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49화 (49/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49화>

49. 잃어버린 아빠를 찾아서(4)

깊은 밤.

스칼렛과 루카는 높은 언덕 위에 간이 캠프를 만들었다.

둘은 번갈아 가며 불침번을 섰고, 차례가 돌아온 스칼렛은 모닥불을 앞에 두고 하늘에 뜬 별을 바라보았다.

‘세컨드 시티에 가면 아빠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고민이 많은 밤이다.

루카는 소금 목걸이가 단순한 선물이 아닐 거라고 말했다. 스칼렛은 처음에 실망했지만, 그 말을 듣고 납득했다.

잘은 몰라도 연금술은 굉장히 값비싼 재료가 들어가는 작업.

일개 소금 덩어리에 공을 들여 보관할 정도라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으아, 모르겠다아.”

스칼렛은 기지개를 켜며 푹신한 침낭에 몸을 눕혔다.

‘도시에서 봤던 연극처럼 될지도 몰라.’

세븐 시티에서 보았던 연극에는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대부분 사랑이나 영웅의 서사시. 혹은 이별한 가족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중에서 이별한 가족이 상봉하는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주인공이 가족을 만나 얼싸안으며 다시 하나가 되거나, 피비린내가 나는 복수극이 되거나.

스칼렛은 ‘복수’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복수라.”

스칼렛은 기어이 단어를 소리 내어 밖으로 내보였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기분이 이상하다.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무언가. 누군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기분마저 들었다.

또 다른 내가 될 것만 같은 느낌.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과거에는 이 감각에 사로잡혀 편하게 몸을 맡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스칼렛은 누운 채로 몸을 돌려 루카의 침낭을 확인했다.

“으으.”

밝은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

스칼렛을 스칼렛으로 남게 해 준 사람이 잠에 빠져 있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이 남자는 가끔 이런 표정으로 꿈을 꾸곤 했다.

처음 알게 된 것은 미트 타운에서 현상범들을 잡으러 다녔을 때였다.

“사,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모쏠 아다 루카로…… 죽고 싶지 않아.”

오늘은 조금 더 심한 것 같네.

스칼렛은 자리에서 일어나 악몽을 꾸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마에 손을 올리니 차갑게 식은 땀방울이 느껴졌다. 주머니에 있던 수건으로 이마의 땀방울을 걷어낸 뒤.

스칼렛은 익숙한 듯 허벅지에 남자의 머리를 올리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그래. 뭐가 그리 무섭니.”

루카.

스칼렛은 마지막에 이름을 부르려다가 멈칫하며 입술을 다물었다.

퍼스트 시티에서 개척지로 온 직후, 루카는 이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딴판이 되었다.

단순히 철이 들었다던가, 성격이 바뀌었다는 정도가 아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으. 으으.”

고통스러워하던 남자의 얼굴은 점점 온화하게 변해갔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스칼렛의 손길이 닿으면 금방 안정을 되찾곤 했다.

한참 동안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자, 이내 평온을 되찾은 남자는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집. 김치찌개 잘하네. 저번부터 먹고 싶었는데.”

“큄취짜개? 그게 뭐지?”

스칼렛은 먹을 것에 반응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방금 말한 음식이 어떤 건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다만 평소에 루카는 뭔가를 콕 찝어서 먹고 싶어 한 적이 없다.

그러니 분명 엄청 맛있는 게 분명하다!

“뭔지는 몰라도 분명 맛있는 거겠지?”

루카가 말한 거니까.

이번에도 스칼렛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루카는 바뀌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라고 한 것처럼.

50번 개척지에 있었을 때부터 조금씩 느꼈지만, 세븐 시티로 오는 도중에 그 위하감은 더욱 짙어졌다.

과거 이야기를 꺼내면 루카는 항상 시큰둥하게 답했다.

처음에는 워낙 안 좋은 기억이어서 그런가 했는데, 아무리 봐도 그 태도는 너무 수상했다.

그리고 그 의심에 쐐기를 박은 건 세븐 시티에서 하수도를 토벌할 때의 대화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적 없다고 대답해 주기를 바랐는데.’

삼총사는 하수도에서 살았던 적이 없다.

최소한 스칼렛이 합류해 삼인조가 된 이후부터는 그랬다.

