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60화 (60/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60화>

60. 루카와 전설의 검 (3)

시각과 마나가 단절된 공간.

왕실의 보고에서 처음 시작되는 퍼즐은 ‘길 찾기’다.

‘일단 위치를 잘 잡고.’

나는 돌아봤던 고개를 다시 그대로 돌려 정자세를 취했다.

이곳은 차원의 경계로 들어가는 곳이기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다는 설정이 있다.

물론, 그 특성을 외우고 있다면 말이 달라지지만.

“직진으로 열다섯 걸음.”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며 정확한 보폭으로 걸은 다음.

“왼쪽 여덟 걸음.”

왼쪽을 바라보고 다시 침착하게 움직였다.

판게아가 출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커뮤니티에서는 <차원의 틈> 퀘스트를 발견하고 난리가 났다.

1단계 미션부터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무려 어둠 속에서 오러나 [초감각]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목적지를 찾아가야 했으니까.

“반대로 돌아서 열 걸음.”

심지어 이곳은 일반적인 공간과 구조 자체가 다르다.

내가 움직일수록 이 공간은 조금씩 변화하며, 가지 못하는 곳이 갈 수 있게 바뀌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제 뭣대로인 셈이다.

당연히 그 변화에도 일정한 규칙은 존재한다. 그러니 내가 여기에 무턱대고 들어왔지.

툭.

내가 순서에 맞춰 마지막 걸음을 옮겼을 때.

발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스펀지 같기도 하고 딱딱한 합판 같기도 했다.

여기까지 왔다면 일단 성공이다.

“휴, 이제 이 벽을 짚고 쭉 따라가면 됐지.”

나는 손으로 벽을 짚은 채 오른쪽으로 쭉 걸어갔다.

걷다 보니 어떤 길이 생겼고, 내가 향하는 방향에서 무지개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왜 저런 빛이 나오냐고? 나도 모른다.

슈우우웅.

7가지 빛깔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 직후. SF영화에서 우주를 뛰어넘는 웜홀처럼, 나는 빛이 번쩍번쩍 발생하는 어떤 통로 속을 유영했다.

반짝이는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가끔은 기괴한 문양의 빛이 지나가기도 하며, 그저 빛이 일직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게 아니야.’

이 자체가 2단계다.

만약 시간제한을 초과해 버린다면 공간이 붕괴하며 차원의 바깥으로 튕겨 나간다.

왕실의 보고는 거대한 퍼즐의 집합이자 미로. 나는 통로 속에서 나를 지나치는 빛줄기를 유심히 관찰했다.

“빨간색!”

저 멀리서 다가오는 빨간색 원형 링.

정확히 말하면 그런 형태의 빛이었다. 나는 목표가 지나가는 순간 그곳에 손을 집어넣었다.

빛의 정중앙으로 내 손이 들어가기 무섭게.

즈유와와아아앙.

기묘한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러면서 옛날 배불뚝이 TV의 전원이 꺼지듯, 빛의 공간이 암전되었다.

다음은 기다리고 기대하던 폭업 구간.

나는 암전된 공간 안에서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압축 주머니에서 넣어 두었던 물약을 꺼내 마시며 다음 라운드를 기다렸다.

오러 재생의 비약, 근력의 비약, 신속의 비약.

그 모두를 목젖 뒤로 넘겨 버릴 즈음.

저 멀리서 점 하나가 다가왔다. 아니, 그것은 점이 아니다.

무언가의 물결? 그것도 아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세계’ 그 자체였다.

“연출이 장난 없네.”

점에서부터 시작된 세계가 몸집을 부풀리며 나에게 밀려 들어왔다.

산과 강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천지창조의 한 장면처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땅에서 초목이 자라나고 바위와 나무가 나를 꿰뚫고 지나갔다.

고통은 없었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나와 이 세계는 단절되어 있었으니까.

적어도 아직은 말이다.

솨아아아아.

이어서 시원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순식간에 제작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정면의 완만한 언덕을 보았다. 옆에는 까마득한 산맥이 세상의 벽처럼 나를 가로막았다.

마치 이 세상은 전진과 후진이 전부인 세상이라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언덕 너머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자!”

“우리 같이 있자!”

“진격하라!”

요상한 외침이 낮은 언덕을 타고 귀에 꽂혔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압축 주머니에서 거대한 무기를 꺼냈다.

파멸의 송곳니, 일전에 폰테인 타워에서 챙겨 두었던 전설의 무기가 흉악한 위용을 드러냈다.

