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67화 (67/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67화>

67. 그림자 안의 신조 (3)

이튿날.

나는 아침을 먹고서 곧바로 봉우리의 밑단에 있는 수련장으로 끌려갔다.

펠리스와 말리크, 그 둘이 발정 난 강아지처럼 꼬리와 혓바닥을 흔들며 왔기 때문이었다.

펠리스가 먼저 운을 띄었다.

“자아, 이제 시작해야지?”

“맞습니다. 단주님. 어서 우리에게 사조님의 유산을 보여 주시죠.”

옆에서는 말리크가 내 검을 보면서 지원 사격을 했다.

물론, 검술은 가르쳐 줄 것이다. 그전에 계약서에 도장은 찍으셔야죠?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데 그림자의 주인께 약조를 받고 싶습니다.”

“그냥 편하게 아가씨라 해라.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이건 검술의 교류입니다. 400년이 넘도록 단절된 서로의 검술을 살피고 보완하는 거죠.”

펠리스와 말리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맛이 갔구나? 이름도 남기지 않은 양반이 참 대단한 검술을 남겼어.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40대 남자, 말리크는 입맛을 다시며 나를 재촉했다.

“일단 검무를 펼치시면 부족한 점이 있는지 잘 살펴 드리겠습니다.”

“빨리! 빨리!”

펠리스는 황금색 눈동자를 기괴하게 뜨며 미친 것처럼 목을 꺾어 댔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서 흑도를 뽑았다. 이어서 천천히 그림자 검무를 펼치며 수련장을 휘저었다.

슈우웅.

자연스럽게 뽑혀 나온 강기가 몸과 검에 덧씌워졌다.

암적색 안개가 피어나오며 연기처럼 신형이 흐려졌고, 물에 먹물을 떨어트린 것처럼 수련장을 어두운 빛으로 물들였다.

집중해서 펼친 검무는 점점 속도가 더해졌다.

“정말 사조께서 펼친 검술은 이렇단 말인가.”

말리크는 목울대 너머로 침을 삼켰다.

기존에 그들이 알고 있던 [그림자 검술]보다 더욱 화려하고 완성된 검무에 넋을 잃은 것이다.

이는 펠리스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검귀의 직계 제자를 자청했던 그녀도 진짜 검귀의 검술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

“후우.”

참았던 숨을 뱉어냈다.

검무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저번에 받은 영웅급 숙련도 부여권으로 올린 것을 더해서 총 18.426%가 되었다.

어디 보자, 검무를 펼치기 전에는 18.421%였으니까.

‘어? 이제 거의 티도 안 나잖아?’

숙련도 부여권이 어디 솟아나는 것도 아니고.

숙련도가 쥐똥만큼 올라가는 걸 보니 성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흑도를 검집에 넣으며 두 남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아주 값진 검무를 보았습니다. 구도자님, 감사합니다.”

우선 밀라크는 어떤 깨달음을 얻고서 나에게 감사함을 밝혔다.

그렇다면 희대의 미친년은?

“아흐흐흑. 사조시여 어째서 이런 검술을 이제야 주십니까.”

꺼이, 꺼이.

펠리스는 바닥에 엎드리며 대성통곡을 했다.

웃었다가 울었다가, 때로는 정상으로 보이다가도 결국 도돌이표를 만난다.

말리크는 나에게 다가와 귀에 대고 조용히 말해 주었다.

“가끔 이러시니 괘념치 마십시오. 어렸을 적 트라우마 때문에 감정 기복이 심하십니다.”

“알겠습니다.”

말리크는 펠리스를 무시하며 나와 검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어떤 식의 수련을 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검술을 연마했는지 물었다.

“아니, 수련을 시작하고 2년밖에 안 됐다뇨!”

말리크는 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놀랄 일이긴 하지. 보통 판게아의 오러 사용자들은 희귀를 기준으로 5년은 수련해야 검기를 만든다.

그런데 나는 무려 2년 만에 강기를 만들어 냈다고 말했다.

‘사실은 1년이지만.’

이건 단순히 수련에 쏟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일전에 내가 성장이 쉽다는 걸 느낀 것처럼, 사람마다 성장이 멈추는 구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성장에 막힘이 없었지.’

