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72화 (72/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72화>

72. 다이하드 (4)

A등급과 S등급의 차이.

그것은 동네 뒷산과 에베레스트 정도의 차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S등급부터는 3번째 벽을 넘긴 자들의 전유물이기 때문.

그렇기에 A등급이 3개월이었던 것에 비해, 언제쯤 S등급을 달성할지는 솔직히 미지수였다.

그만큼 S의 벽은 크다는 말이다.

하지만 달성이 어려운 대신에 이점도 확실한 편이다.

여태까지 검술은 등급이 올라가며 총 9점의 능력치를 올려 주었다.

하지만 S등급은 다르다. 민첩에 15점, 체력에 9점, 힘에 3점.

총 합해서 3배에 달하는 27점을 올려 줬다.

“쓰읍, 후우.”

나는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다스렸다.

1년 하고도 2개월. 예상치를 조금 초과했으나 무사히 원하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엘릭서 복용을 도와달라더니만, 어째서 옷을 벗고 있는 거지?”

등 뒤에서 익숙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눈을 뜨고 내 상체를 바라보았다. 밀도 있는 근육 위로 드러난 상처들.

이전에는 몸에 상처가 그리 크지도, 많지도 않았다.

큰 상처만 새도 십수 개, 이 모두가 1년 새에 펠리스에게 당하며 생긴 것들이었다.

“이 상처를 보면서 지난날들을 기억하려고요.”

나는 몸을 떨며 그 말을 씹어뱉었다.

정말로 죽을 뻔했다. 처음에는 일주일마다 중상을 입고 이 강건한 신체로도 2~3일 동안 대련 수련을 하지 못했다.

비록 시간이 흐를수록 상처가 생기는 주기는 늘어났지만.

“너도 재미있었구나. 그치? 원래 행복한 나날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하는 법이니까.”

“멋대로…….”

나는 어이없는 대답에 반문하려다가 말을 멈췄다.

찌릿, 불과 몇 초 뒤에 다가올 위협을 나의 육감이 경고했다.

[초감각]의 경고에 나는 펠리스를 째려보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방법으로 내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 생각인지.

“이제 기습은 힘들 테니 많이 아쉽구나.”

펠리스는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단검을 보여 줬다.

단검에는 보라색 빛깔을 내는 액체가 흘러내렸다.

수면 시간에도 감각을 수련하라며 침소에 사복검을 휘둘렀던 위인이다.

이 정도면 오히려 수련의 끝을 축하하는 선물일지도?

“혹시 키워서 잡아먹는 타입?”

“그건 무슨 소리지? 시난 장로에게 듣기로는 내성 수련의 성과가 엄청나다길래. 직접 살펴보기 위함이다.”

저 미친 여자가 실실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니까.

나는 아무 말 없이 손바닥을 내밀었고, 펠리스는 단검의 끝으로 내 손바닥을 쓰윽 훑었다.

정확히 독을 주입할 정도로 얕고 작게 상처가 생겨났다.

“그거 한 방울이면 곰이나 소도 죽는다.”

“알면서 저에게 쓴 겁니까? 그래도, 약간 시큰시큰한 정도네요.”

“호오, 정예들이나 장로들보다 내성이 좋아. 그 정도면 정말 네 말대로 악마들의 독도 받아 내겠어.”

“그거야, 부딪쳐 봐야 알겠죠. 그보다 먼저.”

나는 가지고 있던 압축 주머니에서 붉은색 용액을 꺼냈다.

약 1년 전, 시타델의 여왕이 악마를 잡고 나에게 주었던 2개의 보상 중 하나였다.

●[용의 숨결]●

분류: 물약

등급: 영웅

효과: 오러+150

설명: 용의 심장 일부를 녹여내 제조한 엘릭서. 여러 번 복용할 경우 몸이 터져 죽을 수 있다. 불완전한 용액이므로 주의를 기하여 복용해야 한다.

제한: 오러 500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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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벽을 넘으며 나는 희귀 이하의 엘릭서는 복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여러 개를 동시에 먹는 것도 힘드니, 어떻게든 최상의 엘릭서를 복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빅토리아 5세의 선물은 상당히 고마운 일이었다.

“흐음, 굉장히 좋은 엘릭서야.”

“3번째 벽을 넘기려면 그래야죠.”

나는 가부좌를 틀고 다시 오러홀에 집중력을 쏟았다.

검술은 S등급, 연공법은 아쉽게도 A등급 후반대에서 수련이 끝났다.

뭐, 연공법이야 당장에 전투 성능과는 조금 별개니까.

