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64화>
64. 시타델의 휴일 (3)
신성한 속박.
6위계 마법이 로자리아의 몸을 뒤덮었다.
갑자기 발현된 마법에 악마는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지만, 이미 쇠사슬에 발목이 묶이고 말았다.
“뭐야, 이게!”
나는 얼빠진 멍청이처럼 가만히 있지 않았다.
최대한 발을 놀려 로자리아에게서 멀어지는 한편,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위우우웅.
쇠사슬에 잡힌 로자리아가 발버둥 치는 사이.
그녀의 밑에 도사리고 있던 거대한 덫이 마력을 뿜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대마법사 셋이 고안한 대 악마용 마법진.
그것은 마족의 감각을 흐트러트리고 조금씩 마기를 소비하게 만드는 기능을 했다.
방어막 기능도 있기에 일단 마족이 들어오면 탈출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내 역할은 끝났다는 말이지.”
나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빼서 초원 어딘가에 던졌다.
이건 악마를 발견할 시에 여왕과 시계잡주에게 소식을 알릴 신호기였다.
동시에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용도이기도 하고.
번쩍! 쾅! 콰과광!
내가 압축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 치료를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섬광이 우후죽순 발생하고 식물이 자라났다가, 아예 마법진 전체가 용광로처럼 들끓기도 했다.
분명 대마법사 셋이서 로자리아를 훔씬 두들겨…….
“차원의 틈에서 탈출하고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일이나 하고 있는지.”
어느덧 내 옆으로 다가온 로빈 공작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니, 이 양반은 뭐하는 거야. 저기 가서 나 대신에 목숨 걸고 싸우라고!
나는 그를 살짝 째려보며 물어보았다.
“여기서 뭐하십니까. 폐하랑 탑주가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나는 자네의 호위역이네. 로빈, 누님이 거슬리니 꺼져있으라는 말 듣고 온 거잖아.”
“괜찮습니다.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죠.”
“아니, 그렇지 않네. 썬데이,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나는 후방에서 마법진을 조정하는 임무를 받았다네.”
로빈은 7위계라 하여도 초입.
완숙한 빅토리아 5세나, 끄트머리에 있는 탑주에 비하면 실력이 한참 부족하다.
애당초 전문 계열이 공간인 시점에서 메인 딜러로 나서기에는 힘들지.
“감히 나를 함정에 빠트려? 근데 이거 재밌잖아! 더 싸우자. 더!”
미친년.
나는 쌍욕을 내뱉으며 마법진 안을 들여다보았다.
모든 악마는 아이돌 그룹처럼, 각각의 콘셉트나 포지션이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황무지를 침략한 단델리온은 환각 계열에 특화된 것처럼.
‘재는 그냥 주먹이고.’
조금 전에 나에게 치명상을 날릴 뻔한 그 기술은 단순한 주먹질이다.
마기를 주먹에 응집해서 지면에 내려쳤을 뿐. 복잡한 기술이나 비밀리에 전승되는 비기?
그런 건 로자리아에게 없다.
본인의 ‘집착’을 완성할 강인한 육체 생명력, 마르지 않는 마기.
단순하고 무식하게.
저 여자와 싸워서 이기려면 단 한 가지만 필요하다.
압도적인 화력, 더 큰 화력 말이다.
“걱정하지 말게. 저 마법진을 뚫고 올 여유는 없을 테니.”
“그래도 저는 빠져도 되잖아요. 어차피 도움도 안 되는데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됩니까?”
“그건 안 되지. 자네 입으로 자네를 노리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하지 않았나. 미끼는 물고기 근처에 두어야지.”
로자리아를 꾀어낼 최고의 미끼.
나는 이번 작전에서 VIP가 아니라 갯지렁이 정도의 존재감을 가졌다.
그보다 전황이 썩 유쾌하지는 않은걸.
“로자리아를 죽이기에는 좀 부족한 느낌인데요.”
“뭐? 그렇다면 내가 나서서…….”
“아뇨, 로빈 공작 전하의 실력이 더해져도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프레스턴의 화력이라면 어떻게든 될 텐데.
나는 입맛을 다시며 로자리아의 흉부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족들에게 핵이 있는 것처럼, 악마에게도 그들의 생명력을 지탱하는 핵이 있다.
시계탑주와 여왕의 마법이 화려하게 마법진 안을 들쑤셨음에도 로자리아의 핵을 부수지 못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근처에 있는 근위대도 아마 도움이 안 될 텐데.”
“뭐, 죽지만 않는다는 거지. 아마 당분간 활동하기는 힘들 겁니다.”
생명의 핵이 파괴되지 않아도 상처가 치유되는 동안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때마침 로자리아를 중심으로 검은색 기운이 퍼져 나왔다.