시스템의 도움이기도 하고,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정말 엄청난 천재셨군요. 올해 나이가 18세라고 하셨으니, 사실 오러를 다루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이기도 합니다만.”

“그건 구도자가 뿌리가 없어서 그렇다.”

말리크의 말을 받으며 대화에 낀 여인.

차갑고 딱딱한 표정의 펠리스가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광증을 드러내지 않을 때에는 항상 저런 태도라는 설정을 본 적이 있었다.

잠깐, 저번에도 빅토리아 5세에게 이런 말을 들었는데.

“그 뿌리라는 게 뭡니까.”

“사람은 태어나면서 재능이 어느 정도 정해지지. 하지만 구도자는 그게 없어. 배움에 이점이 없는 대신에 그 끝도 없는 거지.”

“좋은 건지 모르겠네요.”

“이건 아주 엄청난 축복이다. 네가 만약 3번째 벽을 넘으면 저절로 뜻을 이해하게 되겠지.”

펠리스는 그리 말하며 검붉은 오러를 내뿜었다.

그러자 뿜어낸 기운을 기준으로 공간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3번째 벽, 그것은 프레스턴과 시타델의 대마법사들이 넘어선 하나의 상징이었다.

“몸에 두 개의 오러홀이 있지? 그 둘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너도 이걸 할 수 있다.”

펠리스는 그리 말하며 오러를 거두었다.

마법사와 다르게 무술인은 공간에 영향을 주는 게 쉽지 않다고 들었다.

7위계 초입이었던 로빈은 공간 계열 마법사였기에 손쉽게 공간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펠리스의 경우에는 그게 쉽지 않았다.

“단주님, 오러홀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말씀입니까.”

질문은 내가 아니라 말리크가 했다.

자신이 들여다보지 못한 경지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니 궁금한 게 있던 모양이다.

펠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건 혼돈이지. 3번째 벽은 평정이야. 우리의 경우에는 두 개의 오러홀이 하나처럼 변하는 거지. 4번째 벽을 넘으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거고.”

펠리스는 먼 산을 보듯이 몽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소위 4번째 벽은 검성과 검귀가 다가갔다는 초월자의 영역.

아직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한 사람들이 논하기에는 너무 이른 주제였다.

‘게임에서도 클리프는 검성과 비슷한 경지에 이르고 게임이 끝났지.’

검귀와 검성, 8위계의 전대 시계탑주들도 그 이상을 넘지 못했다.

인간을 벗어나는 한계선이니 한 시대를 풍미한 절대자들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아무튼!”

짝!

펠리스는 갑자기 제 뺨을 때렸다.

집 나간 정신을 찾아온 건가. 나와 말리크는 어색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검술 교류라고 했지? 그럼, 나도 결사단의 수련 방식을 보여 주겠다.”

* * *

펠리스는 나를 데리고 성역의 지하로 내려갔다.

결사단의 수련 방식이라, 나는 이 지하에 어떤 공간이 있는지 알고 있다.

바로 클리프와 펠리스의 마지막 결투 장소가 성역의 지하니까.

“자, 여기가 내가 즐겨 사용하는 수련장이다.”

펠리스의 말과 함께 어두운 지하에 불빛이 들어왔다.

넓고 끝없이 이어진 복도, 벽과 바닥에 잔뜩 돋아난 칼날이 촛불 빛에 반사되어 내 눈을 간지럽혔다.

“어, 그러니까 이건.”

“어때, 멋지지? 나는 여기서 그림자 검무를 펼치며 수련하거든. 시간을 정해 놓고 복도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거지.”

“보니까, 검에 뭔가가 묻어서 반들거리는데요?”

“독이다. 닿으면 죽을 만큼 아파. 아니,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아프지.”

씨발.

나는 속으로 쌍욕을 날리며 통로의 자세한 구조를 살폈다.

불교에서 전해지는 검수지옥의 풍경이 이럴까. 정글처럼 빽빽하게 칼날이 설치된 통로는 겨우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로 비좁았다.

