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54화 (54/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54화>

54. 갱스 오브 퍼스트 (1)

어두운 공간에 놓인 티테이블.

작은 촛불만이 간신히 불을 밝히는 암흑 속에서 백발의 남자가 작은 탁자에 앉아 있다.

남자의 취미는 어두운 방에서 하는 독서였다.

“도대체. 후우.”

오늘따라 책을 읽어도 전혀 행복하지 않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에는 문제가 없다. 안에서 끌어 오르는 감정이 원인이었으니.

황무지로 보냈던 부하들은 대부분 죽거나 도망쳐왔다.

그게 남자의 감정을 나락으로 보내버린 원인이었다.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고.’

마계에서 이 차원으로 발령받았을 때는 모든 것이 좋았다.

이 차원은 마계의 영향권 밖. 마신이나 대악마들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았으니 취미를 즐기기에도 좋았다.

자신이 짠 계획이 모두 틀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니, 아니지. 다시 책이나 읽자.”

남자가 다시 행복한 독서 시간을 가지려던 찰나.

우드득! 누군가 방문을 거칠게 잡아 뜯고서 어두운 공간에 빛을 밝혔다.

남자는 눈을 찌푸리며 무례한 침입자를 노려보았다가 이내 표정에 당혹감이 흘러나왔다.

침입자는 여자였다. 노란색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딴 소녀.

그녀는 앙칼진 목소리로 남자를 몰아붙였다.

“단델리온! 오늘도 방 안에서 책이나 잃고 있냐? 좀 나가서 돌아다녀!”

“로자리아,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증원군이라고 하면 될까? 마신께서 신탁을 내리셨거든.”

“대악마님들이 아니라?”

백발의 남자. 단델리온은 의아함을 느꼈다.

마신의 신탁이라니. 이는 그가 악마 작위를 받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양쪽으로 긴 머리카락을 딴 소녀는 단델리온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그 레드넥이라는 놈들이나, 네가 포섭한 변절자도 모조리 작살 났다며.”

“그거야 부하들이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해서 그런 거지.”

“호오? 지휘관이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는데 부하들이 어떻게 잘하겠어?”

“나는 전략가지 너처럼 앞에 나서서 설치는 싸움꾼이 아니야.”

단델리온은 읽던 책을 품으로 당기며 퉁명스럽게 쏘아댔다.

로자리아는 그 태도에 키득거리며 웃었다. 본인이 대단한 전략가라면 어째서 그 계획들이 모두 허사로 돌아갔겠는가.

“그나저나 신탁이라니. 제대로 이야기해 봐.”

“듣고 싶으면 이 분위기부터 바꿔보든가. 영 칙칙해서.”

탁!

단델리온이 손가락을 튕기자 어두웠던 방이 화사한 꽃밭으로 바뀌었다.

환각 마법. 동급의 악마인 소녀에게도 통하는 그의 특기였다.

로자리아는 장미가 만연하게 핀 꽃밭을 거닐며 향기를 맡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향기 좋은데? 가짜치고는 말이야.”

“빨리 본론이나 말해. 클라이맥스에서 끊겼단 말이야.”

“신탁의 내용은 이번 원정에 ‘변수’가 끼어들었다는 내용이었어.”

“변수?”

“그래, 원래라면 너의 계획이 부분적으로 성공했을 거래. 근데 쫄딱 망했잖아.”

단델리온은 상대의 말에 이를 갈았다.

“후후, 너무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 이번 불상사는 상부에서도 충분히 인정하고 있으니까.”

“아직 하나 남았거든? 노스페라투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야.”

“라일라크의 사생아? 네가 데리고 있는 고위 마족 중에서 가장 약하잖아.”

“혹시 모르잖아. 소설에 나오는 사생아처럼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지.”

“소설을 너무 읽었네. 너는 방구석에서 힘내! 나는 먼저 판게아 대륙으로 갈게.”

그리 말한 로자리아는 이유 모를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렸다.

소녀가 방을 나가려는 순간, 단델리온은 급하게 상대방을 불러세웠다.

