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63화 (63/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63화>

63. 시타델의 휴일 (2)

빅토리아 5세는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내 말에 무엇하나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거짓은 아닙니다.”

찰스 랭커셔가 심문 마법으로 여부를 판가름해서 알려 주었다.

그의 실력이라면 내 오러 방어 정도야 쉽사리 파훼할 터.

하지만 [천의 얼굴]이 주는 ‘영웅 등급 이하의 심문 스킬과 특성 차단’은 그도 인지하지 못했다.

사실 이전에 갖고 있던 특성으로도 충분하긴 했지만.

“요검, 그 여자가 검귀의 직계 제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시타델도 알고 있다.”

여왕은 이어서 당연한 정보라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시계탑주는 여왕의 말에 세부 정보를 첨부했다.

“검귀는 검성에게 목숨을 잃었지. 그 직후에 검성은 알타이르 산맥의 그림자를 모조리 죽였고. 살아남은 몇몇이 다시 결사단을 재건한 사실쯤이야 우리도 알고 있네.”

여왕은 찰스의 설명을 이어받아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중요한 것은 그대가 직계 제자라는 증거일세.”

“그건 저의 검술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로빈 공작 전하, 저의 움직임이 그림자들과 같았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정신 나간 대마법사에게 쏠렸다.

그는 나와 함께한 여정을 되돌아보고서 입을 열었다.

“오러는 확실히 거의 같지만, 검술은 내가 보았던 그림자보다 더욱 정교한 느낌이었네. 로빈, 특히 도망갈 때 움직임이 환상적이었다고도 말해 줘야지!”

로빈은 19단계부터 26단계까지 나와 함께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내 기술들을 보았고 자신의 감상평을 내린 것이었다.

문제는 여왕이 저 인간을 딱히 믿지 않는다는 건데.

“폐하. 황송한 말이오나, 로빈 공작 전하의 상태를 짐작하면, 지금의 발언은 참고하기 어렵습니다.”

찰스 랭커셔는 지극히 사실에 기반하여 냉철한 분석을 시도했다.

여왕은 둘의 대화를 모두 경청하더니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뜨며 말했다.

“계속해 보아라. 검귀와 그의 검술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대부분 사라졌으니. 그대의 말은 거짓이라, 혹은 진실이라 증명하기 어렵다.”

보류, 조심스러운 성격 덕분인지 그녀는 쉽사리 판단하지 않았다.

나의 목적, 내가 검귀의 직계 제자임을 자청하는 속내를 밝히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열심히 이빨을 털어 줘야지.

“우선 저의 사조는 검성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상당히 파문이 컸다.

검귀와 검성의 대결은 역사가 사이에서 거의 정설처럼 전해진다.

그러나 둘의 싸움을 지켜본 이는 아주 극소수였고,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검귀라는 인물이 워낙 비밀에 싸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맹점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사실 둘은 마족에게 맞서 싸우던 동료였습니다. 두 분이 싸웠다는 역사 자체가 거짓인 셈이죠.”

“잠시만! 지금 자네는 시타델에 기록된 역사를 부정하는 건가?”

찰스 랭커셔는 내 말에 발끈하며 나섰다.

그럴 만도 하다. 옛 시타델의 학자들이 거짓된 정보를 적었다면, 그건 객관적 사실을 중요시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수치일 테니까.

실제로 내 말은 구라기도 하고.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구라를 쳤다.

왜냐고? 이 대마법사 3인방을 속여먹을 방법이야 이미 마련해 두었으니.

나는 물러서지 않고 찰스에게 말을 쏘아붙였다.

“우선 이곳에 검귀와 검성의 싸움을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둘의 대결은 무려 400년 전이다.

전대 시계탑주가 아니라, 전전대 시계탑주가 와도 싸움을 직접 본 사람은 없으리라.

“저도 비록 물증은 없지만, 제 스승에게 사조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본래 결사단의 목적은 인류의 수호였다는 것을요.”

인류의 수호는 개뿔.

시계탑주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감정을 드러냈다.

찰스의 생각이 옳다. 결사단은 일종의 이익 집단에 불과하니까.

게다가 어둠 속에서 세상을 손아귀 안에 넣겠다는 몹시 악당다운 목표를 가지고 있다.

과거 400년 전에도 검성과 검귀가 맞붙은 계기는, 결사단이 아라곤 제국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서였다.

“검귀께서는 항상 마족의 침략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라곤 제국에서 초월자에 근접했다는 검사를 찾아갔죠. 그게 검성이었습니다.”

“도저히 못 듣겠군.”

시계탑주는 고개를 저으며 등을 돌렸다.

물론, 나는 개소리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런 증거도 없는 궤변이라도 계속 들으면 그럴싸하거든.

