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44화 (44/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44화>

44. 내일을 향해 쏴라(3)

세븐 시티의 리버티 교회.

나는 먼지가 잔뜩 묻은 서류를 품에 안고 이곳으로 왔다.

내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해 줄 유일한 안식처, 체르노 주교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루카 신도님. 며칠 만에 다시 뵙는군요.”

내가 교회 안으로 발을 들이밀자 대기하고 있던 나이든 사제가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이 예배당을 관리하는 사제처럼 보였다.

나는 정중히 그에게 인사하며 물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허허허, 교회에 볼 일이 생겨야 오시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끔이라도 예배에 참석하시지요.”

“예, 시간이 되면 꼭 그러겠습니다.”

사제는 내 말에 빙그레 웃었다.

일상적인 대화. 나와 주교의 일을 아는 사람은 적어도 이 교회에는 없다.

아니,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주교가 처음 보는 젊은이에게 무릎을 꿇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자존심이 있다면 조용히 입을 다물겠지.

“그보다 주교님은 지금 안에 계십니까?”

“예, 요새는 집무실에서 잘 나오시지 않습니다. 그전에 먼저 꼬마 수녀님을 만나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그 아이 덕분에 교회에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나는 사제의 권유에 헛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마틸다의 교회 적응기는 실소를 지을만하다. 평생 법과 규율은 개똥만큼도 개의치 않던 아이에게는 버거운 일일 터.

나는 그 즐거운 풍경을 구경하기로 결정했다. 요망한 꼬맹이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니까.

교회 옆쪽으로 난 회랑, 그곳을 따라 걷자 자연스럽게 어린 수녀와 사제가 교육받는 수련장이 나왔다.

“어허! 걸음걸이가 엉성하다. 엉클 샘께 공물을 바치는 걸음걸이가 그리 경박하면 되겠느냐.”

딱!

주임 사제의 호통과 함께 둔탁한 무언가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회초리에 얻어맞은 어린 수녀는 울상을 지으며 버럭버럭 목소리를 높여 따졌다.

“씨발! 이건 너무 하잖아. 처먹고 싶으면 와서 처먹든가. 왜 내가 접시를 들고 제단까지 가야 하는 거야!”

“어허! 매달 말에 있는 기원제에서 주신께 공물을 바치는 건 보조 수녀의 책무인 것을!”

딱! 딱!

주임 사제가 손속의 자비를 두지 않고 회초리로 마틸다의 어깨를 연달아 때렸다.

모진 매질에도 수녀복을 입은 마틸다는 버럭버럭 욕설을 내뱉었다.

언제는 성심성의껏 살겠다더니. 어떻게 한 달을 못 버티냐.

마틸다는 성을 내다가 회초리가 너무 아팠는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토끼처럼 눈동자를 뜨며 부탁했다.

“할아버지, 저 같은 가녀린 소녀를 마구 폭행하는 걸, 엉클 샘께서는 분명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오.”

급기야 말꼬리를 위로 올리며 귀여움을 한껏 강화하기까지.

모든 기술과 수단을 동원한 필살기. 마틸다는 유독 눈을 깜빡거리며 비스듬한 각도로 주임 사제를 올려보았다.

물론, 그런 방식은 원리원칙의 수호자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이곳의 주임 사제다. 자중하고 또 자중하여, 수도자의 몸과 마음가짐을 새기거라.”

빡!

손목의 스냅을 활용해 휘두르자, 회초리 끝부분이 마틸다의 이마를 살짝 때렸다.

굉장히 능숙한 주임 사제의 기술력에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결국, 마틸다는 울상을 지으며 다시 예법을 익히기 시작했고 나는 몸을 돌려 회랑의 끝으로 걸었다.

그러던 와중에 익숙한 사람을 마주쳤다.

바로 마틸다를 따라 교회에 몸을 의탁한 조엘이었다.

“어? 루카 씨.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조엘은 커다란 화분을 들고 있었다.

갑자기 새로운 친구를 만든 건 아닐 테고, 나는 교회 입구에 있던 화분을 떠올리며 말을 꺼냈다.

“오랜만입니다. 잠시 볼 일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저는 이걸 옮겨야 해서 나중에 뵙겠습니다.”

“예, 잘 적응하신 거 같아서 기쁩니다.”

“하하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새 마틸다가 얼마나 투덜대던지. 참! 저번에 알려주신 기술들은 열심히 연마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성과가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요.”

조엘은 신성력에 전혀 재능이 없다.

사실 모든 방면에 재능이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로버트에게서 얻은 슈레이더 가문의 검술과 연공법을 알려 주었다.

보너스로 오러 회로도 뚫어 줬다.

마틸다와 함께 있으면서 [호해의 기사]의 특성을 잘 활용한다면 쓸만하게 성장하겠지.

“열심히 하신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예, 반드시 강해져서 제가 지은 죄만큼 참회하며 살 생각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여태까지 마틸다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운이 따라줬기 때문이니까요.”

조엘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실제로 쓰레기 산에 늦게 갈 경우, 조엘은 사채업자에게 죽고 마틸다는 팔려가는 분기도 있다.