“한번 해 보겠느냐? 나는 왕복하는데 3분 정도 걸리니까, 넉넉하게 10분이면 될 것이다.”

네? 어딜 들어가라고요?

통로 근처에 있던 테이블에는 모래시계가 있었고, 펠리스는 10분짜리를 들어 올렸다.

나는 이 독을 안다. 클리프로 이 독에 무수히 당해 보았으니.

‘그래도 해야만 해.’

나는 우선 검을 뽑았다.

시작이 반이라고, 검이 손에 들리니 번뇌가 가라앉았다.

탓!

나는 힘차게 바닥을 박찼다.

하나의 안개가 되어 칼날의 좀은 틈을 파고들며 검무를 펼쳤다.

확실히 쉽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일직선으로 달리며 그림자 검무를 연습한 적은 없으니까.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하며 검을 휘두르던 순간.

쉬익.

자그마한 바늘 하나가 내 허벅지를 훑고 지나갔다.

자그마한 생채기를 남기고 옷이 살짝 찢어진 정도. 처음에는 스쳤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나 허벅지가 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 나는 멈춰서고 말았다.

“어, 어.”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독이 들어오기 무섭게 오러홀이 암벽처럼 단단하게 굳으며 전신으로 독이 퍼져나갔다.

쿵, 몸이 바닥에 쓰러지며 큰 소리가 났다. 근육이 내 통제를 벗어나며 힘이 풀려 버린 것이었다.

누가 내 관절을 뽑아내고, 몸을 불태우고, 사지를 톱으로 썰어 버리는 감각.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있던 검을 떠올렸다.

죽어야 돼! 죽으면 편해져! 제발 죽게 해 줘!

속에 있는 누군가의 외침에 나도 모르게 손목이 움직였다.

“그래도 40m는 움직였네.”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았다.

흑단 같은 고운 검은색 머리카락, 펠리스가 내 손목을 잡고서 목숨을 끊지 못하도록 두 손을 붙잡았다.

1분, 너무나도 길었던 시간이 지나가자 오러홀이 움직이며 호흡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때, 매일 죽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숨만 쉬었다.

게임에서는 이곳이 수련장이 아닌 단순히 지하 통로로 불렸다.

어쩐지 여기서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다니더라.

‘진짜 거절하고 싶다.’

세상에 내 손으로 목숨을 끊으려 할 줄이야.

이걸 과연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통과 격통으로는 도저히 담아내지 못할 크기와 깊이였다.

물론, 고통은 금세 사라졌고 거절하지 못할 유혹이 나에게 다가왔지만.

◆━━━━━━━━━━━◆

<서브>-

(내용)

- 펠리스와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수련! 고통과 시련을 물리치고 그녀의 마음을 손에 얻자!

(목표)

- 7분 이내로 그림자 검무를 펼치며 수련장을 통과하기.

(보상)

- [검귀식: 그림자 검술] A등급, 모든 능력치+10

∵ 해당 스킬이 A등급 이상이 되면 퀘스트가 소멸합니다.

◆━━━━━━━━━━━◆

나는 퀘스트의 보상을 보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단번에 A등급, 그만큼 이 수련장이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단시간에 이만큼 성장할 방법은 이것뿐이야.’

높은 등급의 숙련도 부여권을 주는 퀘스트도 몇 개 있긴 하다.

다만 그 퀘스트는 판게아 전역에 널리 퍼져 있고, 이동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다.

무엇보다 내 검술 이해도가 높아지지 않으면 언젠가 벽을 만나게 될 터.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펠리스는 내 얼굴에 본인의 얼굴을 붙이며 말했다.

“내가 아까 말했지? 뿌리가 없다는 건 축복이라고.”

나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너는 무조건 목표를 달성하게 될 거야. 그게 얼마나 진귀한 보물인지 너는 아느냐?”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말을 듣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는가, 스스로에게 화두를 던지며 결심을 굳혔다.

“이 독이 저를 죽이진 않겠죠?”

“독은 너를 죽이지 않아, 지금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지. 포기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거다.”

펠리스는 그리 말하며 광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무덤덤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가 지하 수련장의 입구로 시선을 옮겼다.

“진짜 죽도록 재미난 검술 교류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