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62화>
62. 시타델의 휴일 (1)
저 덩치의 이름은 크로노.
외형은 바위산을 등에 달고 다니는 인간의 느낌이고, 두 손에는 위협적인 거대 망치를 들었다.
“준비됐어, 썬데이? 물론이지. 로빈!”
우리의 7위계 대마법사 로빈은 곧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그의 지팡이가 황금색 빛을 발산하자, 크로노의 중심에 검은색 구가 생겨났다.
우주에서 발생하는 블랙홀과 비슷한 마법, 그 현상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지만, 로빈의 마법은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 크아아아! 무슨 잔재주냐!
망치를 흔들며 저항하던 거인을 구체가 집어삼키며 거대한 육신이 자취를 감췄다.
거인의 포효로 시끄럽던 공간에서는 차분한 기류가 흘렀다.
로빈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해치웠나?”
그 순간.
먹구름과 우레가 번쩍이는 하늘에서 거대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크로노는 이 공간의 지배자. 앞서서 이곳에 왔던 전대 시계탑주도 저 거인을 차원과 분리해 놓지 못했다.
하물며 고작 7위계인 로빈의 마법으로 가능할까.
쿠와아아아!
하늘을 감쌌던 뇌운이 물러나며 거대한 육신이 드러났다.
수백 톤은 가뿐히 뛰어넘을 중량이 땅으로 추락하는 게 아닌가.
“루카! 자네는 나만 믿게. 이 로빈과 썬데이가 저 괴물의 목숨을 거두고 말겠네!”
나를 왜 불러 이 사람아.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로빈이 패배하리란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로빈이 크로노를 이기지 못하는 것일 뿐. 크로노 또한 로빈을 상대로 이기지는 못한다.
7위계는 뉘 집 개 이름이 아니니까.
- 받아라, 도둑놈들아!
크로노는 거대한 망치를 내밀며 떨어졌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지면에 떨어지는 속도가 점차 줄어들더니, 종국에는 흙먼지를 날리는 수준으로 위력이 감소했다.
쿠웅, 크로노는 안전하게 착지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이 정도도 대응하지 못하면 마법사가 아니지. 덩치! 자네는 중력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나?”
로빈은 속사포로 본인의 마법에 관해 설명했다.
그간 혼자여서 못했던 말을 다 쏟아 내는 건지, 굉장한 속도로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좋아, 그렇게만 어그로를 끌어 주라고.
‘어디 보자. 그 검이.’
나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두 사나이의 대결 속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로빈이 질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마음을 놓고 있으면 안 된다.
크로노가 날뛸수록 공간의 부하가 심해지고 최후에는.
푸후우우!
때마침 지면 아래에서 마그마가 용솟음쳤다.
로빈은 빙결 마법을 펼치며 대항했으나, 환경 자체가 뒤바뀌는 현상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잠시만! 자네가 아끼는 보물들이 녹아내리고 있지 않은가!”
- 닥쳐라, 침입자!
그렇다.
로빈의 우려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템들은 용암에 파묻힌다.
물건의 위치도 공간에 들어올 때마다 무작위로 배치되니 가능한 한 빨리 찾아내야 했다.
‘저건 폰허부가 쓰던 ’광휘의 심판‘이잖아.’
마치 본인을 입양하라는 듯, 폰허부의 옛 무기가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안 키워 안 키운다고! 나는 시선을 거두어 널리고 널린 다른 전설 무구들을 둘러보았다.
분명 게임에서는 있었는데 설마 없나? 이런 합리적 의심이 몽글몽글 솟아오르던 찰나.
“유레카!”
광휘의 심판 뒤에 가려졌던 검은색 곡도.
칼날 부분은 전부 흑색에 손잡이는 고풍스러운 붉은색의 칼이 꽂혀 있다.
이름은 ‘무명’. 주인의 컨셉을 물려받아 검에 붙여진 이름이 없었다.
촤라라라.
나는 플라스크를 꺼내 ‘차원 분리제’를 뿌렸다.
알갱이처럼 생긴 물질은 검에 달라붙더니 얼음처럼 변하며 무명을 안에 가둬버렸다.
표면은 차갑지 않았다. 나는 검을 품에 꼭 안고서 로빈을 불렀다.
“이제 갑시다!”
“어? 알겠네! 근데 여기서는 어떻게 탈출하나!”
- 너는 또 뭔데 그 이쑤시개를 들고 있냐! 당장 내려놔라!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구만.
