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52화 (52/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52화>

52. 위대한 열차 도둑 (2)

열차 강도극으로 바짝 달아올랐던 기관차의 온도는 빠르게 내려갔다.

데이브와 스칼렛은 눈을 멀뚱멀뚱 뜨며 서로에게 의문을 표시했고, 나는 가만히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참, 혹시 모르니 오러로 기관차에 기막을 설치해야지.

“엄마라니…… 당신이잖소! 메리, 설마 나를 잊은 것이오? 나를 만나기 위해 강도로 변장한 것이오?”

데이브의 총명하던 눈동자가 순간 흐려지며 갑자기 스칼렛에게 달려들었다.

그 행동에 놀란 소녀는 염력으로 데이브를 밀쳐냈다.

투웅! 허공을 날아오른 데이브는 꼴사납게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엎어졌다.

제정신이 들었는지, 부회장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갑자기 달려들어서 그만.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아는 사람이랑 헷갈린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더 잘못했어요.”

“아닙니다. 이건 온전히 저의 잘못입니다.”

“절대 아니에요. 제가…….”

고만해, 미친 부녀야!

둘은 서로 고개를 내리깔며 사과를 거듭했다.

대뜸 사과하는 버릇도 유전인가. 나는 복면을 내리면서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소녀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데이브에게 힌트를 주었다.

“스칼렛, 그게 아니잖아. 이 사람에게 목걸이에 대해 물어야지.”

“잠시만, 스칼렛?”

데이브의 머리에 다시금 어떤 스위치가 들어왔다.

엄마, 스칼렛, 목걸이.

3가지 단어를 끊임없이 회전시키던 데이브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혹시, 그 목걸이라는 게 은백색 광채가 나는 결정 덩어리인가요.”

“네, 맞아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스칼렛은 거리낌 없이 목걸이를 꺼냈다.

뚝, 뚝뚝, 데이브의 볼을 타고 흐르는 선명한 물줄기. 그것이 턱에 고였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구슬픈 소리를 내었다.

이쯤 되니 눈치가 0에 가까운 사람도 슬슬 촉이 올 터.

스칼렛은 멍한 얼굴로 데이브의 얼굴을 살폈다. 다만 그녀의 표정은 감동이나 기쁨의 감정은 도통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보다 메리는 안 오고 어째서 혼자 온 거니?”

“엄마는 몇 년 전에 죽었어요.”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데이브와 다르게 스칼렛의 음성은 싸늘했다.

뭔가 오해가 쌓이고 쌓여 엄청난 스노우볼이 구르는 것 같은데.

나는 관계가 파탄 나기 전에 다시금 나서서 막장 드라마로 흘러가는 상황을 저지했다.

“데이브 부회장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시죠.”

“아, 그렇군요. 확실히 지금은 상황이 나쁘니 어쩔 수 없죠. 근데 핑거톤 소속이라는 이야기는 거짓말입니까?”

“아뇨, 저는 프레스턴 단장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탐정 루카라고 합니다.”

데이브는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공손하게 예의를 지켰다.

기본적으로 선한 이미지. 피는 못 속인다고 분위기 자체가 스칼렛과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아, 그렇다면 제가 들은 이야기는 모두 사실…….”

“그건 구라였습니다.”

나는 빠르게 사과를 박으며 웃어 보였다.

* * *

세컨드 시티.

공장의 굴뚝과 기찻길이 도처에 깔린 도시.

밤이 깊은 도심지에는 전동차가 승객들을 실어 날랐고, 술집에는 삼삼오오 모인 노동자들이 술판을 벌였다.

“이 도시는 뭔가 활기가 넘친 것 같아.”

스칼렛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호텔 방 안에서 창문 너머의 도시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나름의 행복감이 깃들어 있다. 그만큼 자비로운 노동 체계가 잡혀 있다는 의미.

나는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 뒤, 울적해 보이는 소녀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너를 버린 거 같아서 심란해?”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사실 맞아.”

스칼렛은 순간 부정했다가 한숨을 푹 쉬며 인정했다.

