨어지니 손가락이나 빨던 놈들의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 것이다.
이황자, 사황자, 오황자, 육황자, 칠황자.
이제 권좌에 도전해 볼 세력은 이렇게 다섯이 남았다.
이들은 모두 백작가의 핏줄을 달고 태어난 자들이었다.
여기서 나라가 찢어지거나 내전으로 확산해, 치고받고 싸우면 개판이 되는 거지.
사라센은 다섯 황자의 위치를 설명했다.
“다른 황자들은 뚜렷한 움직임이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신성회의 일부 대사제들이 이황자의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나의 목표.
판게아 신성회는 이황자를 선택했다.
워낙 종교와 관련해 엄격한 지역에서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참, 평의회 연방은요?”
“거기는 쉽지 않습니다. 신성 제국 이상으로 폐쇄된 곳이니까요. 그래도 어느 정도의 정보는 수집할 수 있습니다.”
“좋네요. 단주님?”
나는 옆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펠리스를 불렀다.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해 준 사람, 나에게 전폭적인 힘을 실어 준 사람의 인가가 필요했다.
“무슨 일이지?”
“이번에 신성 제국으로 여행가실 생각이 없으신가 해서요.”
“흐읍!”
뒤에 서 있던 아신이 호흡을 과하게 집어삼켰다.
펠리스는 빤히 나를 보다가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재밌을까?”
“장담하겠습니다. 복수와 암살이 재미없을 리가 없죠.”
펠리스는 내가 살짝 왜곡한 검귀의 이야기를 전부 믿었다.
그리하여 결사단과 단주에게 이제 검귀의 원수는 마족이 되었다.
내 말을 들은 아신은 뭔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지었지만, 펠리스는 그 반대였다.
“좋은 생각이다. 당장 출발하도록 하지.”
* * *
신성 제국.
수십 개의 귀족 영지와 황실 직할령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의 환경이 완벽하다.
사람이 살기 힘든 사막, 황무지, 화산 등의 지형은 거의 없다.
광물이 풍부하다 못해 썩어나고, 매년 삼모작을 할 정도로 옥토가 비옥하다.
‘최북단을 제외하면 사시사철 기후도 온화하지. 국토도 거의 평야고.’
진짜 무역 연합은 부동산 사기를 당한 게 아닐까.
나는 길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불편하지 않으냐.”
옆쪽에서 펠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결사단주는 무역용 마차의 마부석에 나란히 앉았다.
결사단은 보통 상인으로 위장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번에도 그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저야 여행에는 이골이 났으니까요. 단주님은 괜찮습니까?”
“아가씨.”
“예?”
“아가씨라 불러 줬으면 좋겠는데.”
“아, 네. 아가씨.”
“나는 괜찮다. 인내가 이어질수록 재미는 더해지니까.”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사라센과 아신은 이 여행을 반대했다.
단주의 광증 때문에 일을 그르칠까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만 보아도, 그 걱정은 단순한 기우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한다.
‘잘 참고 있네.’
나는 게임에서 펠리스가 어떤 미친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결사단과 본인의 목숨까지도 내던져가며 복수를 달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펠리스는 쾌락을 위해 참을 줄 아는 착한 아이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상단 행렬을 지휘하던 상인이 다가와 마차에 올라탔다.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단주님. 상단에 섞여 가는 것은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괜찮다. 검문은 어떻게 통과하면 되지?”
“이 금속패가 여기에서는 신분증으로 쓰입니다. 하나씩 드리겠습니다.”
나는 상인으로 위장한 그림자가 건네준 금속판을 받았다.
신성 제국에서 흔히 쓰이는 [브리아 어]로 쓰인 신분증이었다.
펠리스도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 신분패를 주머니에 넣었다.
“저희가 설명을 해놓을 테니, 직접 나서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그림자는 우리가 타고 있던 마차에서 내려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상단 행렬이 향하는 방향, 나는 고개를 들어 서서히 나타나는 거대한 성벽을 보았다.
신성 제국은 차원 대전쟁 이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온 판게아 원주민의 나라다.
“드레스덴 본성이다!”
누군가 성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상단 행렬에는 일반인도 있다. 오랜 상행의 분기점이 될 대도시에 도착했으니 기뻐할 수밖에.
