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50화 (50/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50화>

50. 잃어버린 아빠를 찾아서(5)

리엔필드 지사장의 방.

값비싸 보이는 양복을 차려입은 노신사는 장부를 보고서 나에게 말했다.

“해결사라고 하셨소? 원하는 게 무엇이오. 내 최대한 맞춰 드리리다.”

이 현명함의 냄새.

지사장에게서 스멀스멀 뻗어 나오는 향긋한 음험함에 나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잠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원하는 건 명확하지만, 곧바로 속마음을 내보이는 건 아주 위험했다.

“단도직입적으로 군용탄 5만발. 그 정도면 우리의 우정이 아주 돈독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만한 돈을 당장 마련하기는 힘드오. 몇 주라도 말미를 주면 안 되겠소?”

“글쎄요. 받아야 할 돈을 못 받으면 이자가 붙기 마련인데. 그건 무엇으로 내실 겁니까?”

리엔필드의 지사장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돈을 내는 것도 어지러운 판국에, 빨리 주지 않는다고 추가 금액까지 요구하다니.

완전 순 날강도가 아닌가. 대충 이런 감정이 그의 얼굴에서 흘러나왔다.

“사실 내일 오후에 세컨드 시티로 떠나서, 돈을 마련하려면 많이 시간이 걸리오. 조금 이해해 주시오.”

“경우가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중요한 문서를 앞에 두고서 여행이나 가십니까?”

“여행이 아니라, 록펠스 그룹에서 시승식 초대장이 와서 불참하기가 어렵소.”

“뭐야, 결국 이것보다 그쪽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승식이 중요하긴 해도, 이 장부보다 중요도가 높지는 않다.

초대장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리엔필드 컴퍼니지, 지사장의 이름으로 나오는 게 아니니까.

정 급한 일이 있다면 다른 간부가 대신 가도 된다는 뜻.

이는 최대한 시간을 벌며 나를 입막음하거나 약점을 캐내려는 의도였다.

“잠시만. 아무리 짧아도 일주일은 걸리는데. 그동안은 기다리셔야 합니다.”

지사장은 손을 뻗으며 내 행동을 제지했다.

내가 함정임을 눈치채자 다급하게 전략의 뱃머리를 돌린 것이었다.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상대가 다급한 마음을 드러냈으니 나는 그만큼 여유롭게 입을 열 수 있었다.

“마침 잘됐네. 그 초대장 내가 씁시다.”

“그건…….”

“솔직히 말하는데, 내가 당신네 구역인 이 스틸 타운에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겠어? 스리슬쩍 죽여 버리면 티도 안 나잖아.”

“당연히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저희가 마피아도 아니고.”

“말로는 누가 못 해. 가장 안전한 방법은 당신 대신에 내가 그 기차에 타는 거야. 대충 젊은 간부에게 초대장을 인계했다고 하면 되잖아?”

스틸 타운에서 떠난 기차는 세컨드 시티에서 며칠 동안 파티를 마치고 되돌아온다.

그때까지 나는 록펠스 그룹의 경호를 받으며 안전하게 지내고, 지사장은 돈이나 준비하라는 의미였다.

다소 무리한 부탁임은 맞았지만, 리엔필드 지사장이 거절할 입장은 못 되었다.

“설마 내가 이 마을에 남아서 두려움에 벌벌 떨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그럴 바에는 그냥 수사국의 높은 양반에게 팔아넘기는 쪽이 훨씬 마음 편하다고.”

“아뇨, 당치도 않습니다. 다만…… 시승식은 사교 파티인지라.”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생각해 봐. 그 서류는 어디서 얻었겠어. 내가 변장술과 잠입술로 해결사 타이틀도 딴 사람이야. 나한테 5초만 주면 기업가, 거지, 용병, 농부, 상인 등등. 마음먹은 뭐로든 변장할 수 있다고.”

지사장은 무어라 대꾸하지 않았다.

워낙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내며 [위압자]의 효과가 더해지니, 저절로 그 말에 믿음이 가는 것이었다.

