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81화 (81/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81화>

81. 엠파이어 오브 홀리 (2)

50번 개척지의 아침이 밝았다.

한가하게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대야에 담긴 물로 간단히 씻고 옷을 입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여관의 1층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루카! 일어났어?”

먼저 스칼렛이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는 재벌 아가씨의 경호를 위해 남은 페도르 사장과 PMC의 직원 몇몇이 조용히 인사했다.

말리크와 그림자들도 구석진 자리에서 식사를 나누는 모습이다.

아, 그 근처에 로빈 공작도 있긴 했다.

“다들 오늘 떠나는 거였나요?”

“응, 나도 일단은 세컨드 시티로 돌아가야 해.”

스칼렛은 록펠스 그룹 차원에서 브랜드 모델처럼 사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새로운 영웅을 알리는 특집 기사가 준비 중이었고, 당분간 여러 인터뷰나 기자 회견 등의 일정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나는 테이블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겠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너는 어디 갈 데가 있어?”

“응, 신성 제국.”

내 대답에 반응한 사람은 페도르 사장이었다.

그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식기를 내려놓았다.

“제 스승이 그쪽 사람인데, 그쪽은 황무지 사람을 병적으로 싫어한다고 들었습니다.”

“예, 저도 그 말은 들었습니다.”

신성 제국은 판게아 근본주의자들의 땅이다.

만약 지구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이 그들의 땅으로 들어온다면?

최소한 추방, 최대는 사형.

특히 지구의 침략자인 미합중국의 재림을 고대하는 리버티 교단이나, 무역 연합의 출신을 상당히 싫어한다.

“정말 그런 곳으로 갈 거야?”

스칼렛이 걱정되는 투로 말했다.

뭐, 해결사 표식과 마공학 리볼버를 들고서 돌아다니면 확실히 위험하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해결사이자 핑거톤의 일원이 아니다.

“저기 있는 분들이랑 갈 생각입니다.”

나는 말리크와 그림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결사단은 판게아의 역사에서 꾸준히 암약한 단체.

오히려 저 음흉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제국에서는 황무지인보다 좋은 취급을 받는다.

“페도르 사장님, 괜찮을까요?”

“제국에서 이곳으로 온 제 스승님은 그곳이 매우 폐쇄적인 지역이라 하셨습니다. 뭐, 그래도 루카 씨처럼 강인한 분이라면 상관없을 겁니다.”

페도르는 나의 경지를 유추하며 스칼렛을 안심시켰다.

“거기서 오래 있을 생각은 없어. 금방 일을 끝내고 한자 동맹으로 갈 거야.”

“한자 동맹이면. 잠깐! 말하지 말아 봐. 나 어디 있는지 알아.”

스칼렛은 손바닥을 보이며 나를 제지한 뒤에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몇 초가 흐른 후,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피워 올리며 말했다.

“신성 제국 밑에 붙은 지역이지? 판게아 동부의 중앙 지역에 있고.”

“잘 아네. 이제 완전 똑순이야.”

“히히히.”

나는 손을 뻗어서 스칼렛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뭐지, 손이 저절로 나가네. 나는 스칼렛의 머리를 만진 손바닥을 보았다.

지금의 행동은 사실 루카의 의지에 가까웠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루카는 스칼렛을 좋아했다.

‘게임에서는 안 나온 내용이라 더 열 받네.’

개발자 놈들은 이런 중요한 내용도 설정에 안 넣어 놓고 뭐한 거야.

우리는 식사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로빈, 그리고 말리크는 일단 시타델로 갈 계획이었으니 스칼렛과는 여기서 작별이었다.

50번 개척지의 대로변으로 나오니 록펠스 측에서 준비한 마차가 보였다.

“나도 일을 끝내고 한자 동맹으로 가도 되지?”

“물론이지. 아마 클리프도 자연스럽게 거기로 올 거야.”

“왜?”

“클리프랑 같이 있던 엘프가 한자 동맹 출신이거든.”

한자 동맹의 중심.

그곳에는 시리엘의 고향인 대수림 ‘이르민술’이 있다.

대수림의 중심에는 거대하게 솟아난 세계수가 있고, 클리프는 그 나무의 선택을 받은 구원자니까.

머지않아 시리엘과 클리프는 신탁을 받고 한자 동맹으로 향할 터였다.