두 생명체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둘의 싸움으로 울퉁불퉁하게 바뀐 평지를 보았다.
저 가운데에 끼면 정말 뼈도 못 추리겠는데?
크로노의 크고 아름다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로빈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일단 그놈이랑 놀아주세요! 제가 탈출구를 찾을 때까지만요!”
“알겠네. 최대한 빨리 부탁하네!”
미안해, 로빈. 탈출구는 이미 알고 있었어.
나는 눈물을 흘리며 크로노가 일어났던 이 공간의 중심으로 향했다.
내 뒤로 로빈과 크로노가 벌이는 숙명의 대결이 배경처럼 펼쳐졌다.
크로노의 몸이 얼어붙고 터져 나갔다. 때로는 다른 공간으로 몸을 날려 보내거나, 중력을 역전시켜 하늘 높이 올려 버리기도 했다.
부글부글.
거인이 몸을 일으킨 공간에 생긴 거대한 구멍, 그 안에서 마그마가 걸쭉한 거품을 만들어냈다.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서 그대로 몸을 던졌다.
“로빈! 저 새끼가 혼자서 도망가! 무슨 소리야. 썬데이, 동료를 믿어야지!”
- 크르르, 저 통로를 어떻게 알아낸 거지?
크로노의 말을 끝으로 내 육신이 마그마로 퐁당 빠졌다.
이어서 선선한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무의식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새하얀 공간이 펼쳐졌다.
‘휴, 무사히 살아서 돌아가네.’
상태창과 관련된 부분을 빼면 모두 예상한 범주 안이었다.
나름 무난하게 <차원의 틈>을 클리어한 셈.
뒤에 두고 온 로빈은 실력이 나보다 좋으니 어떻게든 살아남을 터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판게아로 귀환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나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웅웅웅.
뭐지? 나는 하얀색 공간에서 들리는 진동에 귀를 기울였다.
진동보다는 어떠한 소리, 무수히 많은 소리의 범주 안에서도 목소리와 비슷한 울림이었다.
“제, 소리, 시나요? 아, 타, 요. 당, 리, 있.”
윙윙거리던 소리는 이내 끊기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잘 들어보니 목소리의 주인은 여자였다. 살짝 졸리고 포근한 느낌의 음성.
나는 반복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보의 조각을 맞춰나갔다.
“제, 목소리, 들리시나요? 로자리아가, 시타델에, 도착했어요.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마족이 나를 노릴 거라는 추측이 맞았던 거야?
마족에서 암살자가, 심지어 게임 후반부에 등장하는 보스몹이 나를 죽이러 오다니.
사실상 사형 선고라 봐도 되지 않을까.
“당신은 누구야? 누군데 나한테 이런 정보를 알려 주는 거지? 설마 상태창이 응답하지 않은 거랑 연관이 있는 거야?”
나는 공간 너머에 있을 사람에게 크게 소리쳤다.
응답은 없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고 나는 곧바로 공간 밖으로 빠져나왔다.
화아악. 눈부시던 빛이 사라지고 처음 내 눈동자에 들어온 것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자네!”
바로 로빈 공작이었다.
처음 들어갔던 문에서 튀어나온 내 몸이 허공에서 멈췄다.
로빈이 마법으로 나를 붙잡아 준 것이었다.
[스킬: [양손 검 입문]이(가) 생성되었습니다. 근력+2]
~
[스킬: [양손 검 숙련]의 등급이 ‘D’가 되었습니다. 근력+2, 체력+1]
[스킬: [전투 전문]의 등급이 ‘A’가 되었습니다. 근력+1, 민첩+1, 체력+2]
[특성: [초인적인 힘]이(가) 개방되었습니다.]
[[초인적인 힘]의 효과로 최대 운반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대형 무기의 속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특성: [철인]이(가) 개방되었습니다.]
[[철인]의 효과로 자연 치유력이 50% 빨라집니다. 신체 내구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상태창이 다시 인식되며 내 눈에 알림이 주르륵 올라왔다.
양손 검 스킬이 숙련 단계까지 올라가, 힘과 체력 능력치가 100점을 돌파하며 새로운 특성도 생겼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자네는 나보다 먼저 들어갔으면서 왜 이리 늦게…….”
“이런 씨발! 대답은 해줘야 할 것 아니야!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 할 말만 하고 지랄이야. 이 문 열어! 다시 들어갈 거니까!”
“뭐야, 무슨 일인가? 로빈, 이 배신자 새끼 상태가 이상해.”
