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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로 살아남기-65화 (65/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65화>

65. 그림자 안의 신조 (1)

시타델로부터 동쪽.

판게아 대륙의 서북부와 동북부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지역, 알타이르 산맥은 신성 제국과 시타델의 사이에서 국경의 역할을 한다.

나는 수백 개의 봉우리가 있는 산맥 속의 어느 개천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오늘은 사람을 볼 수 있으려나.’

알타이르 산맥에 들어온 이후부터 사람을 만난 적이 드물다.

목적지랑 방향은 정확히 알았지만, 실제로 황량한 산맥을 체험해 보니 우주에 혼자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촤악, 몸에 물을 뭍이며 잠시 휴식을 취하던 그때.

딸랑딸랑, 딸랑딸랑.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경박한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알타이르 산맥에 사는 목동이 산양 무리를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온 것이었다.

지금 시각은 오후 2시 무렵, 나는 새벽부터 길을 걸었고 오늘 처음으로 사람의 형상을 눈에 담았다.

지팡이를 짚은 노파와 젊은 목동.

그들은 거대한 천을 옷처럼 덮어 얼굴과 몸을 가렸다.

목동은 산양들을 물가에 풀어놓았고, 노파는 쭈글쭈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지팡이를 짚으며 힘겹게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내가 판게아 공용어로 먼저 말하자 노파는 살짝 움찔거렸다.

이곳은 판게아 원주민의 영향력이 강한 곳, 공용어가 잘 쓰이지 않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외지인이었구나. 어쩐지 못 본 얼굴이더라니.”

쇠약한 노파는 퉁명스럽게 말하더니 바위에 걸쳐놓은 내 옷가지를 살폈다.

칼이 위로 꺾인 흑도와 평범한 옷들.

노파는 혀를 끌끌 차며 어색한 어투로 공용어를 구사했다.

“여기서 검 들고 설치면 죽어. 명이 아깝지 않거든 잘 숨기거나 하라고. 이 염병할 놈아.”

사실 일부러 좀 와 달라고 들고 다닌 건데.

이 지역은 결사단이 꽉 쥐고 있다. 얼핏 무법지대처럼 보이는 알타이르 산맥 전채가 결사단의 본진이기 때문이다.

뭐, 여태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니. 그냥 내가 직접 가는 게 나아 보이네.

“감사합니다. 여기는 초행이라서요. 그런데 할머니, 이 근처에 도시나 마을은 없나요?”

“썩을 놈. 길을 잃은 게냐.”

욕쟁이 노파는 선뜻 나를 인도해 주었다.

일단 그녀의 말대로 리볼버와 흑도를 숨기고, 목동이 이끄는 산양 무리를 따라 산맥을 타고 올라갔다.

알타이르 산맥에 거대한 도시나 인프라 같은 것은 없다.

험준한 바위산의 중간중간마다 작은 농촌이나 교역 마을이 있을 뿐.

“여기 사람들이 무시해도 상관 말아. 외지인을 별로 달가워하는 지역은 아니니까.”

노파는 길을 걸으며 수시로 해야 될 행동과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일러주었다.

외지인을 꺼리는 풍습, 확실히 젊은 목동은 나에게 단 한 마디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철저히 나를 무시하며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오히려 특이한 쪽은 나를 걱정해 주는 할머니가 아닐까.

“밥은 먹고 다니냐? 잘 곳은 있고?”

“어떻게든 찾아봐야죠.”

“몹쓸 놈, 이런 곳은 왜 와서 고생을 해.”

노파는 본인의 집에서 자고 갈 것을 권유했다.

나는 정중히 그 친절을 거절하며, 그들과 함께 산봉우리 중간 즈음에 있는 시장 마을로 들어왔다.

마을은 수백 명이 사는 작은 공동체였다.

촌장이라는 사람이 있고, 그 아래에서 마을 사람들이 공동체를 만들어 다른 마을에서 사온 물건을 팔았다.

완벽한 무정부 상태. 중앙의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는 풍경이었다.

‘원래는 조용히 접선할 계획이었는데 말이야.’

나는 그들의 틈에서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고 걸어 다녔다.

칼은 물론이고 얼굴도 가리라는 노파의 말을 들었지만, 굳이 그 말에 따르지는 않았다.

며칠 동안 산맥을 돌아다녀도 나타나지 않으니, 이렇게 그들의 공동체 안을 휘젓고 다니는 수밖에.

“어이, 거기 이방인.”

시장의 한복판.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오우, 영어를 하쉴 줄 아시는쿤요. 싸랑해요 알타이르!

사실 인기척이야 감지하고 있었어도 영어를 할 줄 모르면 어떡하나 난감해하던 참이다.

먼저 말을 걸어줘서 진짜 고맙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우선 등을 돌리며 인사를 건넸다.