“두 분은 뜻이 같음을 인정하고, 서로 공조하며 마족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대악마의 공격을 받아 사조께서 크게 다치셨죠.”

“내가 알기로 마족의 본격적인 침공은 차원 대전쟁 때인 걸로 아는데.”

로빈은 내 말에 호기심을 가지며 답했다.

400년 전에도 마족은 판게아에 살았지만, 이렇게 강하고 거대한 규모는 아니었다.

즉, 검성과 검귀라는 불세출의 영웅들이 고전할 상대가 아니라는 이야기.

“틀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어째서 지구와 판게아가 연결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우연히?”

나는 찰스에게 시선을 돌리며 연달아 물었다.

“논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두었을 때. 그럴 확률은 없습니다. 우연이라니요!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대답은 다른 쪽에서 나왔다.

“그대는 지구와 판게아의 충돌이 마족의 짓이라 판단하는가?”

“그렇습니다, 폐하. 실제로 지구와 판게아의 충돌로 이득을 본 세력은 마족입니다. 무슨 술수인지는 몰라도 사악한 술수로 지구를 이곳에 끌어들인 게 분명합니다.”

어디선가 심히 억울해하는 마족들의 곡소리가?

어쨌든, 이쯤 되자 정신 연령이 많이 퇴화한 로빈은 내 말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결사단이 멸문지화를 당한 이후로 판게아는 여러 침략에 시달렸다.

두 사건에 확실한 인과관계는 없었지만, 음모론을 과다 투여하니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검성이 결사단을 쓸어버렸다는 역사적 사실은 어떻게 반론할 텐가! 설마 검성이 미쳤다고 친우의 세력을 뿌리째 뽑지는 않았겠지!”

내 찐득찐득한 음모론에 시계탑주는 팩트로 승부를 걸었다.

칫, 비겁하게 사실을 들고 오다니. 나는 최대한 여유롭게 답했다.

“모릅니다.”

“뭐라!”

쿠구구.

시계탑주가 격노하며 공간 자체에 진동이 일어났다.

8위계의 경지를 바라보는 찰스 랭커셔의 수준은 그만큼 높았다.

“그만! 랭커셔 후작 이 자는 왕실의 은인인 점을 명심하게. 짐은 최악의 경우라 할지라도 처벌의 수위가 국외 추방을 넘는 것을 바라지 않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찰스는 여왕의 명령에 한 걸음 물러섰다.

지금이 기회야! 나는 곧바로 여왕에게 질문을 던졌다.

“폐하. 혹시 저에 대한 정보를 알고 계시는지요.”

“그대에 대한 정보는 록펠스 그룹에게 받았지. 그간 여러 마족을 참살하며 다닌 것을 안다.”

“맞습니다. 검귀 사조의 유지를 받든 저희 일파는 비밀리에 많은 마족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제 친우 중에 ‘클리프’라는 젊은 검사가 있습니다.”

“그자가 뭘 어쨌다는 말인가.”

“클리프는 검성의 직계 제자입니다. 만약 검성과 제 사조가 원수 사이였다면, 어찌 저와 클리프가 친구일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일부러 시계탑주의 질문을 흘려버렸다.

씨발. 나도 몰라, 아라곤 제국을 노리는 암흑 조직이니 신나게 다 척살했겠지.

나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홀가분해진 사람처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슬슬 로자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내놓을 차례였으니.

“후우, 이렇게 전부 털어놓으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실은 제가 알현실에서 아뢰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저희 일파는 판게아의 비밀을 안 다는 이유로 수없이 마족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말입니다.”

“이번에도 라면?”

“예, 저와 스승님은 최근에 마족들이 대규모 침공을 일으킬 거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리고 스승님께서는 악마의 습격에 돌아가셨습니다.”

있지도 않은 스승을 죽였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불굴의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토해내듯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악마가 룬덴에 숨어 있습니다.”

* * *

시타델의 평온한 오후.

나는 근 3일 동안 시타델의 거리를 돌아다니고, 카페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휴식을 즐겼다.

“못 보던 분이시네요. 외지인인가 보시죠?”

내가 카페 외부의 파라솔 아래에 자리를 잡자, 안에서 종업원이 나와 메뉴판을 건넸다.

긴 생머리가 허리까지 자란 여인이었다.

“예, 사업차 룬덴에 오고 얼마 안 됐습니다. 요리는 가장 잘 팔리는 거로 주시고요, 음료는 시원한 흑맥주로 주세요.”

“주문 감사합니다! 그리고 손목에 걸친 시계도 잘 어울리세요!”

젊은 여종업원이 생긋 웃으며 그리 말했다.