마지막 발악, 광폭화에 다다른 그녀가 힘을 짜내서 두 대마법사를 압박하려는 모양새였다.
“폐하, 물러서야 하옵니다!”
시계탑주가 다급히 외치며 짙은 마기 안개에서 빠져나왔다.
이어서 마법 갑주를 착용한 빅토리아 5세도 무사히 적의 반격에서 벗어났다.
“마법진만 부서지면 다 죽을 줄 알아!”
고농축 마기로 가득한 마법진 내부.
거기서 비명에 가까운 극찬이 평원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근위대는 마법진 방어에 만전을 기하라!”
“존명!” “존명!”
근위대의 엘리트들.
여왕의 명령에 나와 경지가 비슷한 6위계 마법사 십수 명이 마법진을 둘러쌌다.
로빈을 비롯한 근위대 마법사들은 덫의 내구력을 담당했고, 두 마법사는 밖에서 안으로 마법을 쏟아 넣었다.
마멸의 소나기. 화룡의 입맞춤 등등.
두 대마법사가 펼친 7위계 마법에 로자리아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내장이 흘러내리고 육신이 불타오르기를 반복했다.
마법진 밖에서도 일방적으로 뚜드려 패다니 정말 마법사들이란.
팡! 팡! 팡!
물론, 나도 [스크류 샷]과 [스나이핑] 스킬을 활용해 최대한 숟가락 딜을 꽂아 넣었다.
덫은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제작된 마법진, 밖에서 안으로 공격할 경우 위력은 떨어져도 약간의 타격은 줄 수 있었다.
은근히 빡치게 만들 수도 있고.
“크으. 크으아아!”
쩌엉!
핵을 중심으로 재생된 로자리아가 주먹으로 마법진을 후려쳤다.
초월자에 가까운 힘이 방어막에 닿자 몇몇 6위계 마법사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 정도는 당연하다. 로자리아는 게임 후반부 대악마 ‘부에르’가 등장하기 직전의 보스이니.
“자네는 참 대단하군! 저 악마 여자가 자네를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태연하게 총이나 쏘고 말이야.”
“어차피 죽는 건 안 변하잖아요. 이렇든 저렇든.”
나는 로빈의 물음에 답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오히려 로자리아를 화나게 할수록 살아날 확률이 높다.
집착의 악마는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거든.
차라리 열을 받게 만들면 그만큼 나를 살려두고 괴롭힐 여지가 크다.
“흐하하하! 흐하하하!”
수십 번이 넘게 신체가 재생성된 로자리아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이미 치유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일단 보호막을 벗어나면 충분히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꿀꺽, 누군가의 목젖이 꿈틀거렸다. 그만큼 모두가 로자리아의 다음 행동을 숨죽여 기다렸다.
“됐어. 오늘은, 오늘은 그만할래.”
로자리아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나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너는 내가 절대 죽이지 않을 거야. 너를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내 옆에 두고서 귀여워 해 줄게.”
로자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이 점차 가루로 변하며 흩날렸다.
거대한 페널티를 감수하며 몸을 수십만 개로 나누어 탈출하는 것.
판게아를 침공한 악마 중에서 가장 강력한 육체를 가진 그녀였기에 신체의 조각도 많았다.
보호막의 균열을 통해 사방으로 흩날리는 먼지들. 로자리아는 그 속에 핵을 숨겨서 탈출을 강행했다.
“저 속에 핵이 있습니다. 당장 마법을 준비해 주세요!”
나는 그리 말하며 가루가 흩날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내 말을 들은 로빈의 마법이 펼쳐지며 퍼져나가던 가루들 틈에서 거대한 암흑 구체가 발생했다.
후우웅, 자그마한 블랙홀이 가루를 흡입하며 로자리아의 탈출을 막았다.
‘핵을 부수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피해를 줘야 해.’
나는 시미터를 뽑고서 잘게 분해된 로자리아의 핵을 찾아 나섰다.
* * *
몇 시간 뒤, 룬덴의 햄트턴 궁전.
대마법사 셋과 나만이 있는 공간에서, 시계탑주가 안 좋은 소식을 전했다.
“폐하, 추적은 실패했습니다. 악마의 핵을 파괴하지는 못한 것 같사옵니다.”
여왕은 전투의 피로를 덜어내며 탑주의 노고를 치하했다.
“아니네, 이미 우리는 승리를 거두었으니 괘념치 말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살아서 도망쳤다 하더라도 로자리아가 입은 피해는 컸다.
마계에서 요양하며 최소 5년 동안은 밖으로 돌아다니지 못할 터.
그 안에 판게아의 마족을 물리칠 수만 있다면 상당히 긍정적인 성과였다.