데이브는 록펠스 그룹의 차기 회장이 될 남자.

아내와 딸을 책임지는 게 힘들었다면 차라리 이해가 가능하지만, 그만한 부자가 설마 생활고에 시달렸겠는가.

이건 그냥 버리고 떠난 게 분명하다.

‘대충 그런 생각이겠지.’

결론적으로, 데이브는 스칼렛과 그녀의 어머니를 버리지 않았다.

항상 이런 아침 드라마급 전개에는 빠지지 않는 부류가 있기 마련이다.

단란한 가정을 파괴하는 욕망의 화신들. 분노의 대상은 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쪽에 있었다.

“스칼렛, 아직 결정된 건 없어. 네 아버지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가.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스칼렛은 내 말에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 냈다.

데이브와 약속한 시각은 밤 10시. 벽시계를 살펴보니 이제 곧 시간이 다 되었다.

똑똑, 때마침 호텔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그, 문 좀 열어 주지 않을래?”

데이브의 목소리.

나는 주변의 기운을 감지하고 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경호원 둘에 노년의 남자가 한 명. 데이브에게 찰싹 붙은 노인네는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우선 들어오시죠.”

“고맙습니다. 여기 레너드는 어렸을 때부터 저를 봐줬던 사람인데, 같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리고 말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역시나 레너드도 함께 왔네.

나는 데이브를 따라 방으러 들어온 노인을 주시하며 긍정을 표했다.

록펠스의 집사장 레너드. 기차에서 조종사가 처음에 말을 걸었던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었다.

“고맙네. 자네 둘은 밖에서 기다리게.”

부회장의 명령에 두 경호원이 고개를 숙였다.

데이브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스칼렛은 자리에서 일어나 쭈뼛쭈뼛한 자세로 먼저 운을 뗐다.

“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래, 전부 말해 주마. 그보다 메리가 죽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니.”

“제가 어렸을 때 병에 걸려서 돌아가셨어요. 설마 모르셨어요?”

스칼렛은 본인이 살아온 삶을 짧게 축약해서 설명했다.

빈민가에 살았던 기억, 어머니를 여의고 나와 클리프를 만난 기억 등등.

대부분이 고되고 힘들었던 과거였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데이브는 뒤에 선 노인을 노려보았다.

“레너드. 이게 무슨 말이지?”

“……면목 없습니다.”

“설마, 아버지가 시킨 일인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스칼렛의 아버지는 집사장에게 화를 내려다가 주먹을 꽉 쥐며 참았다.

역정을 내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과오에 대해 사과할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쿵, 데이브의 두 무릎이 바닥에 떨어졌다.

“미안하구나, 전부 내 불찰이야. 나는 너랑 메리가 퍼스트 시티에서 잘 지내고 있는 줄만 알았단다.”

“그 말씀은, 저랑 엄마에게 일어난 일을 몰랐다는 말이세요?”

“믿을진 모르겠지만 그렇단다. 메리와 나는 퍼스트 시티의 작은 극장에서 만났단다…….”

데이브는 푸념하듯 과거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 우연히 만난 재벌 4세와 극단 여배우의 사랑 스토리.

우선 ‘내 뺨을 후려갈긴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뻔한 줄거리는 주르륵 흘려보낸 뒤.

문제의 시작은 메리가 스칼렛을 출산한 이후부터였다.

“아버지, 그러니까 너의 할아버지는 메리와 만나는 걸 아셨고, 나에게 둘을 포기하고 가업에 신경 쓰라고 하셨단다.”

데이브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말을 이었다.

현 록펠스 그룹의 회장, 제프 록펠스는 메리와 아들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아예 끝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들의 완강한 태도 덕분에 둘은 협상을 통해 사안을 해결했다.

후계자로서 역할만 제대로 한다면, 이후에 스칼렛과 메리의 존재를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제안을 수락하고 메리와 너의 곁을 떠났단다.”

“셋이서 사는 게 더 행복했을 거예요. 굳이 저희 곁을 떠나서야 하셨나요?”

“안 그랬다면…… 아버지가 너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란다. 네 할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니까.”