금색 빛을 자아내는 고급 시계, 나는 손목에 찬 묵직한 물건을 들면서 말했다.

“그런가요? 최근에 차기 시작했는데, 저는 약간 족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에이, 무슨 소리세요. 농담도.”

여종업원은 웃으며 음식을 준비하러 떠났다.

주문을 마치고 길거리를 가만히 지켜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나는 발밑에서 은밀히 다가온 생물의 소리를 들었다.

야옹.

룬덴 거리를 돌아다니는 길고양이.

나는 귀를 쫑긋거리며 다가온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의 손을 무서워하지 않는 걸 보니, 여기저기 아양을 떨며 음식을 얻어먹었나 보다.

“어머, 애는 또 왔네요. 이 녀석 밥은 제가 따로 줄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 보니 여기 터줏대감이었군요. 저리 가라. 훠이 훠이.”

니야옹.

고양이는 내가 던진 소시지 조각을 물고 조각으로 사라졌다.

참, 평온한 하루다.

흑맥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룬덴의 밤거리를 휘저었다.

수도 외곽의 공원, 그곳에는 돗자리를 펼치고 음주를 즐기는 커플들이 많았다.

‘슬슬 숙소로 돌아갈까.’

오늘도 정처 없이 길을 걷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주변에는 어둠이 내려앉았고 공원 거리는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때였다.

“쿠울, 쿠울.”

나는 공원 의자에 누워 잠든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술에 취한 듯 나무 의자에 대짜로 뻗어 코를 골아댔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취객. 나는 하나도 특이할 것 없는 풍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우우웅, 나는 오러를 내부에서 회전시키며 [오버 클럭]을 사용했다.

동시에 손목에 찬 시계의 버튼을 눌렀고, 팔찌에 내장된 오러를 최대한 전개하며 가속에 가속을 거듭했다.

파아앙!

내가 움직이자 공기가 밀려나며 큰 파열음이 일었다.

공원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다.

사람들은 내가 움직이는 모습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즐겁게 술을 마시며 놀았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출력, 죽을 각오로 다리를 움직이자 흉악한 기운이 나를 쫓아왔다.

집착의 악마. 로자리아.

나무 의자에 누워서 자고 있던 여인은 나를 한방에 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맹수였다.

지금의 나는 한낱 쥐새끼고.

“나처럼 매력적인 여자가 나무 의자에 쓰러져 자고 있으면 챙겨 줘야지!”

“…….”

“혹시 몰라? 궁전이 답답해서 도망친 공주일 수도 있잖아!”

“대가리에 총 맞았냐! 아주 머리가 꽃밭이네!”

대답을 안 할 수가 있어야지.

로자리아는 여유롭게 나를 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일단 이명이 ‘집착’인 부분에서 비정상은 확정. 그렇기에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이 상황은 단순한 유희에 불과했으니.

“그쪽은 룬덴의 외곽으로 향하는 길인 거 알아? 살고 싶으면 시가지 쪽으로 도망치지 그래.”

나는 로자리아의 말을 무시하며 공원을 벗어났다.

수도 바깥의 드넓은 평원, 엄청난 속도로 달린 덕분에 수도의 불빛이 저 멀리서 보일 정도로 멀어졌다.

“칫, 변수라길래. 좀 재밌는 놈인 줄 알았는데.”

로자리아는 혼잣말을 지껄였다.

찌릿, 감각의 경고와 함께 뒤쪽에서 마기가 휘몰아쳤다.

죽는다. 뒤진다.

그림자 검술 2번, [환영 활보]

스무 개에 달하는 환영이 꽃이 만개하듯 피어났다.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가는 모습에 로자리아는 비웃음을 흘리며 마기를 터트렸다.

“귀엽네.”

쿠과과과!

지면이 통째로 부서졌다. 모든 환영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갈라진 땅이 막무가내로 들썩였고, 나는 마기 파편에 얻어맞아 초원을 뒹굴었다.

“커헉.”

핏물 한 바가지가 입에서 쏟아졌다.

나는 내상을 입은 채로 땅바닥을 기었다.

상대는 집착의 악마. 한번 정한 대상을 절대 쉽게 죽이지 않는다.

의식을 남겨서 죽을 때까지 괴롭히는 게 그녀의 몹쓸 취미다.

“후후후, 어딜 그렇게 도망가. 시타델의 수비대가 올 때까지 버티려고? 그렇게 쉬울까.”

사박, 사박.

지면을 완전히 뭉개버린 로자리아의 발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나는 포복 자세에서 몸을 휙 돌렸다. 노랑 갈래머리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물론, 나도 미소를 빠트리지 않았다.

“졸라 쉬운데.”

내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로자리아의 발밑에서 순백의 쇠사슬이 튀어나와 그녀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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