고양이 수인의 고향도 한자 동맹에 있기도 하고.

‘거기서 또 엄청나게 성장하겠지.’

부러운 놈.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스칼렛은 더 이상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과거의 트라우마는 이제 옛 추억으로 남았다.

적발의 여인은 마차에 오르며 나를 꼭 껴안았다.

“다음에 다시 보자.”

“그래, 몸 성히 있어.”

마차가 먼지를 날리며 떠난 뒤.

나는 공작의 말을 따라 그가 미리 그려놓은 마법진으로 갔다.

집에 빨리 가고 싶었던 로빈은 그새 준비를 모두 끝내 놓았다.

화아아악!

빛이 터졌다.

내 몸이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구토가 올라올 즈음.

“집이다!”

유아로 퇴행한 로빈 공작이 기쁜 표정으로 소리쳤다.

시타델의 수도 근처에 있는 작은 성, 로빈은 미리 본인의 성에 좌표를 지정해 놓았었다.

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작은 정원과 함께 성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족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나는 기뻐하는 공작을 뒤따라 나오며 물었다.

로빈 공작은 근신 명령을 끝내고 몇 개월 전에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는 듣지 못했다.

“자식들은 이미 결혼했고, 아내는 나를 어색해하더군.”

“아, 음. 안타까운 일이군요.”

뭐야, 이 배드 엔딩은.

하기야 30년 동안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자 아버지가 돌아오니 가족들도 당혹스럽겠지.

내가 조용히 로빈 공작을 위로하려 할 때.

“근데 몸이 젊어서 그런지. 아내가 밤에는 좋아한다네.”

배드가 아니라 베드 엔딩이잖아.

나는 슬며시 손을 내렸다. 마침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력의 움직임을 느끼고 올라온 이들은 마법사들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보, 이제 오셨나요?”

“오오, 리브. 내가 혹시 그대를 놀라게 했소?”

“아니에요. 그런데 같이 오신 분들은 누구신가요.”

“이번에 나를 도와 악마를 토벌한 이들이오. 이 친구는 나를 보고에서 꺼내준 나의 은인이고.”

로빈의 아내는 3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실제로는 40대 후반이지만, 역시 시타델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다!

나는 공손히 인사를 건네며 로빈 공작에게 말했다.

“어머나. 이를 어째, 은인을 맞을 준비가 하나도 안 되었는데.”

“아닙니다. 로빈 공작 전하의 용맹함 덕분에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공작 부인.”

가장의 자존심 정도는 지켜 줄게.

나는 공작 부인의 손에 입을 맞추며 슬며시 로빈을 쳐다보았다.

어색하다 더니만 금실이 좋잖아. 이러니 집으로 계속 돌아가고 싶었겠지.

로빈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리 말해 줘서 고맙네. 여왕 폐하께는 내가 따로 보고하도록 할 테니 그대들은 당분간 푹 쉬게.”

“그래요. 적어도 오늘 하루는 성에서 머무세요.”

둘의 제안을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정체불명의 스킬 숙련도를 올려야 했고, 가능한 한 신속하게 신성 제국으로 가야 했으니.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희가 갈 길이 멉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나중에라도 꼭 들려주세요. 제가 준비를 하지 않아서 ”

“예, 알겠습니다.”

나와 말리크는 대화를 마치고 서둘러 성에서 나왔다.

성에서 받은 말을 타고 알타이르 산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인적이 드문 평야에 도착하자, 나는 말을 멈추고 말리크에게 말했다.

“성역에는 먼저 가세요. 잠시 들릴 데가 있습니다.”

“저희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한 일주일 정도요.”

말리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기와 오러를 사용하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따라와서 되겠는가.

말리크와 그림자들은 떠나보내고 나는 주변의 지형을 보고 어딘가로 향했다.

‘조용히 수련할 장소가 여기 근처에 있었는데.’

시타델.

마법의 왕국에는 당연히 여러 서브 퀘스트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탈주한 마탑의 조교를 추격하는 임무나, 범죄자 마법사를 소탕하는 임무처럼 말이다.

그런 와중에 플레이어는 많은 던전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던전은 동굴에 많지.’

말을 타고 도착한 곳은 한적한 시골 마을의 뒷산이었다.

