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73화 (73/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73화>

73. 폭풍 속으로 (1)

“여기가 퍼스트 시티구나. 다!”

고양이 수인 베리가 큰 소리를 내며 정거장에서 내렸다.

그 뒤로 시리엘과 클리프도 기차에서 내리며 퍼스트 시티의 눅눅한 공기를 마셨다.

“공장이 많은 도시라 그런지 저는 조금 거북하네요.”

“괜찮습니까? 정령사는 주변 자연에 영향을 많이 받는 다면서요.”

“네, 버틸만해요. 약간 어지러운 수준이니까요. 그보다 구원자님의 친구분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정말 기대되요!”

여태까지 클리프가 활동한 내용은 대부분 루카의 편지에서 비롯되었다.

시리엘은 루카가 어느 신의 사도나, 예언가 정도로 여겼다.

본인도 세계수의 대리인이니 궁금한 점이 많은 모양이었다.

“약속보다 2주 정도 빠르게 도착하긴 했는데, 직접 대화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얼마나 얄미운 녀석인지.

클리프는 뒷말을 삼키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곧 있으면 만날 수 있겠지. 클리프는 2년 만에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파이브 포인트.

클리프는 두 동료를 데리고 본인이 자라난 장소로 향했다.

도시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부자와 빈민이 철저하게 나뉘어 있었고, 그중에서도 작은 섬 하나는 더욱 단절되었다.

“정말 황량하다.”

파이브 포인트에 들어선 베리가 그리 말했다.

적당한 감상평이 아닐까. 클리프는 거의 변함이 없는 빈민가 거리를 거닐며 사색에 빠졌다.

이제는 치이고 밟히던 빈민가 소년이 아니다.

레드넥을 소탕하며 정부군, 수사국과 협력하는 소위 ‘영웅’이 되었다.

‘근데 원래 이렇게 적막했었나.’

클리프는 조금씩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원래도 그리 유쾌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파이브 포인트는 거의 버려진 마을과 같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인기척이…….”

찌릿, 무어라 말하려던 클리프의 감각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은밀한, 음험하면서도 살기를 가지지 않은 기운이었다.

- 그림자다.

검성의 말과 함께 클리프는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검은색 복장을 입은 검객이 다섯이나 서 있었다.

분명 조금 전에 걸어왔던 길, 눈 깜짝할 사이에 접근한 검객들을 보며 클리프는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혹시 루카님의 친구이자, 검성 폰테베드라 허멘 부르고스의 제자가 맞으십니까?”

그림자는 정중하게 물었다.

그 일반적인 상황에 클리프는 오히려 놀랐다.

저자들과 본인의 스승은 엄청난 악연으로 얽혀 있으니까.

“그렇습니다만.”

“저희는 루카 구도자님의 명령을 받고 서신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부디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림자는 그러면서 시리엘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응? 왜 나에게 준다면서 저쪽으로 건네는 거지.

클리프는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그게 거기로 갑니까.”

“클리프님께서는 글자를 읽지 못하신다고 하셔서 그랬습니다.”

그림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말에 지금까지 품었던 경계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저들에게선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본인이 문자를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

“이제는 읽을 줄 압니다!”

“아, 네! 그러시군요. 여기 있습니다.”

분노가 담긴 일갈에 그림자는 낼름 편지를 넘겼다.

신경질적으로 편지를 받아든 클리프는 편지를 읽으며 더욱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이건 루카가 보낸 편지가 확실해요.’

-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

악마가 공격하려고 해. 나와 네가 수련했던 언덕으로 와.

편지의 앞 문장만 읽어도 알 수 있었다. 루카와 클리프가 함께 수련했던 공간은 언덕이었다.

50번 개척지의 언덕.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루카가 유일할 터.

“지금 당장 움직여야겠어요.”

클리프는 베리와 시리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 * *

세컨드 시티의 어느 병원.

록펠스 그룹에서 운영하는 종합 병원의 VVIP 병실 앞에는 많은 사람이 모였다.

기자들, 그룹의 계열사 임원들, 무역 연합의 권력가들.

그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방 내부의 상황을 기다렸다.