결국, 지사장은 서랍에서 종이 봉투를 꺼내며 내밀었다.

“저, 하나 더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사교 파티는 꼭 파트너가…….”

“알아, 알아. 나랑 같이 활동하는 여자가 있으니까 데려가면 되지. 그 여자도 프로 중의 프로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면 록펠스 쪽에는 젊은 간부가 대신 가는 거로 말해 놓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일주일 뒤에 보자고.”

나는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며 인사를 하고 나왔다.

상대는 나를 미행하거나 뒷조사를 벌일 터. 내가 건물에서 나와 길을 걷자, 역시나 뒤에서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오러 사용자, 리엔필드 쪽의 추적자가 내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이쯤에서 제대로 실력을 보여 줘야 잔머리를 안 굴리지.’

나는 은폐의 반지를 장착하고 오러를 끌어올렸다.

내 신형이 바람을 만난 촛불처럼 훅하고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를 쫓던 자들도 그 순간을 인지하지는 못했다.

후웅.

바람을 타고 건물의 벽을 질주했다.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내 몸을 강화했고, 사람들은 거리를 질주하는 내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그림자. 어둠에 스며들어 밝은 곳을 지켜보는 그림자가 된 느낌이었다.

나는 약간의 인기척을 내비치며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갔지?”

“빨리 찾아. 골목으로 들어갔어.”

추격자들은 나를 쫓아 깊숙한 골목으로 들어왔고.

서걱, 순식간에 뽑은 시미터에 둘의 흉부가 갈라지며 바닥에 핏물이 뿌려졌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두 사람을 보다가 다시 오러를 끌어올려서 장소를 벗어났다.

‘실력은 보여줬으니, 날 쉽게 생각하지는 못하겠지.’

내가 죽인 자들은 모두 오러를 배운 자들이었다.

리엔필드에게서는 최정예 요원일 터. 그런 자들이 단칼에 죽었으니 나에 대한 약속은 일단 지킬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고 정산일이 다가올 때를 노리겠지.

그 누가 막대한 보상금을 포기하고 잠적하겠는가.

추적자를 보내는 방식이 실패했으니 그들은 더 꼼꼼하게 계획을 다듬어서 나를 노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쯤이면 자유 무역 연합에 없을 테고.’

* * *

다음 날 오후.

나와 스칼렛은 의상실에서 스타일링을 받고 정해진 정거장으로 왔다.

호화스러운 마차들이 줄줄이 스틸 타운의 정거장으로 들어왔고, 여러 유명인사와 자본가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루카, 나 떨려.”

나와 팔짱을 낀 스칼렛이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공작새의 깃털이 장식된 작은 예모, 그것에 달린 검은색 망사로 얼굴이 가려진 스칼렛은 여느 귀부인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아니, 미모라는 기준에서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스칼렛에 비빌 엄두조차 못 낼 것이다.

“여기서 네가 최고야. 원래 젊음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거라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그러지. 루카가 말한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들키면 안 되잖아.”

“만약 자신이 없다면, 그냥 말을 하지 말고 살짝 웃어 주면 충분해. 알겠지?”

“응.”

붉은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은 스칼렛이 뒤뚱뒤뚱 나를 따라 걸었다.

나는 연미복에 신사모를 썼고, 혹시 몰라 은폐의 반지를 껴서 최대한 일반인처럼 위장한 상태였다.

“록펠스 익스프레스의 시승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장은 가져오셨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예, 확인됐습니다. 통로를 따라 VIP 전용 플랫폼으로 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직원은 90도로 인사하며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오랜만에 만나는군! 주류 업계는 난리라던데. 자네 얼굴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죽지 못해서 살죠. 그런데 요새 세븐 시티에 관련해서 투자 제의가 많이 와서 희망이 보입니다.”

“파이브 시티의 리먼 그룹에서 눈독을 들인다던데. 우리가 먹을 게 있겠나?”

“그게 말입니다. 어떤 소문이…….”