로빈은 강제로 보고의 문을 열려는 나를 막아섰다.
[천의 얼굴]의 효과로도 막지 못할 정도로 크게 흥분한 상태였으나,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반복하며 평정을 되찾았다.
‘일단 로자리아가 여기로 온다 이거지?’
* * *
내가 보고에 들어가 있는 동안 밖에서는 이틀이 흘렀다.
시간 선 자체가 같았기에 막 스칼렛이 할머니가 되어있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로빈은 순찰을 하던 궁중 마법사에게 발견되었고, 궁전의 조용한 곳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깊은 밤.
우리 둘은 여왕의 명령을 받고 궁전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여왕의 침실, 여왕의 측근으로 보이는 시종이 데려온 곳은 다름 아닌 이곳이었다.
“들어가시지요.”
더없이 조용한 초대에 의아한 느낌도 잠시.
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 앞에는 잠옷 차림의 여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현 시계탑주. 시타델의 최강자인 찰스 랭커셔도 함께였다.
“로빈, 이게 바로 4P야? 썬데이, 조용히 해. 누님이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데.”
“……정상이 아니라더니. 확실히 30년이란 시간은 크구나.”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로빈 공작의 실언에 여왕은 미끈한 이마를 짚었다.
살아 돌아온 것 자체는 더없이 기뻤으나, 왕실의 체통은 모조리 삭제되어 버렸으니까.
“당분간은 가족들을 만나지 않는 게 좋겠구나. 증상이 나아질 때까지 궁전에서 칩거하거라.”
“누님, 30년 만에 만나서 처음 듣는 말이 감금이라뇨. 로빈, 이게 구속해서 하는 거야? 아니라니까! 썬데이, 제발 빠져 있어.”
“조용히 하여라! 짐은 25년 전에 시타델의 왕위를 계승한 군주다. 피붙이라 하여도 경박한 언행은 용인될 수 없느니라.”
“30년 전보다 더 재수 없어. 이러니까 내가 왕실 보고로 도망갔지.”
로빈은 슬며시 말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방금은 썬데이의 생각이 아닌 거 같은데? 나는 이 촌극을 잠시 지켜보았다.
무표정을 유지하며 재밌게 콩트를 관람하던 나에게 여왕의 시선이 옮겨졌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로 나에게 입을 열었다.
“우선 그대의 헌신과 노고에 무한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네.”
“저는 약속을 이행했을 뿐입니다. 폐하.”
“요즘에는 그 무게를 망각하는 자들이 많으니. 그대에게 행하는 예우는 모두 합당하네.”
“로빈, 저 새끼가 너 버리고 튀려고 했잖아! 빨리 지금 말…… 읍읍!”
이 따뜻하고 은혜로운 순간에 찬물을 끼얹다니.
로빈은 또 다른 인격이 튀어나오지 않게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서브 퀘스트: <차원의 틈>이(가)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10, (영웅)숙련도 부여권]
얼핏 보면 보상이 조금 별로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왕실 보고에서 가져나온 ‘무명’까지 보상에 포함하면 딱히 아쉽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다, 살짝 분위기가 차가워진 느낌인데.
“하지만 그대의 몸에 흐르는 기운은 왕국의 안녕에 잠재적 위험인바.”
나긋나긋하던 여왕의 목소리에서 갑자기 위엄이 흘러나왔다.
역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어.
“짐은 그대에게 모든 진실을 밝힐 것을 명한다.”
여왕의 준엄한 말투에 이어 잠자코 있던 시계탑주가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땅에 지팡이를 두들기며 말했다.
“시타델은 진리와 이성을 원한다. 왕국에 찾아온 이방인이여 그대의 이야기를 낱낱이 고하라.”
나는 겉으로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내가 바라던 상황이었으니까.
차원의 틈에서 들었던 목소리. 로자리아의 위협을 알려 준 여자의 음성에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고민이 끝난 뒤, 나는 이런 판단을 내렸다.
그 여자가 나를 이 세상으로 데려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적대적인 쪽은 아니리라.
여자가 준 정보는 굉장히 직설적이었다. 만약 나를 위험에 빠지게 할 작정이라면 애매한 정보를 줬을 것이다.
로자리아의 습격, 시타델의 불신.
이 두 가지를 잘만 엮으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 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검귀 사조의 직계 제자는 알타이르 산맥에 있는 그 여자가 아닙니다. 바로 저입니다.”
한동안 몸을 썼으니, 이제 다시 혓바닥을 놀릴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