“오러 빨아들이는 귀신이네. 아주.”

2m에 달하는 송곳니가 내 오러홀에서 강제로 기운을 갈취했다.

파멸의 송곳니는 파멸용이라 불렸던 악룡을 죽여서 만들어진 무기.

프레스턴의 두 무기를 제외하고, 전설급의 장비는 모두 하나씩 고유한 스킬이나 특성을 보유한다.

지금이 그 능력을 발휘할 때였다.

“와아아아!”

때마침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언덕 위로 수많은 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붕대를 감은 미라 인형, 소녀들이 갖고 노는 봉제 인형, 팔이 뜯어진 곰 인형 등등.

죄다 100cm도 안 되는 쪼꼬미였다.

여기서 2단계의 첫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일단 저 인형들이 내 몸에 닿으면 뒤진다.

정확히는 이 공간에서 영영 갇혀 살아야 한다.

실제로 인형들 사이에는 아직 인형화(?)가 덜 진행된 것들도 몇몇 보였다.

두 번째로 숫자, 언덕을 가득 채우고 달려오는 인형들의 숫자를 세는 건 무의미할 정도였다.

“111초만 버티면 돼. 아자!”

나는 소리를 지르며 대검을 휘두를 자세를 잡았다.

이 단계의 성공 조건은 인형들이 언덕을 넘어오고 111초를 버티기.

내 뒤에서는 공간이 붕괴하고, 위로는 하늘이 내려앉으며 내 후퇴를 막았기에 도망갈 구석도 없었다.

슈아아아악!

파멸의 힘을 담은 대검이 수평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꽃이 인형들을 덮쳤다.

단번에 백 단위의 불쌍한 영혼이 사라졌다. 뒤이어 전우의 시체를 밟으며 인형들이 돌진한다.

한 번 더.

한 번 더.

오러도, 검강도 담기지 않은 대검이 연거푸 움직였다.

그때마다 나를 향해 달려들던 인형들이 통째로 소각되어 버렸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꽉 차 있던 오러는 어느덧 절반이나 날아갔으니.

나는 팔찌에 있던 오러를 꺼내와 급한 대로 구멍을 메꾸는 데 급급했다.

세상이 화염으로 둘러싸였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주변은 완연한 불바다였다.

파멸의 송곳니에는 ‘필살염’이라는 스킬이 내장되어 있다. 사용법은 대검을 잡고 휘두르면 끝이다.

효과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용자보다 급이 낮은 존재들의 목숨을 무조건 거두는 것.

나는 이 대검의 사용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기에 위력과 범위가 대폭 삭감된 편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충분하지.’

끼야아아앙!

토끼 인형이 귀여운 단말마를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걸 시작으로 나에게 덤비던 인형들이 비명을 질러대며 재가 되어 흩어졌다.

“와, 끝났다.”

나는 오러 잡아먹는 귀신을 황급히 주머니에 넣고서 잔디밭 위에 쓰러졌다.

휴식도 잠시,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스킬 등급이 올랐다는 알림이 하나도 안 뜨는 거지?

‘한 5천에서 6천 마리는 잡은 것 같은데.’

오러의 80%를 소비하며 잡아낸 숫자가 그 정도.

[양손 검 입문]이 성장하기에는 충분할 텐데, 어째 알림이 영수증처럼 시원하게 주르륵 올라오는 맛이 없다.

“상태창. 상태창!”

나는 신경질적으로 시스템을 불렀다.

응답이 없다. 뭐지? 차원의 틈을 통과했다고 상태창이 먹통이 된 건가.

나는 의외의 사실을 깨닫고서 벌떡 일어났다.

‘게임에서는 상태창이 그대로…… 아, 또 시작이네.’

뭔가를 고민해볼 찰나.

갑자기 내 손가락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주변 공간이 왜곡되고 구부러지며 머리는 좁쌀처럼 작아졌다.

게다가 내 사타구니가, 사타구니가 산처럼 솟아올랐다.

다른 때 같았으면 행복한 감정이 앞섰겠지만, 지금은 대신에 짜증이 솟구쳤다.

‘이 짓거릴 언제까지 해야 하냐. 진짜.’

지금은 4단계.

여왕의 남동생은 18단계에 있으니, 대충 앞으로 13개의 공간을 더 지나쳐야 한다는 의미였다.