“뭐야, 증원군이라며 작전은? 계획은? 그리고 대악마님들께서 정해 주신 네 구역은 평의회 연방이잖아.”

“평의회 연방은 나중에 처리할 거야. 나는 ‘변수’에게 집중하려고.”

“그럼 무역 연합은 어떻게 하라고?”

“일단 하던 대로 해. 모처럼 마신과 대악마님들의 간섭에서 벗어났는데, 너의 게으름처럼 나도 취미를 즐겨야지.”

살짝 고개를 돌린 로자리아의 동공이 세로로 갈라지며 뱀의 그것처럼 변했다.

섬뜩함을 느낀 단델리온은 어깨를 움츠리며 생각했다.

집착의 악마. 로자리아는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다.

‘변수가 뭔지는 몰라도.’

사람이라면 곱게 죽지는 못하겠군.

단델리온은 어깨를 털며 다시 책을 펼쳤다.

* * *

내가 소개장을 받고 제프의 저택에서 나왔을 때.

창피함을 몰아낸 스칼렛과 딸을 위로해주던 데이브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나는 우선 그들에게 다가가 뒤의 이야기를 설명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일은 잘 풀렸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스칼렛을 받아 주시겠다고 결정하셨단 말인가?”

“아마 그 집사장에게 듣고 우리의 정보를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언제나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라. 어쨌든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군.”

데이브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딸이라도 지켜냈음에 마음의 위안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반면에 스칼렛은 내 말을 듣고 잘 찡그리지 않았던 미간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니, 그렇다면 원래 도와줄 생각이었다는 거잖아.”

“그건 아닐걸. 아마 너를 시험한 게 아닌가 싶어.”

“시험?”

“투자할 만큼 배짱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나 봐.”

“으으.”

스칼렛은 이를 갈며 제프의 저택을 노려보았다.

오늘이 할아범 제삿날인가? 나는 킬각을 보는 소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하지만 소녀는 이내 분노를 가라앉히며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복수할 거야. 지금 말고, 더 강해져서 확실하게 복수할 거야.”

“나도 그 복수를 도우마.”

복수를 해도 고깃값을 벌겠다.

어느 영화에 나온 대사처럼 스칼렛은 도움이 되는 쪽으로 복수를 완성하고자 했다.

록펠스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박아 넣어, 제프가 부정했던 것들이 전부 옳았음을 증명하기로 말이다.

데이브는 그 다짐에 힘을 실어 주겠다고 말하며 딸의 눈을 지긋이 보았다.

“눈은 네 어미를 똑 닮았구나.”

“엄마는, 제 머리카락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고 그랬어요.”

“지금 보니 그런 것 같구나.”

“맞아요. 저도 이제 알 것 같아요.”

데이브와 스칼렛은 마주 보며 웃었다.

아버지는 딸을 만났다는 점에서, 딸은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둘은 그렇게 몇 분이 넘도록 서로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극적으로 재회한 부녀의 애정이 애틋한 건 인정하는데.

언제까지고 이 둘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크흠, 세컨드 시티에는 맛있기로 소문난 식당이 많다던데.”

“앗! 정말?”

내가 마법의 주문을 외우자 소녀의 복부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분명 스칼렛은 어젯밤부터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단순한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터.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배고프다.”

“일도 잘 풀렸으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

“잠시만! 이곳은 내가 잘 아니 내가 안내하도록 하겠네.”

자연스러운 흐름.

데이브는 딸에게 점수를 딸 생각으로 다급하게 나를 막아섰다.

스칼렛의 아버지가 거대 그룹의 부회장이다.

그야말로 최상의 물주가 아닌가.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데이브에게 안내를 맡겼다.

‘달아, 너무 달아.’

우리는 데이브가 불러 준 기다란 무인 마차에 올라탔다.

마정석을 원료로 써서 바퀴가 굴러가는 마차. 이름하여 ‘자동차’ 되시겠다.

형태는 지구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세단 리무진과 흡사했다.

“어? 이 마차는 말이 없네.”

“시범적으로 운용하는 마차란다. 소리도 작고 말을 관리할 필요가 없다는 게 장점이지.”