주변에서 기업가들의 과시가 경쟁하듯 불타올랐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이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자, 기가 팍 죽은 스칼렛은 나에게 더욱 바짝 붙었다.

솔직히 나도 저 틈에서 대화할 엄두는 안 나긴 해.

‘그냥 구석진 곳에서 짜져 있어야지.’

안 그래도 화려한 VIP 전용 플랫폼은 벨벳과 실크로 단장되어 더욱 화려했다.

어느 연회장의 메인 홀처럼. 화려하게 장식된 플랫폼의 정면에는 아직 텅 비어 있는 선로가 보였다.

어차피 그동안 할 것도 없으니, 나와 스칼렛은 구석진 곳에 마련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차라리 술이나 맘껏 주지.”

“나는 고기.”

우리가 저마다 소원을 허공에 빌자, 요술 램프의 지니처럼 주변에서 대기하던 고용인들이 테이블에 음식을 퍼 날랐다.

내가 원하는 버번 위스키랑, 스칼렛이 원하던 각종 고기 음식까지.

테이블에 올라온 음식들은 소녀 속에서 잠자던 야수를 불러일으켰다.

스칼렛은 긴장감을 확 몰아내며 음식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도 먹을 게 들어가는구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식기는 사용한다는 정도.

나는 술을 홀짝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우리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우리를 무리에 섞이지도 못할 종자로 판단했나 보지.’

급이 좀 비슷해야 비교하면서 우위를 나누지.

엉성하고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은 우리는 그들과 상종할 부류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한창 파티가 무르익는 순간.

“신사 숙녀 여러분. 저희 록펠스 익스프레스의 신형 기차 시승식에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교회장으로 변한 플랫폼에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록펠스 그룹의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목을 한곳에 모으자, 멀리서 철로를 따라 다가오는 거대한 물체가 보였다.

“설명에 앞서, 지금 정거장으로 들어오는 기차에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록펠스 그룹이 선보이는 새로운 급행 열차! RTX01형 기관차를 소개합니다!”

남자의 힘찬 소개와 함께 사람들의 눈과 귀가 현혹되었다.

쇠가 맞부딪히는 마찰음. 철로 위를 질주하는 강철의 말이 굉음을 일으켰고, 그 거대한 덩치에 놀란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열어 떠들었다.

“아니, 증기 기관차가 아니잖아?”

“소문으로는 마정석을 연료로 사용하는 엔진을 제작했다더군.”

“소금왕이 시타델에서 기술자들을 영입했다더니, 대단한 놈을 만들었어.”

방귀 꽤나 뀐다는 사람들이 지식을 자랑하며 조잘거렸다.

물론, 나도 격양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거장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거구의 열차, 증기 기관차가 주력인 이 황무지에 지구의 열차와 엇비슷한 외형을 가진 것은 드물었으니까.

끼이이이이.

급행 열차는 정거장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직원은 계속 입을 놀리며 기차에 관련된 정보를 알려 줬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짝짝짝, 거대한 박수 소리. 기차 안에 타고 있을 사람에게 보내는 찬사와 아부가 플랫폼을 멋들어지게 장식했다.

‘드디어.’

나는 곁에 있는 스칼렛의 면면을 살폈다.

소녀는 해맑게 손뼉을 치며 분위기에 동조된 모양이었다.

그래, 아직은 감도 오지 않을 테지.

나는 고개를 돌려 문이 열리고 있는 신형 기차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윽고 적발의 중년 남자가 기차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이렇게 자리를 빛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록펠스 그룹의 부회장, 데이브 록펠스입니다.”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살짝 수줍은 미소로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소금왕, 운송업의 거부, 무역 연합의 두 번째 별.

거대한 회사의 연합체를 이끄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순박한 사내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나는 남자와의 만남을 기다려 왔다.

장차 내 물주가 될. 아니, 스칼렛이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친부이니까.

‘정말이지 멋진 사람이야.’

나는 괜히 입맛을 다시며 그 중년 남자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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