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71화 (71/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71화>

71. 다이하드 (3)

암흑 대륙.

그곳은 판게아 남쪽 바다에 생겨난 차원 게이트를 기점으로 생성되었다.

과거에 대전쟁에서 패퇴한 마족이 세운 전진기지, 이 지역은 마기로 오염된 탓에 사시사철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다.

“행복, 그대는 어째서 실패하였는가.”

암흑 대륙의 어느 어두운 방.

검은색 갑주를 입은 데스나이트가 낮고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반대편에서 작은 촛불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던 단델리온은 고개를 홱 돌렸다.

“몰라, 혼자 쳐들어가서 뒤질 뻔한 로자리아에게 따져.”

“그녀는 지금 신체를 재구성하고 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앞으로 5년은 더 걸린다더군.”

“지원군이라더니만, 사고나 치고 말이야. 그렇지 않아?”

“너도 다르지 않다. 행복. 정의를 집행하는데 게으름에 빠졌다니!”

“아니, 나도 내가 게으른 건 아는데. 그냥 나는 책을 읽는 게 행복하니까.”

궁시렁, 궁시렁.

단델리온은 앞에 앉은 데스나이트의 일침에 주둥이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정의의 악마, 라피스는 단델리온과 전혀 상성이 맞지 않았다.

기사의 명예와 힘을 과시하며 항상 정진하는 그의 성격은 단델리온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다.

단델리온은 싸늘한 방의 분위기를 바꿀 생각으로 대화 주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플록스랑 수블라는?”

“둘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신성 제국은 본인들에게 맡겨 두라더군.”

“걔들도 너무 열정적이야. 나랑 상성이 맞지 않는다고.”

단델리온은 고개를 저으며 그리 말했다.

진짜 다들 골칫거리 들이야. 나중에 대악마께서 강림하시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다가 단델리온은 슬쩍 갑주를 입은 라피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이번에 자유 무역 연합 일을 같이…….”

“안 된다. 정의롭지 못한 일이지. 대악마께서는 우리에게 각각의 책무를 할당하셨다.”

“쳇,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됐다, 됐어. 마침 나도 좋은 전략이 있으니까.”

“행복, 그 좋은 계획이란 건 뭔가?”

라피스는 상대가 흘린 말에 관심을 보였다.

“들으면 도와줄래? 나 대신에 황무지로 대신 가 주면…….”

“못 들은 것으로 하지. 나는 다른 주제가 없다면 돌아가겠다. 대악마께서 나에게 암흑대륙에서 대기할 것을 명령하셨다.”

절그럭, 절그럭.

라피스는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갑주를 부딪치며 방을 빠져나갔다.

“그래, 가라 가. 의리도 없는 것들.”

단델리온은 턱을 괴며 어두운 방 내부를 보았다.

그 어둠 속에는 백골이 드러난 언데드 마법사, 리치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름은 데스몬드, 본래는 황무지에 ‘침식의 진’을 설치해서 마기 농도를 높이는 임무를 맡았던 고위 마족이었다.

“데스몬드.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지?”

“예, 현재 레드넥 세력을 오크의 세력권으로 모으고 있습니다.”

“원래는 그 미천한 야만족들과 상종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지.”

“늦지 않게 오크 종족을 규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아라.”

단델리온이 손을 휘젓자 리치 데스몬드는 흑마법을 사용하여 사라졌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뒤에서 명령만 내려 황무지를 차지했을 텐데.

단델리온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책을 펼쳤다.

“아아, 일하기 싫어. 나는 왜 행복하지 못하는 거야.”

* * *

펠리스는 본인이 직접 나에게 검술을 지도해 주었다.

직접 검을 맞대거나, 내 검무를 봐주거나, 연공법을 시행하며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해 주기도 했다.

분명 내 성장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폰허부에게 받는 가르침은 클리프를 통해서 전달됐기에 조금 불편함이 있었으니까.

다만 아주 살짝. 조금 불만인 점이 있다면,

이 미친 스승님은 봐주는 게 없다.

단순히 편하거나 친절하지 않다는 느낌과는 멀다.

이 여자는 진짜 봐주거나 하는 게 없다. 아니, 봐준다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아, 조절이 안 됐네. 알아서 피하거라.”

펠리스의 태연한 말투에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금은 두 눈을 가린 상태, 오러를 통해 기감으로 공격을 파악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건 육감을 훈련하기 위한 수련이니까.

촤라라라!