“자, 마십니다.”

모든 수련을 끝낸 지금.

이제 오러 능력치만 맞춰진다면 나는 악마와 싸워도 쉽게 패배하지 않는다.

즉, 마음 놓고 판게아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

나는 바로 용액의 뚜껑을 뽑았다.

퐁!

알싸하고 뜨거운 기운이 엘릭서 병에서 뿜어져 나와 석실 내부를 후끈하게 덥혔다.

등 뒤에서는 펠리스의 손이 닿는 촉감이 느껴졌다.

프레스턴처럼 3번째 벽을 넘어선 펠리스의 실력이라면 혹시 모를 오러의 폭주를 막아 줄 터.

‘요새 들어서 광증은 잘 조절하게 되었으니까.’

펠리스는 장난기가 심하지만, 최근에는 그 자제력이 높아졌다.

지금만 보아도 차분하게 내 행동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정확한 그녀의 과거와 심중은 몰라도 어떠한 변화가 있었음은 자명했다.

벌컥, 벌컥.

나는 용의 숨결을 마시고 곧바로 연공법을 시행했다.

엘릭서는 효율적으로 내 오러홀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나는 증기 기관차처럼 스팀을 내뿜었다.

다소 억척스러운 펠리스의 구호를 받으며, 나는 힘겹게 오러홀 확장 공사를 이어갔다.

* * *

“으으.”

나는 눈꺼풀을 위로 올리며 어둠을 몰아냈다.

부스스한 시야를 손등으로 비비니 정으로 쳐서 깎아낸 천장이 보였다.

낯선 천장이다.

‘는 개뿔.’

눈에 비친 풍경은 내가 늘 보았던 것이었다.

차라리 천장이 좀 낯설었으면 좋겠다. 여기의 하루하루는 나에게 지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이 모든 것이 꿈이고 지구로 돌아가 있었으면.

“깬 거 같은데.”

향수에 젖어 있을 무렵.

누워있는 내 얼굴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의 얼굴이 훅 밀려 들어왔다.

깜빡이 좀 제발. 나는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긴 머리카락을 흔들고 있는 펠리스에게 말했다.

“눈에 머리카락 들어가겠습니다.”

“그 정도로 죽지는 않지. 네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너는.”

“네네, 죽지 않겠죠. 혹시 광기의 정의에 대해서 아세요?”

“그게 뭐지?”

모르면 말고요.

나는 입을 다물고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능력────■

근력: 191+20 민첩: 269+32

지능: 118+5 체력: 196+14

오러: 1138

텔런트:-

■────특성────■

[인간 방패] [2.0] [희생자] [개코] [초감각] [나는 전설이다] [폭탄마] [어둠에 속한 자] [운수 좋은 나] [순풍] [천의 얼굴] [철인] [초인적인 힘] [마독불침] [천재적 두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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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홀한 숫자들의 향연에 취하며 한동안 감동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수련을 마치며 얻은 [마독불침]과 [초감각]도 분명 기분을 좋게 했지만, 역시 가장 값진 특성은 이거였다.

-[어둠에 속한 자]-

등급: 전설

설명: 스킬 효율이 추가로 80%만큼 증가합니다. 오러를 사용하여 공간에 변형을 줄 수 있습니다. 영구적으로 오러를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30점씩 증가하며, 노화가 매우 느리게 진행됩니다. 영웅 이하의 엘릭서로는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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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능력치 30점 추가.

나는 그것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총합 120점의 능력치가 추가로 생긴 셈이니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라면 프레스턴의 속도도 뛰어넘을 터.

‘[천재적 두뇌]로 주술을 사용하는 속도도 빨라지겠지.’

지능은 마법 계열의 학습과 사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주술은 방어용으로 익힌 게 전부이지만, 악마의 공격을 받아 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고 봐야겠지.

“단주님, 구도자님, 여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내가 상태창을 닫으며 침소에서 일어나자 사라센이 방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전서구를 통해 들어오는 종이가 들려 있었다.

색깔을 보니 새로 지부를 세운 자유 무역 연합 쪽에서 온 듯 보였다.

“말리크 장로의 서신입니다. 단주님, 읽어보시지요.”

“음.”

펠리스는 편지를 한번 훑고서 나에게 넘겼다.

편지는 영어가 아니라 판게아의 고유 언어인 [브리아 어]로 적혀 있었다.

“무역 연합의 남부에 사는 오크들이 동향이 이상하다는군요. 레드넥들도 다 남쪽으로 후퇴하고 있고요.”