여왕이 나에게 물었다.
“이제 자네는 무엇을 할 텐가?”
“알타이르 산맥으로 갈 생각입니다. 폐하.”
“그대는 그림자의 일원이 아니라 하지 않았는가. 한데 어찌하여?”
악마의 습격을 거치고 여왕은 나에게 상당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이전에 로빈 공작을 구하기도 했으니, 게임으로 따지자면 호감도 바를 거의 끝까지 채웠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어쩐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저희 일파에서는 결사단의 잔존 세력을 찾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번에 검귀가 살아 있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오류가 발생한다.
어째서 검귀는 결사단이 무너지는 걸 지켜만 봤는지. 그리고 왜 여태까지 검귀의 직계 제자가 결사단을 찾지 않았는지.
이 두 가지 모순은 내가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냥 뭉개야지.
“다만 검귀 사조께서 그걸 원치 않으셨다는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모르는가?”
“사조께서 결사단이 마족에게 위협을 받지 않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역사 속에서 영원히 그림자로 살아온 남자.
그는 스스로 본인의 이름을 없애고 검의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다.
어찌 보면 역대 최고의 신비주의자 일지도?
솔직히 내가 봤을 때는 병맛 사상에 심취한 중2병 환자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나는 이어서 여왕에게 내 뜻을 전달했다.
“지금은 상황이 매우 위험합니다. 해서 요검을 찾아가 결사단의 본래 목적을 상기시킬 생각입니다.”
“음, 짐은 그 여인을 직접 본 적은 없네만, 다소 위험한 인물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느니라.”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나는 단호히 여왕에게 고했다.
시타델 왕국과 자유 무역 연합. 나는 여태까지 이 두 세력을 끌어들였다.
앞으로는 결사단과 판게아 동부의 세력들까지.
마족을 완전히 몰아내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판게아의 세력을 뭉쳐야 했다.
여왕은 내 뜻을 온전히 이해한 듯 보였다.
“그대의 뜻은 잘 알았다. 아마도 검귀의 검을 구해 온 것도 결사단을 움직이기 위함이겠지.”
“그렇습니다. 폐하, 그리고 청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왕국이 그대의 편에 서길 바라는가?”
“여왕 폐하의 지원이 있다면, 분명 앞으로의 전쟁에서도 승리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좋다. 랭커셔 후작은 들어라.”
“예, 폐하.”
시계탑주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공손히 예의를 갖췄다.
“그대는 왕실의 은인이자, 악마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다준 자를 부정하는가.”
후작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타델에 남은 근 400년에 달하는 역사. 그 자체를 완전히 부정한 자가 아닌가.
그는 속에서 말을 굴리더니 본인의 생각을 담아 의견을 개진했다.
“저자의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간의 행보를 고려했을 때, 시타델의 해악을 끼칠 자는 아닐 것입니다.”
“경의 의견을 밝혀 주어 고맙네. 경은 왕실의 은인이 떠날 때까지 조속히 연락용 수정구를 제작해 주게. 그리고 검귀의 검에 걸린 문제도 그대가 나서서 조용히 해결하도록.”
“명을 받드나이다.”
시계탑주는 딱히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확실히 석연치 않은 부분은 많겠지. 하지만 악마가 정말로 나를 공격했으니 완전히 부정하기도 어려우리라.
“로빈 공작은 들어라.”
“예, 누…… 여왕 폐하.”
“경은 왕실의 창고에서 은인에게 줄 선물을 가져오라.”
“로빈, 이제 시종으로 전직한 거야?”
“헛소리하지 말고 어서.”
“며, 명을 받들겠나이다.”
로빈은 허리를 굽히며 방을 나섰다.
돌아오고 일주일도 안 됐는데, 너무 부려 먹는다는 둥 혼잣말을 지껄이며 사라졌다.
나는 남매의 풍경을 보며 살짝 웃었다.
여왕은 동생을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감정을 숨기며 나에게 말했다.
“그대가 가져온 검귀의 검은 봉인을 푸는데 며칠 정도 걸릴 것이네. 그때까지 궁전에서 지내도록.”
“예, 폐하.”
나는 여왕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당분간 내상을 완전히 치료하고, 결사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지낼 장소가 필요한 참이었다.
‘이제 시타델에서의 용무는 얼추 끝났고.’
알타이르 산맥.
그곳은 그림자 검술과 연공법이 시작된 지역이다.
현재까지 내가 올린 두 스킬의 숙련도는 B등급. 성장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위협은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니 프레스턴에게 오러 운용법을 배운 것처럼, 그림자 검술에 대한 폭넓은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요검의 펠리스. 그 또라이라면 그림자 검술의 스승으로는 제격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