사복검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나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몸을 옆으로 날리기 무섭게 바닥이 파이며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게 무슨 수련이냐! 죽이겠다고 날린 살인 기술이지.

간신히 기술은 피했으나 완전하지는 않았다. 허벅지에 칼날이 살짝 닿아서 피가 흘렀다.

“살았구나. 그런데 육감이 아니라 소리로 듣고 피했지?”

“아니, 그러면 그대로 몸이 반으로 갈라져 죽습니까.”

나는 눈을 가린 안대를 풀고 허벅지를 확인했다.

다행히 상처는 작았다. 펠리스는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얼른 치료 물약을 건넸다.

펠리스는 요즘은 부쩍 나에게 친절해졌다.

“상처가 작네. 수련에 큰 지장은 없겠어. 다행이다.”

그 걱정이 자신의 위험한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지만.

아무튼, 나는 시난이 제조한 고성능 물약을 쏟아 내고 깨끗한 붕대로 환부를 감았다.

100점이 넘어간 체력에 [철인]의 효과로 상처는 금방 나을 터.

상처를 싸매고 일어나자 고통이 조금씩 전해졌다.

“일단 걷는 데는 문제가 없겠네요. 뭐, 2일에서 3일이면 낫겠죠.”

“그러면 연공법이나 하자.”

“아, 넵.”

나는 짧은 탄식을 흘리고 조용히 가부좌를 틀었다. 그래,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약 1시간에 걸친 명상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가쁜 숨을 토해 냈다.

“푸하아, 후우.”

다행이야, 오늘도 살아남았어.

생사의 경계를 오가던 나에게 펠리스는 머리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연공법은 어느 시절에 개조된 걸까?”

“예? 아, 뭐. 저의 다른 스승님이 중간에 조금씩 바꾸셨겠죠.”

“으흥, 그렇구나. 너희 일파의 스승님들은 모두 재능이 좋으셨나 보구나. 덕분에 결사단에도 도움이 많이 됐어.”

내가 익힌 연공법은 [개조: 그림자 연공]이다.

이 ‘개조’는 폰허부의 손길로 탄생한 물건이고, 검귀는 검성의 철천지원수다.

거기에 펠리스는 검귀를 거의 신처럼 떠받드는 사람이다.

흠, 이거 뭔가 기분이 이상한걸?

“일단 지하 수련장은 무리고,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인가 보구나.”

“가, 감사합니다.”

“상처는 매일매일 확인할 것이다. 그러니 수련은 안 해도 꼭 여기로 오거라. 알겠지이?”

펠리스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황금색 눈동자 위와 아래로 핏발이 선 흰자가 드러났다.

김만득, 너는 할 수 있다. 네가 선택한 길이야! 견뎌!

“하하하, 당연하죠.”

“왔습니다. 단주님, 그리고 구도자님.”

내가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말하는 순간.

뒤쪽에서 젊은 남자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들렸다.

라시드. 그는 결사단 내부에서 펠리스를 제외하고 잠행술이 가장 뛰어난 장로였다.

“아, 벌써 왔네. 아쉽다아.”

펠리스는 그리 말하며 터덜터덜 석실을 나갔다.

라시드는 결사단의 주인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며칠 전에 펠리스와 수련을 시작하며 두 가지를 더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 첫 번째는 라시드에게서 잠행술을 교육받는 것이었다.

“단주님께서 구도자님께 잠행술을 가르치라 명하셨습니다.”

“예, 제가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시더라고요.”

“바로 시작하시죠. 먼저 시범을 보여드릴 테니 오러의 움직임을 잘 파악해 주십시오.”

곧바로 라시드의 몸에서 검붉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이건 단순히 오러를 압축해 강기로 실체화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안개처럼 떠돌던 오러가 라시드의 몸에 달라붙었다.

‘뭔가 존재감이.’

분명 라시드를 앞에서 보고 있었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더욱 진하고 단단하게 달라붙은 검붉은 기운, 나는 라시드의 기술을 최대한 뜯어보며 그 원리를 파악하려 애썼다.

기감이나 [예리한 감각]으로 감지해도 매우 감지하기 힘든 정도였다.

“보셨습니까?”

라시드는 장막과도 같은 기운을 거두며 물었다.

“이 정도면 고위 마족이나 악마들에게도 통하겠군요.”

“충분히 익히신다면 가능합니다. 제가 정확한 오러의 움직임을 알려드리죠.”