어쩐 일인지 루카는 그 물음에 긍정을 표했고, 스칼렛은 루카가 본인이 알던 친구가 아님을 깨닫고 말았다.

사실 세븐 시티에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도 숨기고 싶은 고민은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나를 대하는 모습은 예전과 거의 비슷하잖아.’

어째서 본인에게 일어난 변화를 말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길은 없었으나 먼저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루카는 항상 스칼렛의 마음을 먼저 알아보았고 직접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

스칼렛을 영웅으로 만들어줬으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임을 알려 주었다.

그런 고마운 사람의 비밀을 간단하게 물어볼 수 있겠는가.

언젠가 스스로 비밀을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려 줄게.

스칼렛은 미소를 머금고서 편히 잠든 루카를 빤히 보았다.

루카의 비밀은 조금 전에 꾼 악몽과 관련이 깊을 터.

그의 무의식에 깔린 거대한 공포,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루카의 곁을 지킬 것이다.

루카는 친구니까.

“잘 자, 나의 영웅.”

스칼렛은 연극에서 들었던 대사를 전하며, 다시금 하늘에 뜬 별로 시선을 옮겼다.

* * *

스틸 타운.

이곳은 세컨드 시티 동쪽에 있는 위성 마을이다. 주요 산업은 제철과 군수 산업.

세컨드 시티는 크기 자체가 큰 편은 아니지만, 도시를 기준으로 연결된 거대한 철도 네트워크를 통해 유기적인 자원 흐름을 구축했다.

“내일 록펠스 익스프레스의 신형 급행 기차가 역으로 들어온다더군.”

“그러면 이번에 최속 기록을 갱신하는 건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광고가 붙은 걸 보면 그건 문제도 아닌 것 같아. 듣기로는 구동계 자체가 다른 기차랑은 다르다던데.”

마을은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몇 년에 한 번씩, 황무지 운송업의 거부인 록펠스 그룹에서 선보이는 신형 기차는 그만큼 높은 기대를 받았다.

스칼렛은 이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마부석 옆자리에서 몸을 흔들며 흥을 감추지 못했다.

“루카, 무슨 축제라도 하는 것 같아. 새로운 기차라는데 우리도 구경 갈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축제에 참여하려면 드레스 코드도 맞춰 입어야 하니, 일단 근처에 의상실로 가자.”

“엥, 정말로? 나는 그냥 해 본 말인데.”

“기차의 본고장에 왔는데, 최신형 기차에 타보지 않으면 손해잖아.”

“그런가.”

“게다가 기차에는 네 목걸이에 대해 알 만한 사람도 탈 거야.”

“그 소금왕이라는 사람? 그러면 세컨드 시티로도 가고 완전 일석이조네!”

말은 겸사겸사라고 했지만, 스틸 타운에 온 목적은 최신형 기차였다.

최대한 시간을 아끼면서도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려면 이 방법이 가장 좋았으니.

나는 마차를 몰아 스틸 타운에서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의상실 앞에 세웠다.

“먼저 들어가서 보고 있을까?”

순수한 스칼렛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압축 주머니에서 커다란 마정석 하나를 꺼냈다.

여기는 회사의 사장급들이 오는 곳.

요새 우리의 행색이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그냥 들어가면 쫓겨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자, 이걸 하늘 높이 들고 문 앞에 서 봐.”

“이 마정석을? 이거 군용탄 1000발은 될 텐데.”

“이게 우리의 신분증이니까. 스칼렛, 내가 말하는 대로 행동해. 알겠지?”

나는 스칼렛에게 귓속말로 몇 가지 문장을 하달했다.

적발의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하더니, 곧바로 마정석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국어책을 읽는 정도의 딱딱함.

나는 이마를 짚으며 배우의 연기력에 실망했으나, 시끄러운 소리로 의상실 직원을 불러오는 데는 성공했다.

“무, 무슨 일이시죠? 남의 업장 앞에서 소란을 피우시면 곤란합니다.”

직원은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스칼렛은 내가 일러준 문장들을 줄줄이 읊었다.

“당신의 눈알은 상하셨나요? 이 물건이 보이면 알아서 모시세요. 안 되겠습니다. 당신은 지능이 부족하니 이 공간에서 사라지시고, 책임자를 불러오세요.”

“네? 아, 알겠습니다.”

직원은 매우 당황하며 후다닥 의상실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당황한 사람은 직원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저렇게 순한 말을 알려 주지 않았다.