“예, 그렇습니다.”

사라센은 내 독해 실력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나는 그에게서 판게아에 존재하는 주류 언어를 배웠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의사소통이나 독해 정도는 문제없을 수준까지 되었다.

“이러면 악마의 다음 수가 드러난 거 같은데.”

펠리스는 오랜만에 차가운 목소리로 상황을 파악했다.

“자세한 정보는 가서 알아봐야겠죠. 이제 떠날 시기가 되었다는 이야기기도 하고요.”

나는 그리 말하며 말리크가 보낸 편지를 바라보았다.

반년 전부터 나는 사라센을 설득해 시타델의 첩자들을 무역 연합 쪽으로 전환 배치했다.

말리크는 그들의 감독자로 성역을 떠났고, 주기적으로 사역마를 통해 유의미한 정보를 보내왔다.

‘그 게으른 단델리온이 직접 움직이는 건가. 슬슬 그럴 때가 됐지.’

게임에서 단델리온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무역 연합이 거의 초토화된 다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격을 너무 잘 막아 냈기에 상부에서 그를 쪼아댔을 터.

그 과정에서 마족 숭배자와 반군을 규합하는 건 당연한 순서이리라.

“근데 오크는 어떤 놈들이냐? 이 근처에는 안 사는 놈들이라.”

펠리스가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아마 직접 만나게 자리를 주선하면 나를 죽이려고 할걸?

3번째 벽을 넘은 사람에게 오크란 바닥을 기어 다니는 지렁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다지 신경 쓰이는 놈들은 아니에요. 숫자가 많아서 문제지.”

“흥미가 식는군.”

“좋은 생각이십니다.”

나는 옷을 정갈하게 다듬고 벽에 세워진 흑도를 들었다.

약속된 2년이 다가왔으니 더 지체할 필요가 있을까.

내 행동에 펠리스는 벽에 등을 기대며 슬쩍 물어보았다.

“원한다면 나도 따라 가주마.”

“아뇨, 아뇨, 아뇨. 말리크 장로가 있는걸요. 단주님은 한자 동맹이랑 신성 제국을 신경 써 주세요.”

“끝까지 아가씨라는 소리는 안 하는구나?”

“아가씨, 저는 용무가 있어서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원한다면 말해 줘야지.

나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 낸 펠리스는 약간이지만 온화한 미소를 보였다.

사라센은 옆에서 침을 꿀꺽 삼켰고.

‘아니야, 아니야.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최근에 나는 ‘단주의 남자’가 되어 버렸다.

나중에는 막 눈알이 뽑힌 채로 줄 타면서 사복검도 피하겠네.

이 피비린내 나는 결사단에도 악질 사랑꾼들은 있는 건지, 나와 펠리스를 엮으려는 시도가 빈번했다.

이거 그림자보다도 더 무섭고 오래된 존재들이잖아?

별별 생각을 하며 내가 걸어간 곳은 시난의 공방이었다.

‘혈정석 정제는 다 끝났다고 들었는데.’

공방에 들어가니 가운을 입은 중년 남자가 나를 반겼다.

주술에 사용할 물품을 부탁하러 온 아신도 같이 있었다.

“오셨군요. 말씀하셨던 물건은 만들어 놨습니다.”

시난은 탁자 밑에서 새빨간 광채를 내는 유리병을 꺼냈다.

마기가 정화된 밀도 높은 혈정, 이 찐득한 액체에는 죽어가는 목숨도 살려낼 생명력을 지녔다.

목숨을 여벌로 챙기는 것과 똑같은 이치.

시난과 다르게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아신이 입을 열었다.

“근데, 설마 오늘 벽을 깨신 건가요?”

“네, 뭔가 오러홀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느낌 말고는 잘 모르겠네요.”

내가 무덤덤하게 말하자 아신과 시난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야! 3번째 벽이라니! 어쩐지 뭔가 기운이 묵직해졌다는 느낌은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니, 그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너무해요!”

시난은 내 두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설마하니 찔러본 아신도 펄쩍 뛰며 놀라워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엘릭서 빨로 3번째 벽을 넘긴 것이지만, 성장이 정체된 이들의 눈에는 엄청난 천재로 보일 것이다.

‘이 맛에 상태창을 쓰는 거지.’

나는 둘의 축하를 받으며 혈정석을 주머니에 넣었다.

결사단을 아군으로 포섭하는 것도 이로써 완료되었다.

게다가 포섭된 결사단의 힘을 빌려 판게아 동부의 일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황무지로 돌아가 단델리온과의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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