히히힝, 나는 앞쪽에 있던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자 고삐를 죄며 천천히 속도를 낮췄다.
“경비병이 까칠해도 죽이면 안 됩니다.”
나는 장난기를 살짝 실으며 그리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광년이는 내 생각보다도 더 대단했다.
“역시, 죽이면 안 되는 거였나.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잠입이니.”
진중한 얼굴로 말하니 더 섬뜩하네.
나는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역시 운전할 때는 다른 곳에 한눈을 팔면 안 되지.
그림자의 말대로, 문을 지키는 경비병은 군말 없이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외성에 있는 평범한 시장 거리, 그곳에 있는 상점으로 들어가자 그림자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코플루 대사제는 오늘 드레스덴의 사가에 머물 계획입니다. 사가는 신전보다 경비의 숫자가 적으니, 지금이 가장 유효합니다.”
“수고했다. 그대의 노고가 우리를 더욱 깊고 짙게 만들 것이다.”
펠리스는 그림자의 말을 듣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림자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결사단원은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교육과 고통을 버텨 냈다.
그건 장로나 단주도 같다.
‘하나의 신념.’
이들은 어둠에 깊게 물들겠다는 신념을 정신에 세뇌된 상태에서 자라났다.
이러니 그들에게는 물질적인 것은 의미가 없다.
오직 정점에 있는 결사단주의 치하만이 그들의 노력에 상응하는 보상이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펠리스는 그림자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나를 보았다.
나는 압축 주머니에 든 흑도를 의식하며 답했다.
“기회가 왔다면 해야죠.”
‘판게아 신성회’는 신성 제국에 존재하는 여러 종교가 힘을 합한 단체이다.
처음에는 지구와 마족의 침략에 대항해 결성되었지만, 이후에는 신성 제국의 정치에 개입하는 형태로 변질하였다.
코플루 대사제는 이황자가 황제가 되기를 바란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한 대사제 중의 하나다.
시간이 흐른 어두운 밤.
나와 펠리스는 [그림자 잠행술]을 펼치며 저택의 담을 넘었다.
저택의 사제들이나 경비병들은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빠르게 그림자에 녹아들어 이동한 끝에, 우리는 코플루 대사제의 방까지 피를 흘리지 않고 도착했다.
“드레스덴 백작은?”
안에서는 코플루와 다른 사제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저 두 사제는 신성회 소속의 ‘듀상 종파’로, 판게아 인의 순혈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실제로 저들은 신성력으로 사람들의 유전 정보를 조사해, 지구인의 피가 흐르는 주민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도 거행하곤 했다.
“내일 아침에 찾아뵙겠다고 하셨습니다.”
“게으른 돼지 같은 놈. 누구 덕분에 영지가 발전했는지도 모르는군. 너는 여자들이나 데려오거라.”
“예, 대사제님.”
젊은 사제는 고개를 조아리고서 방을 나갔다.
나와 펠리스는 그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 아니라, 암살은 정확히 상대를 조용히 죽이는 거니까.
사제가 방을 나가고 대사제가 홀로 남았을 때.
‘시작하시죠.’
내가 오러에 사념을 섞어 펠리스에게 보냈다.
그러자 단주의 검이 어둠에서 빠져나왔다.
흔들리는 촛불, 그 자그마한 불빛에 길게 늘어난 사복검의 그림자가 비쳤다.
쉬리릭. 촤악!
방과 복도의 촛불이 일거에 꺼지며 뭔가가 절단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바로 방 안으로 진입하며, 바닥에 떨어지는 대사제의 몸과 머리를 받아 냈다.
깔끔한 솜씨였다.
‘이제 이걸 어떻게 마족의 일로 꾸미지?’
‘제 압축 주머니에 물건이 있습니다. 아가씨는 먼저 빠져나가서 동태를 살펴 주세요.’
‘알았다.’
펠리스는 나에게 뒷일을 맡기고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우선 손에서 마기를 뽑아냈다. 소름이 끼치도록 흉악한 칠흑의 기운이 대사제의 방에 구석구석 흩어졌다.
누가 봐도 마족의 짓처럼 보이도록.
‘그리고.’
나는 분리된 대사제의 머리와 몸에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