요망함을 가득 담아 내뱉어야 진국인데, 스칼렛은 독기를 모두 정화한 여과수로 내뱉고 말았다.

“존댓말로 하면 어떡해. 그러니까 훨씬 또라이 같잖아.”

“그치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어떻게 욕을 해.”

“그래, 어차피 목적은 이뤘으니 상관없겠지.”

조금 뒤, 의상실의 주인이 우리를 환대하며 업소 안으로 모셨다.

나는 안에서 몸의 치수를 재며 연미복과 흔히 신사모로 불리는 탑 햇을 맞췄다.

“제 것은 적당한 가격대로 해 주시고, 저기 앉아 있는 여자는 최대한 신경 써서 꾸며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옷은 언제 찾아가시겠습니까.”

“내일 아침이요. 저 마정석을 전부 드리는 거니 충분하겠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돈의 유혹에 빠진 사장에게서 확답을 받아 낸 다음.

나는 스칼렛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기차 시승식은 아무나 갈 수 없다. 록펠스 그룹의 초대장이 있는 상류층의 신사와 귀부인만이 가능하다.

‘그 명단이야 신문에서 대충 언급이 있었지.’

정부의 고위 관리. 장군, 세컨드 시티와 관련된 기업가들.

대충 이런 사람들이 기차에 탑승할 초대장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절도나 약탈은 안 된다. 언제나처럼 아주 신사답게 거래할 생각이거든.

리엔필드 컴퍼니, 나는 이전에 충격과 공포의 기관단총을 만들었던 회사의 스틸 타운 지사 건물로 갔다.

이 마을에는 여러 군수 업체의 공장이 모여 있었고, 리엔필드 컴퍼니도 그 기업 중의 하나였다.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내가 건물 로비로 들어가자 데스크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나를 불러세웠다.

약간 고개를 뒤로 빼는 게, 차림새를 보고 용병이나 수사관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냉대에 굴하지 않았다. 그대로 데스크 앞으로 걸어가 해결사 증표와 거대한 서류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여기 지사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약속은 하고 오셨나요?”

“워낙 급한 사안이라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안에 지사장님 계시죠?”

“아무리 급하셔도 선약을 잡아놓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합니다.”

“후우, 역시 그렇군요.”

나는 한숨을 푹 쉬고서 로비를 둘러보았다.

전부 리엔필드 회사의 직원들. 애당초 군수업체다 보니 외부 인물이 들어올 일은 많지 않았다.

큼큼, 나는 목을 추스르고서 거대한 서류 뭉치를 높이 들었다.

지하철 판매상 아저씨, 나에게 힘을 줘!

“아이고! 이를 어쩌나! 글쎄 연합의 굵직한 군수 업체가 반군에게 총이나 팔아먹고!”

“이게 무슨…….”

“그 싸구려 기관단총이랑 총알로 연합의 시민을 쏴 죽이고! 반군들이 시민을 겁탈하고 능욕하는데 발 쭉 펴고 잠이나 자겠냐 이것들아!”

“경비, 경비!”

데스크 직원의 다급한 외침에 총을 찬 경비들이 곤봉을 들고 달려들었다.

저런 일반인 따위야. 나는 오러조차 쓰지 않으며 경비들의 손아귀에서 손쉽게 빠져나왔다.

이어서 로비를 빙빙 돌며 리엔필드 컴퍼니가 반군들에게 팔아넘긴 무기 목록을 읽었다.

“다들 멈춰!”

카리스마가 넘치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

나는 십수 명의 경비를 농락하던 와중에 그 함성을 듣고 우뚝 멈춰 섰다.

얼핏 보아도 회사의 간부. 나는 비즈니스 스마일을 장착하고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자네는 누구인데 이렇게 시끄럽게…….”

“일단 읽어나 보시죠.”

내가 간부의 얼굴에 서류 뭉치를 던지자, 상대는 얼떨결에 받아들고 찬찬히 내용을 살펴봤다.

레드넥에게 물건을 판매한 기업의 목록. 일전에 파이크에게서 입수한 서류는 요긴하게 써먹기 위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가슴을 쫙 펴고서 얼굴이 파랗게 물들어가는 간부에게 외쳤다.

“뭐 하고 서 있어? 빨리 책임자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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