“근데 왜 전부 검은 옷을 입은 거지?”

마공학 카메라를 든 기자가 주위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회장님의 부탁이었다나 봐. 본인이 돌아가시면 장례식을 치르고 빨리 생활로 복귀하라는 뜻이라더군.”

동료 기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본인의 죽음조차도 이토록 냉담하게 받아들이다니.

냉혈한으로 유명했던 록펠스 그룹 회장은 그의 인생처럼 차갑게 떠나갈 모양이었다.

같은 시각, 방안의 내부에는 오직 록펠스 가문의 혈족만이 있었다.

“다들 차례대로 하나씩 오거라.”

제프는 병석에 누워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의 뜻대로 록펠스 일가의 사람들이 하나씩 그의 침대로 다가갔다.

평소에 냉혈 인간처럼 차가웠던 그였지만, 마지막은 마지막인지라 다소 따뜻한 대화가 오갔다.

시간이 흐르고, 부회장인 데이브가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왔느냐.”

제프는 숨이 차오르는지 말을 길게 내뱉지 못했다.

장남이 다가오자 그는 힘겹게 고개를 들며 단말마처럼 단어를 씹어 뱉었다.

“선대 회장으로써 주는 조언이니 잘 들어라. 세상은 바뀌고 있다. 이제 황무지는 영웅을 원하고 있어. 그런 면에서는 자비롭고 물렁물렁한 네 녀석이 적합할 것이다.”

“제가 아버지의 생각보다 더 물렁하다면요?”

“흐흐흐, 권좌를 지켜내려면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나중에 날 따라서 지옥으로 오지만 말아라.”

제프는 힘이 다했다는 듯 데이브에게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 방 안에 모인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제프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데이브가 데려온 숨겨둔 친딸에게 향했다.

“이리, 이리.”

제프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스칼렛에게 눈을 고정했다.

스칼렛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고, 걸음걸이에서는 복수심이 뚝뚝 떨어졌다.

“너는 시타…….”

덕담을 던지려던 제프의 입이 멈췄다.

스칼렛이 정신을 조종하여 그의 말문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저는 꼭 이 말을 전해 드리고 싶어요.”

스칼렛은 제프에게만 들리도록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앞으로 역사에는 제프나 다른 록펠스의 이름은 남지 않고, 오직 저의 이름만이 남게 될 거에요. 그만큼 제가 높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름값을 전부 먹어치울 테니까요.”

그게 내 어머니를 부정했던 당신을 향한 최고의 복수니까.

스칼렛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두덩이를 옷소매로 닦으며 VVIP 병실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병원의 비상구로 걸어갔다.

“후우, 후우.”

비상구에 들어온 여인은 숨을 골랐다.

어두운 계단 안에서 스칼렛의 소리만이 맴돌았다.

그때, 스칼렛은 자신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를 감지했다.

“누구죠?”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반 바퀴를 돌자.

“루카님의 명령으로 찾아왔습니다. 스칼렛님 맞으십니까?”

검은색 옷을 입은 복면인은 그리 말하며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 * *

황무지의 북부.

도시와 타운이 밀집된 이 지역에는 ‘볼티모’라는 거대한 요새가 있다.

바로 핑거톤의 본부, 가장 발달한 북부에 웬 요새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 이유는 황무지가 처음 건설될 무렵에 이곳이 무역 연합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악마가 오크와 반군과 마족 숭배자를 규합하고 있다는 건가.”

머리가 완전히 벗겨진 남성 노인.

핑거톤의 최고 결정권자인 ‘밀튼’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준 서류를 읽었다.

내 뒤에는 시타델에 연락해 끌고 온 로빈 공작과 말리크가 서 있었다.

이들의 위압감만으로도 신뢰도는 보장이 되지.

“일단 이 정보는 신뢰가 제법…….”

쾅!

밀튼이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걷어찬 사람은 프레스턴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비서의 엉거주춤한 자세를 뒤로하고, 핑거톤의 처단자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응?”

호기롭게 들어오던 프레스턴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보았다.

느껴지십니까? 이전과는 다른 힘의 차이가.