나를 불러 세운 남자는 검은색 옷으로 전신을 가린 사내였다.

머리 부분에 수평으로 난 구멍을 통해 눈동자가 회색인 것만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가라, 이방인.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의 손에서 휘어진 칼날이 번들거렸다.

어느새 주변에서 장사하던 사람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맞은편의 사내처럼 검은 천으로 몸을 가린 사람들이 나를 포위했다.

“에휴, 그러게 마을 밖에 있을 때 공격하지.”

스르륵, 내 신형이 부드럽게 바닥을 미끄러졌다.

자연스럽게 끌어올린 오러가 검붉은 강기를 만들며 내 동작을 가려 주었다.

나는 압축 주머니에서 흑도를 꺼냈다.

●[무명]●

분류: 한손검

등급: 전설

내구도: 500/500

공격력: 435

관통(물리/마력): 250/480

효과: 근력+15 민첩+27 체력+9 [그림자 검술] 계열 스킬의 효율+50%

능력: 내장 스킬 [그림자 장막] 사용 가능

제한: [검귀식: 그림자 검술] 보유 오러 550점 이상

설명: 제작 시기 불명. 제작자 불명. 이름 없는 검사의 이름 없는 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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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수치의 흑색 곡도.

나는 안개 속에서 검을 반대로 쥐었다.

그림자 검술 2번, [환영 검술]

무명의 힘으로 증폭된 검술.

[환영 활보]로 생성된 30개가 넘는 환영이 안개처럼 지역을 장악했다.

빡, 빠악, 빡빡. 순서대로 후두부를 가격하며 사내 3명을 순식간에 쓰러트렸다.

이윽고 모든 환영이 사라졌을 무렵.

“봤지?”

나는 처음 말을 걸었던 사내에게 물었다.

“그, 그림자시여 어찌 이곳에!”

남자는 할 말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아, 너무 조무래기라 이 검술의 진가를 모르는구나.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림자의 본거지는 침입이 거의 불가능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림자의 도움을 받아 들어가는 것.

“혹시 지인 중에 아는 그림자 없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 자는 정식 결사단원이 아니다.

아마 그 하청의 하청? 검술의 진의를 파악할 깜냥도 안 내는 모양이니 뻔할 뻔이다.

나는 상대에게 조곤조곤 나 자신을 소개했다.

“자아, 지금부터 나는 이 마을을 습격한 침략자야. 사람들을 마구마구 죽이고, 네가 아끼는 부하들을 모두 포를 떠서 죽였다고.”

“……자, 잘못 들었습니다.”

“후우. 쉽지 않네. 주변을 봐봐. 뭐가 보여?”

남자는 내 눈치를 보며 360도에 걸친 상황을 눈에 담았다.

“어때?”

“자비로운 그림자께서 검을 들이민 저와 형제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경솔한 마을 주민들도 모두 살려 주셨고요.”

“씨발!”

나는 경외하는 신을 바라보듯 하는 남자에게 역정을 내며 말했다.

다음 상대 데려오라고!

* * *

나는 평화로운 알타이르 산맥에 피바람을 몰고 온 살인마가 되었다.

정의로운 산맥의 수호신. 그림자들은 그런 나를 참살하기 위해 검을 뽑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렇다.

“네놈은 누구냐.”

여러 사내가 내 발치에 쓰러져 있다.

흑색 복장의 사내들은 흉부나 머리를 얻어맞아 정신을 잃었고, 땅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였다.

그런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중년의 남자. 그의 몸에서는 나와 비슷한 기운이 풍겼다.

‘약사로 위장해서 독살하려던 아저씨네.’

얼굴은 복면으로 가렸지만, 체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결사단의 다섯 장로 중 하나. 게임에서 클리프가 다친 틈을 타서 독살하기 위해 약사로 찾아왔던 남자였다.

루카의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다. 저 아저씨를 만나는 시간대는 게임 중후반부.

이미 루카가 죽어 있는 시간대거든.

“저는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림자의 검술을 익혔죠.”

“그건 이미 알고 있다. 여태까지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더군? 그 이유를 말하라.”

“결사단 본부에 가고 싶습니다.”

“뭐?”

“결사단의 주인에게 똑똑히 전하세요. 검귀의 직계 제자가 이 산맥에 왔노라고.”

쉬익.

바람이 갈라졌다.

복면인의 모습이 촛불이 바람에 꺼지듯 사라졌고, 나는 흑도를 뽑아 오른쪽을 가리켰다.

챙! 불꽃이 튀며 검을 든 팔이 튕겨 나갔다.

나와 같은 검붉은 안개. 그것을 내뿜으며 달려드는 사내에 맞서 나는 몸을 뒤로 빼며 오러를 끌어올렸다.

촤촤촤창.

검과 검이 초당 십수 번을 부딪치며 허공을 별빛처럼 수놓았다.