데이브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회장직을 물려받을 때까지 잠시 떨어져 살기로, 그리 약속한 이후로 근 20년이 지났다.

이건 분명 제프 록펠스의 농간임을 알았지만, 메리와 스칼렛의 신변은 회장이 확보하고 있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데이브는 최소한 그리 생각하며 여태껏 살아왔다.

“분명 6개월 전에도 메리의 편지가 나에게 왔었는데, 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상한 점이 많구나.”

“엄마는 돌아가시고 거의 8년은 되었는걸요. 그리고 원래 살았던 곳이 지옥 같은 곳이어서 도망쳤다는 말도 하셨어요.”

“그래, 결국 내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 가족이 큰 고통을 겪었구나.”

데이브는 주먹에 힘을 주며 부들부들 떨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임에도 스칼렛을 보며 최대한 화를 삭이는 모습이었다.

적막한 공기가 공간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무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야 적당히 판을 짜고 있었지.

“다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지금 시간이 많이 늦은 것 같아서요.”

“그래,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스칼렛, 나중에 다시 찾아와도 되겠니?”

“……네, 그리고 다음부터는 굳이 무릎을 꿇지 않으셔도 돼요.”

스칼렛은 말하고서 침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데이브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저게 어떤 의미를 담긴 행동이냐는 뜻이었다.

“진심은 통한 모양이네요. 원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스칼렛은.”

“다행, 다행이구나.”

데이브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레너드가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집사장을 밀치며 감췄던 분노를 드러냈다.

“자네는, 나에게 절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네. 도대체 메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회장님은 메리 아가씨가 버티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메리가 스스로 도망치도록 만들었다는 건가! 나에게는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속이고 만나지도 못하게 하면서?”

데이브가 소리 높여 윽박지르자, 레너드는 어쩔 줄 몰라하며 거듭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회장님의 명을 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메리를 찾지 못했나. 그룹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도.”

“회장님에게 스칼렛은 눈엣가시였으니까요. 굳이 공들여서 찾을 필요는 없었겠죠. 내심 그걸 바라기도 하셨을 테고.”

대답은 레너드가 아닌, 나의 입에서 나왔다.

데이브는 나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 여기서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네.”

“아뇨, 사실 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자네가? 스칼렛을 도와준 건 고맙지만, 여기까지도 충분하네. 이제부터는 내 몫이야.”

“이왕이면 짐을 나누는 게 좋잖아요. 저기 할아버지처럼, 가문 내에서 부회장님을 도와줄 사람도 없고요.”

레너드는 데이브가 가장 믿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도 배신하는 판국에 그룹 내에 데이브의 편이 있을 리가.

잠시 고민하던 부회장은 결국 내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좋네, 그 방법이 뭔지 부디 말해 주게. 근데 레너드가 들어도 되겠나?”

“계략을 펼치는 건 아닙니다. 외람되지만, 회장님은 가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원하는 거겠죠? 스칼렛은 그 기준에 미달인 거고요.”

“평생 계산기처럼 살아오신 분이라. 어쨌든, 자네의 말이 맞네.”

“그럼, 능력을 증명하면 됩니다. 보셨듯이, 저희는 록펠스의 보안을 뚫고 기차 강도짓도 했는 걸요.”

데이브는 나름대로 수긍하는 눈치였다.

제프 록펠스는 능력이 출중하거나, 배경이 뛰어난 사람을 좋아한다.

안타깝게도 스칼렛의 어머니는 둘 모두 충족이 안 되었고, 스칼렛도 이전까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아무래도 이렇게 이야기할 게 아니라. 날을 잡는 게 좋겠습니다. 회장님을 만나야 일이 해결될 테니까요.”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긴 하지.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네. 자네가 아무리 스칼렛의 친구여도 목숨을 걸고 이러는 이유가 뭔가.”

데이브는 근본적인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후, 이렇게 핵심을 꿰뚫는 질문을 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야 친구의 행복. 그리고 세상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서죠.”

나는 그의 물음에 티 없이 맑은 미소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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