보통 마법사들의 비밀 연구소는 아무것도 아닌 곳들에 있거든.

평범해 보이는 절벽 아래. 나는 흑도를 꺼내서 절벽 전체를 아우르는 강력한 검강을 날렸다.

촤앙!

절벽이 깔끔하게 베이며 순간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생겼다.

원래 이곳은 동굴의 입구다. 하지만 몇 년 전에 마탑에서 석사 과정 중이던 학생이 도망쳐 던전을 만들었다.

본인을 괴롭힌 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를 갈았다나 뭐라나.

저벅, 저벅.

나는 먼지가 가라앉으며 드러난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아무튼, 이 안에는 수많은 키메라와 마법 생명체가 있다.

심지어 주인은 예전에 죽고 없어졌다.

‘바로 반겨주네.’

동굴 안쪽에서 십수 개의 안광이 번쩍였다.

그르르, 낮고 음울한 소리를 내며 기어 나오는 수십 마리의 괴물.

온몸에 마법 술식이 그려진 늑대 키메라였다.

후웅.

나는 바람처럼 변하며 검을 휘둘렀다.

오러홀과 그 속에 깃든 마기, 두 기운은 소용돌이를 그리듯 회전하며 칼날을 휘감았다.

검강이 몇 차례 늑대들에게 쏘아졌고.

“깽!” “깨갱!”

키메라들은 단말마를 내며 동시에 쓰러졌다.

전력 차이는 압도적이다. 애초에 그런 곳을 골라서 왔으니까.

[??]라고 적힌 스킬은 두 기운을 동시에 사용할 때 숙련도가 올랐고, 기본적으로 스킬 숙련도는 실전에서 많이 오른다.

F등급 11%

다행히 숙련도는 만족할 정도로 오른다.

유일 등급의 스킬은 숙련도의 끝도 저마다 다르다.

클리프의 경우에는 S등급, 스칼렛은 SSS등급이 끝이다.

‘나는 어디가 끝일지. 그리고 잔여 ??는 언제 오를지 모르겠네.’

나는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물을 밟으며 앞으로 나갔다.

이 주변에는 키메라들이 가득 포장된 던전들이 꽤 많다.

최대한 던전을 돌다 보면 숙련도가 오를 터.

‘시간을 단축하려면, 한동안 잠은 못 자겠네.’

* * *

그림자 성역.

결사단의 본부로 오랫동안 쓰인 적막한 공간의 최하층.

오직 펠리스의 훈련장으로 사용되는 칼과 독의 지옥으로 누군가 발걸음을 옮겼다.

“아신, 무슨 일이야.”

빛 한점 들어오지 않은 암흑 저편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게 식은 목소리와 함께 황금색 눈동자만이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주술사 장로 아신은 짐승의 것을 닮은 흉악한 살기에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오셨습니다.”

휘잉, 지하에 순간 바람이 불었다.

아신이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뜨니, 눈이 찢어지도록 크게 뜬 펠리스가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왔구나.”

“네.”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나를 즐겁게 만들어 줄까?”

펠리스는 머리를 두 손으로 벅벅 긁었다.

아신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여인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검술과 연공법. 오직 두 가지만을 위해 자라왔고, 결국에는 스승이자 아버지의 질투까지 사게 된 불쌍한 영혼이었다.

‘조금만 온정을 느끼셨다면, 조금은 다르셨을까.’

결사단의 일원은 단주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없다.

단주는 결사단을 이끌 살아 있는 신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외부에서 굴러온 돌이라면?

‘요즘에는 미쳐 날뛰는 일도 줄어드셨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펠리스를 보며 아신은 애잔한 미소를 지었다.

띵! 산맥의 줄기와 연결된 주술사의 감각에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셨네요. 신성 제국의 일도 있으니, 가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보시는 건 어떠세요?”

“음, 좋은 생각이야. 만나자마자 검을 쓰니 나중에는 막 도망가더라고.”

“그쵸, 검보다는 말이…… 더 좋은 대화 수단이니까요.”

아, 사라졌네.

아신은 금세 사라진 펠리스를 찾아 계단을 올라갔다.

봉우리에서 나와 성역의 입구를 보니, 이제 막 안으로 들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둘이 오붓하게 여행이라도 다녀오시면 좋겠는데.”

사람 죽이러 다니는 살인 여행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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