나는 뒤로 빼던 몸에 역동작을 걸며 360도로 회전했다. 검이 크게 원을 그리자 상대는 여유롭게 자리를 벗어났다.

두 줄기의 암적색 안개. 우리를 지켜보는 눈에는 선망과 경외, 그리고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그대를 성역에 데려가겠다.”

중년인은 곡도를 수납하며 그리 말했다.

나 역시 흑도를 검집에 넣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따라와라. 판단은 그분에게 맡길 터이니.”

나는 군말하지 않고 뒤를 쫓았다.

성역, 그들이 말하는 결사단의 본부는 이 알타이르 산맥 전체에 입구가 있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건이 필요하다.

“뒤에서 기다려라.”

중년인 장로는 나를 보고 물러서라고 말한 뒤.

품에서 동그란 보패 하나를 꺼내 거대한 바위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바위가 액체처럼 흐물흐물하게 변하더니 잔잔한 물결이 일며 장로를 집어삼켰다.

“들어가시오.”

내 뒤에 서 있던 결사단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게임에서도 봤었던 장면, 나는 그대로 액체처럼 녹아 버린 바위 표면에 손을 대었다.

액체처럼 변한 표면은 달라붙거나 묻지 않았다.

마치 안개처럼 나를 쑤욱 받아들이며 성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어 주었다.

후우웅.

공간이 바뀌며 주변의 기류가 크게 바뀌었다.

바위를 뚫고 들어온 나는 구름 위에 세워진 높은 봉우리를 보았다.

그림자 성역, 결사단의 중추이자 판게아의 무수히 많은 정보가 모이는 곳.

미리 앞서서 기다리고 있던 중년인 장로가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다만 산맥을 지나가는 여행객은 건드리지 않았기에 그대가 무사했던 것이다.”

아, 그랬구나.

클리프가 알타이르 산맥에 도착하면 항상 결사단원이 마중을 나왔다.

아주 당연한 것이, 이미 장로 중 반을 죽이고 펠리스의 모가지를 따기 위해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좋은 녀석들이잖아? 나는 아무나 막 죽이는 줄 알았지.

“저를 어디로 데려가실 겁니까?”

“그대의 뜻대로.”

여기도 신비주의냐?

장로는 조용히 나를 이끌고 높은 봉우리로 향했다.

봉우리 밑단에는 인위적으로 뚫어 놓은 입구가 있었다.

흑색 복장의 경비원이 지키는 석문을 통과하고, 나와 장로는 봉우리 중심에서 높은 나선형 계단을 따라 정상으로 올라갔다.

결사단의 주인, 요검의 펠리스가 있는 최상층으로.

“들어 오거라.”

어느덧 거대한 석실 앞에 다다른 우리의 귀에 그런 음성이 들렸다.

장로는 석실 앞에 무릎을 꿇으며 턱짓으로 내부를 가리켰다.

뚜벅, 뚜벅.

가죽 부츠가 바위와 닿아 딱딱한 느낌의 소리가 났다.

촛불을 듬성듬성 켜놓은 내부는 어두웠다. 기다란 통로 끝에는 두 사람의 기운만이 감지되었다.

“검귀 사조의 직계 제자라는 말을 들었다.”

어두운 통로의 끝에서 차분한 여인의 음성이 전달되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런 주장은 이곳에서 머리가 10개여도 부족하지.”

목소리는 내 몸을 쓰다듬듯 파고들었다.

음성 자체에 어떤 환각 작용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터벅, 내 발이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어두컴컴한 공간의 끝에는 가림막으로 가려진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가운데에 앉은 청초한 여인과 그 옆에 앉은 호위무사.

“어찌 그리 조바심을 내느냐, 네가 찾던 이가 여기에 있다.”

가운데에 앉은 여인이 환각을 걸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몽롱해지는 기운에 저항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찾던 사람은 없다.”

나는 그리 말하고서 고개를 휙 돌렸다.

어두컴컴한 공간의 귀퉁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키키킥.

조금 전과는 다른 아주 천박한 웃음소리가 근처에서 들렸다.

나는 차분히 감정을 가라앉혔다가 감각을 곤두세우며 어둠 속으로 손을 확 뻗었다.

그러자 사람의 팔뚝 같은 무언가가 잡혔다.

“제법 소질이 있구나. 그럴 주장을 할 능력은 있어.”

시커먼 공간 너머에서 그런 말과 함께 두 개의 빛이 떠올랐다.

영롱한 황금색 눈동자. 아름다운 두 안광이 나를 비추었다.

상대의 눈빛에서는 호기심과 짜증이 동시에 느껴졌다.

“네가 마을에서 우리 장로에게 지껄인 말, 여기서 한 번 더 해 볼래?”

요검의 펠리스.

그 세기의 미친년이 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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