나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단장님, 오랜만이네요. 저 다시 돌아왔습니다.”

“자네 근데. 이 기운은 뭔가.”

“핑거톤에 도움이 될 생각으로 열심히 수련했죠.”

“아니, 이건 수련으로는 도저히…….”

“프레스턴 단장, 일단 앉지. 조용히 읽어볼 문서가 있어서 말이야.”

“쳇, 알았어.”

밀튼의 말에 살육 전차는 이성을 되찾았다.

머리가 벗겨진 저 할아버지는 어린 프레스턴을 먹여 살린 부모나 마찬가지.

전투 실력은 프레스턴이 몇 수는 위이지만, 프레스턴은 밀튼의 말이라면 군말 없이 따랐다.

“흠, 흥미로운 문서군. 잘 읽었네, 젊은이. 이름이 루카라고?”

툭.

밀튼은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건 말리크가 반년 동안 오크의 영역을 넘나들며 수집한 정보다.

그곳에는 마기에 침식된 오크 워로드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고, 그 주위로 반군과 마족 숭배자가 터를 잡았다는 정보가 담겼다.

“그렇습니다. 여기 있는 결사단의 말리크 장로께서 손수 획득한 정보입니다.”

내 소개에 검은 옷을 입은 말리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밀튼은 다시 시선을 옮겨 로빈 공작을 보았다.

“그리고 이 정보를 시타델이 증명하는 거고.”

“음, 저는 그저 따라가라는…….”

“예, 빅토리아 5세 여왕 폐하의 날인도 찍혀 있습니다.”

밀튼은 내 말대로 서류의 겉표지에 찍힌 문장을 살폈다.

나는 이 문서를 들고 먼저 시타델의 여왕을 찾아갔다. 거기서 서류의 진위를 판단 받고 로빈 공작을 데려온 것이었다.

서류에는 마공학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도 포함되어 신빙성을 더했다.

“이것도 진짜군. 날인에서 시타델 특유의 마법 처리가 보이니.”

밀튼은 그러면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즉, 자네의 부탁은 이 일에 핑거톤이 나서 주길 원한다는 것이겠지?”

“맞습니다.”

“우리도 반군과 마족 숭배자가 오크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은 알고 있었네. 그런데 다짜고짜 악마의 공격이라니.”

“이미 고위 마족도 나타난 상태입니다. 설마 그놈들이 심심해서 놀러 왔을까요.”

단델리온이 실제로 오크의 영역에 왔을지는 나도 모른다.

말리크가 수집한 정보에도 그놈의 모습은 찍히지 않았으니.

하지만 딱 봐도 총공격을 강행할 것이 뻔한데,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필요는 없잖은가.

“큰 부대는 필요 없습니다. 탐정단의 간부들과 단장님. 최소한 단장님만이라도 원정에 보태 주시면 충분합니다.”

“아니, 방어가 아니었나? 오크들을 합치면 숫자가 10만은 넘길 텐데.”

밀튼은 깜짝 놀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핑거톤에서는 정예 병력만 내어 주시면 됩니다.”

“흠. 무슨 방법을 사용할지. 설명을 들어야 결정을 하지 않겠나.”

“저는 그 엄청난 숫자를 단번에 날릴 비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리버티 교단과 친하거든요.”

“설마!”

밀튼은 아예 의자를 박차며 일어섰다.

리버티 교단에 있는 궁극의 병기. 그들이 지닌 1급 성유물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나의 공격 계획은 실효성을 갖는다.

“제가 교단을 설득한다면 동의하시겠습니까?”

나는 공을 던졌다.

밀튼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만 한다면 자네를 돕도록 하지. 이건 연합과 핑거톤의 숙원을 풀 기회이니.”

밀튼과 나의 눈빛 사이에서 모종의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반군, 오크, 마족 숭배자를 단번에 날려 버릴 초대형 이벤트.

단델리온의 결심이 빚어낸 이 초유의 사건으로 황무지의 위기는 막을 내리게 될 것이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나만 이해가 안 되나.”

그 와중에 프레스턴은 나와 밀튼을 번갈아 보며 그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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