두 부녀가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익숙하게 가죽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운전석은 뒷공간과 벽으로 막혀 있었고, 데이브는 창문 너머의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었다.

우우웅, 마공학 엔진이 특유의 소리를 내자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으어으어. 뭔가 위험해.”

스칼렛은 혹시나 자동차가 갑자기 멈추지 않을까 불안해했다.

그 광경을 본 데이브는 아버지 특유의 미소로 딸을 바라보다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식을 맡기는 보호자의 눈빛이 느껴졌다.

“이제 무역 연합을 떠나면 당분간은 다시 못 보겠군.”

“아마 1년에서 2년 정도는 페트릭 교수 밑에서 있어야 할 겁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군. 다른 어려움은 없겠나?”

“뭐, 빈민가에서도 잘만 살았는걸요. 그치, 스칼렛?”

“응! 나는 거기서 뭘 배울지 정말 기대되는걸.”

스칼렛은 이전에 나와 대화하며 페트릭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텔런트를 전문으로 육성하는 교수, 가뜩이나 난해한 텔런트를 지녔기에 스칼렛은 내 제안에 선뜻 동의했다.

‘근데 아무것도 모르는 저 어린 양의 미소는 조금 웃기는데?’

페트릭 교수는 말 그대로 한 분야를 탐구하는 학자다.

지구의 대학원처럼 논문과 과제의 지옥 속에서 억겁의 고통을 받을 터.

나는 진심으로 스칼렛의 미래를 응원했다.

“너라면 분명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응? 느낌이 이상한데. 루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거 있어?”

스칼렛은 실눈을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지.”

“그런가. 근데 너도 같이 시타델로 갈 거잖아. 왜 말을 꼭 헤어지는 것처럼 말하는 거야.”

“헤어지다니. 자네도 왕가에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부녀는 일제히 나를 보며 물었다.

물론, 시타델로 가기는 할 것이다. 그 시기가 조금 미뤄졌을 뿐.

“응, 나는 잠시 들렀다가 갈 곳이 있어서. 너만 먼저 시타델로 가 있어. 나는 천천히 따라갈게.”

자유 무역 연합의 메인 이벤트는 총 4개.

그중 3개는 직간접적인 수단을 통해 끝내 놨고, 이제 무역 연합을 위협하는 큰 줄기는 하나만 남아 있다.

특이한 점은, 그 이벤트는 스칼렛이나 클리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

“그러면 나도 천천히 갈래.”

스칼렛은 아주 정확히 예측한 반응을 내놓았다.

홀로 남는 걸 두려워하는 트라우마는 거의 극복했다지만, 아직 완전히 아물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동행자가 붙으면 되지.

“잠시 들릴 곳이 있어서 그래, 위험한 곳도 아니고. 음, 부회장님도 이참에 시타델로 여행 한번 다녀오시죠?”

“뭐? 아, 그. 물론이지! 스칼렛, 내가 시타델까지 동행해도 괜찮겠니?”

“네? 아, 어. 저는 좋아요. 데이브 씨. 아니, 부회장님. 아니, 아빠가 귀찮지 않으시다면요.”

부녀는 언어 능력이 퇴화한 사람들처럼 허둥댔다.

그래, 제발 이 어색한 대화 상태도 좀 해소하란 말이야.

이해는 가지만, 둘 사이에 끼어 있으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흠흠, 스칼렛, 늦어도 일주일이야. 그 정도는 이해하지?”

“알겠어. 이제 나도 겁쟁이는 아니니까!”

결국, 스칼렛은 의존증을 물리쳤다.

제프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선포한 이상, 어떤 방면으로든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싱글벙글 웃던 데이브는 품에서 물건을 꺼냈다.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네. 편히 쓰게.”

검은색 금속 카드.

록펠스 그룹의 영향력이 닿는 곳이라면 그룹 임원급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소위 ‘블랙 카드’란 말이다.

‘아버님이 아주 화끈하시네.’

아무래도 딸이랑 함께 가도록 기회를 준 보상일 터.

나는 넙죽 카드를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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