* * *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는 온몸이 휘거나 상체와 하체가 따로 놀고, 코가 궁둥이로 옮겨 가기도 했다.

때로는 머리카락으로 집을 짓거나, 지느러미 대신에 두 다리가 있는 금붕어와 수영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별 개짓거리를 통해 이제 17단계.

나는 지금 떨어지고 있다.

바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숨은 되게 잘 쉬어지는데 말이야.

파스텔 색조의 분홍색 구름과 따뜻한 햇볕.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의 자유 낙하라니.

정말 멋진 일이네!

나는 문득 이 공간을 공략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차원의 틈>은 절대 혼자서 공략할 수 있는 난이도가 못 되었다.

조건이 까다롭다거나 피지컬을 요구하는 종류가 아니라, 공간이 너무 난해하고 퍼즐이 미로처럼 얽혀서 퀘스트 달성이 불가능했다.

정말 개빡치는 건, 같은 공간이라도 탈출법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 혼돈과 카오스 속에서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하나의 시발점이 되었다.

- 다들 <차원의 틈> 못 깨고 있는데, 정보 공유 하쉴?

이름하여 집단지성,

서로가 발견한 공간과 탈출법을 교환하며 최적의 달성 루트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온갖 어그로와 거짓 정보가 난무했지만.

‘아마 2달쯤 걸렸나.’

엄청난 숫자의 고인물들이 달라붙은 끝에 이 공간의 특성은 대부분 밝혀졌다.

아무튼, 이제 거의 다 왔다. 여왕의 남동생인 로빈 공작을 만나면 그다음은 비교적 쉬우니까.

대략 5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오러로 시력을 강화해 밑의 지형을 살폈다.

시원해 보이는 바다.

꼭 빠져들고 싶은 에메랄드빛 액체가 물결을 치며 출렁였다.

나는 저 바다에 떨어지면 영혼이 녹아내리고, 육체만 남아 차원의 경계 어딘가로 흘러간다는 걸 알고 있다.

왜냐하면 17단계의 공략법을 찾아낸 사람이 바로 김만득이니까.

후우웁,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준비를 했다.

죽음의 바다와 내가 가까워지는 순간.

푸우우우!

볼과 폐에 담아 두었던 공기를 뱉자 작은 바람이 일어났다.

바닥 전체에 깔려있던 넓은 바다. 그 거대한 물결이 내 입김에 밀리더니 이내 차원 저편으로 휙 날아가 버렸다.

진짜 이게 뭔 상황인가 싶어도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여긴 차원의 경계. 사람의 이성으로는 판단하지 못하는 공간이니까.

쏴아아아.

아래에 있던 바다가 날아가자 위에서 뭔가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틀어 확인하니,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위쪽에서 바다가 떨어졌다.

진짜 뭔 지랄이냐.

나는 나를 덮치는 물세례에 몸을 맡기며 18번째 공간으로 넘어갔다.

* * *

야자수 두 그루와 허름한 오두막 하나.

소박한 살림살이가 겨우 들어선 작고 작은 섬에 한 남자가 있다.

겨우 150평 남짓한 섬 주위는 모두 바다였다. 그는 나무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여유롭게 자연의 선물을 기다렸다.

“오늘은 입질이 잘 안 오는군. 그치 로빈? 맞아. 썬데이. 창자가 배에 달라붙을 지경이야.”

30년, 남자는 그 긴 시간 동안 이곳에서 살았다.

오늘은 여느 때와 같은 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언제나처럼 낚시질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뭐, 뭐지?”

보글보글, 그는 갑자기 잔잔한 바다에서 올라오는 공기 방울을 보았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 마법을 준비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작은 공기 방울은 점차 커지며 격렬하게 수면 위를 두드렸다.

이윽고 그 현상이 정점에 다다르자.

“푸하아아! 아으, 씨발, 진짜. 씨발.”

웬 젊은 남자 하나가 바다에서 솟아오르더니 대뜸 쌍욕을 갈기는 게 아닌가.

사내는 힘겹게 물에서 빠져나와 해변에 누우며 말했다.

“로빈 공작 전하?”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남자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왔다.

어부로 보였던 남자는 오랜만에 들은 자신의 이름에 깜짝 놀랐다.

“다, 당신은 누구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빅토리아 5세 폐하의 명을 받고 공작 전하를 구출하러 온 사람입니다.”

“그게 무슨…….”

로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남자의 면면을 살폈다.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은 상대방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젊은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보다 저, 물 좀 주세요. 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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