라시드는 나에게 다가와 기술의 움직임을 회로에 그려줬다.

좋아, 이대로 하면 된다 이 말이지?

내가 호기롭게 자세를 잡고 기술을 펼치자, 회로를 따라 움직이던 오러가 계속 헛다리를 짚으며 올곧게 나아가질 못했다.

“의외로 오러를 다루는데 재능이 없으시군요. 저는 몇 년 사이에 검술과 연공법을 그만큼 익히셨길래 단번에 하실 줄 알았습니다.”

라시드는 내 명치에 팩트를 꽂았다.

펠리스에게도 이런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재능은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거나, 혹은 어떻게 그 재능으로 이 어려운 검술을 익혔냐는 물음이었다.

‘상태창과 관련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뭐, 특성이나 스킬을 떠올리면 아주 해괴한 소리도 아니다.

학습에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확실하니.

나는 라시드에게 다시 한번 더 가르침을 요청했다.

“한 번 더 해 보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먼저 시범을 보일 테니, 절 보면서 연습해 보시죠.”

라시드는 덤덤하게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영웅 등급의 잠입 스킬, [그림자 잠행술]은 오러를 사용하기 때문에 능력치가 올라갈수록 성능은 곱절로 뛴다.

보니까, 아직 갈 길은 좀 멀어 보이지만.

[스킬: [잠행]의 효과가 제거되었습니다. 스킬의 숙련도는 상위 스킬에 전수됩니다.]

[스킬: [그림자 잠행술]이(가) 생성되었습니다. 민첩+3, 체력+1, 오러+3]

[스킬: [그림자 잠행술]의 등급이 ‘E’가 되었습니다. 민첩+3, 체력+1, 오러+3]

약 1시간의 연습을 통해 나는 기술을 터득하고 말았다.

다행이다. 첫날에 익히는 건 성공했네.

내가 조용히 기쁨을 만끽하자 우리의 명치 사냥꾼은 나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배우는 속도가 정말 빠르시군요.”

“재능은 없어도 빨리 배운다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내일 같은 시각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라시드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하며 석실에서 사라졌다.

이제 두 번째 교류의 현장으로 가보실까. 나는 텅 빈 석실에서 나와 시난의 제조 공방으로 갔다.

보글보글, 공방에 들어서니 가마솥이 끌고 약초 냄새가 코를 마비시켰다.

“아, 오늘도 살아남으셨군요.”

“보시다시피 아직 안 죽었습니다.”

“하하하, 단주님께 들었습니다. 그림자들의 수련을 받고 싶으시다고요?”

가운을 입은 시난은 공방 내부에서 상자를 가져 나왔다.

그곳에는 얼핏 보아도 위험해 보이는 물질들이 대거 들어 있었다.

그림자들의 수련, 그중에는 독에 익숙해지는 과정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시난은 상자를 꺼내면서도 나를 만류했다.

“굳이 이 작업을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여기 정예들은 다 받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직접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미쳤다고 이걸 하겠습니까.”

“제가 좀 미쳤긴 하죠. 거기에 받고 하나 더.”

나는 압축 주머니에서 마기에 물든 마도구와 스크롤, 물약을 우르르 쏟아 냈다.

시난은 질색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닿기만 해도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독약에 타서 주십쇼.”

“뭐, 저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시난은 능청스럽게 말하며 집게로 물건들을 실어 날랐다.

보통 그림자들은 희귀 등급의 [백독불침]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마족을 상대하려면 그 이상이 필요하다.

“당장 시작하죠. 처음 독은 뭡니까?”

나는 옷소매를 들어 올리며 의자에 앉았다.

시난은 다행히 내 몸에 생길 변화 정도는 설명해 주었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처럼 춥게 만드는 독입니다. 정신력이랑 오러로 버텨내는 게 최선이죠.”

나는 팔을 덜덜 떨며 담담하게 팔뚝을 내밀었다.

주술, 검술, 연공법, 잠행술에 독약까지. 사라센과는 정보를 공조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황무지로 그림자를 파견하자고 말해 볼 생각이었다.

‘1년. 그 안에 어떻게든 다 완수하고 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마기가 섞인 독약을 받아들였다.

의식이 몽롱하게 흐려지며 차가운 한기가 혈관을 타고 돌았다. 독은 신체를 얼음장처럼 붙으며 나를 죽이려 들었다.

고통과 성장의 나날 속에서.

시간이 흐르며 어느덧 약속의 시간이 채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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