큰 분기상으로는 스토리에 지장은 없지만, 역시 살려갈 수 있는 동료는 가능한 그러는 게 좋다.

‘그로탄, 오늘따라 네가 더 그리워.’

어째서 레드넥의 소굴에서 영웅적으로 산화한 오크 전사가 떠오르는 걸까.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옛 동료를 기억하며, 나는 조엘과 인사를 나누고 주교가 기다리는 집무실로 향했다.

“루, 루카 씨?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집무실 내부로 들어오자 체르노가 어색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대조적인 함박웃음을 지으며 주교의 손을 확 잡아끌었다.

“오늘도 저번처럼 개인적인 면담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일단 들어오시죠. 자네는 이만 가봐도 좋네.”

“예, 그럼 저는 이만.”

나를 데려온 사제는 주교의 명령을 받고 물러났다.

체르노는 황급하게 문을 닫고 어느덧 소파에 앉은 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나 환영받지 못하는 걸지도?

“표정만 보면 악마라도 본 줄 알겠네. 내가 그렇게 보기 싫어?”

“아뇨! 당연히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어쩐 일로 오셨는가 해서요.”

내가 다리를 꼬며 거만하게 말하자, 주교는 실실 웃으며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트집이나 잡으며 놀려먹는 건 여기까지 하고.

나는 테이블에 놓인 종이와 볼펜을 들고 약도 2장을 그려서 한 장을 내밀었다.

“세븐 시티 근처에 있는 베가스 타운 알지?”

“예, 이번에 개척지에서 타운으로 격상된 곳이죠. 베가스 컴퍼니에서 공을 많이 들였다고 들었습니다.”

“잘 알고 있다면 다행이야. 여기 내가 표시한 위치로 성기사와 사제들을 파견해.”

베가스 타운을 기준으로 그려진 약도가 체르노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는 지도를 살펴보더니, 대학원 연구실 자리를 제안받은 졸업반 대학생의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여긴 왜 갑자기. 가보라고 하시는 겁니까.”

“왜 하기 싫어? 너를 위해서. 아니, 우리를 위해서 가보라는 말인데.”

“그렇습니까?”

“요새 마족들이 황무지에 마기의 농도를 높이는 작업을 진행 중이거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말이야.”

“그럼 여기가!”

“응, 황무지에 설치된 수십 개의 흑마법진 중 하나야. 이거 핑거톤에서 은밀하게 조사 중인 내용이라고. 너에게만 특별히 알려 주는 거야.”

체르노 주교의 얼굴에서 희열이 흘러내렸다.

핑거톤이 내사 중인 극비 정보라니. 체르노는 8비트 컴퓨터 같은 머리를 열심히 굴리더니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장 내일 사람들을 파견하겠습니다.”

“좋아, 이 일이 잘만 풀리면 네가 받아먹은 뇌물 장부도 잘 처리할 수 있을 거야.”

“오오, 정말입니까?”

“그래, 깨끗하게 잘 처리하라고. 그리고 이건 당연히 비밀인 거 알지?”

“물론입니다. 교회 내의 사제들에게는 폰테인 그룹의 뒤를 추적하고 있다가 비밀리에 얻어낸 정보라고 말해놓겠습니다.”

얘도 소설은 참 잘 쓰네.

나는 적당히 웃어주며 교회를 빠져나왔다.

다음은 연합 수사국의 세븐 시티 지부. 그곳은 거주지와 가까운 교회와는 다르게 도심 내부에 있었다.

‘체르노처럼 똥줄이 타고 계실 분이 한 명 더 있지.’

커스터 지부장.

이번에 더글라스의 부탁으로 나에 관련한 소문을 잔뜩 풀어준 장본인이다.

이 양반도 비토에게 적잖이 많이 받아먹었지.

나는 성큼성큼 수사국 지부로 들어가 카운터에 해결사 증표를 보여줬다.

수사국은 해결사의 요청에 응답할 의무가 있기에, 커스터 지부장을 만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내를 받으며 당도한 지부장실 내부에는, 동그랗게 말린 콧수염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비서가 문을 닫고 나가자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커스터 지부장님. 면담 요청을 드린 해결사 루카입니다.”

“만나서 반갑군. 더글라스 지부장과 절친한 사이라고 들었네. 이번에 핑거톤에 합류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맞나?”

커스터는 지부장다운 정보력을 과시하며 악수를 청했다.

시간이 아까우니 속전속결로. 나는 그의 손을 맞잡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비토에게 돈 받으셨죠? 한 군용탄 5000발 정도.”

“……방금 뭐라고 했나.”

“가만있자. 수사국 지부장이시니, 저엉말 잘 되어도 연합 교도소로 좌천되실 테고, 평생 바깥으로는 못 나오시겠죠?”

커스터 지부장은 내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심지어 받아먹은 액수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어련하겠나.

지부장은 선빵에 턱주가리를 얻어맞고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허수아비가 된 상대를 요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지.

“뭐, 아시다시피 제가 핑거톤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많이 들었거든요.”

“...”

커스터는 말을 잇지 않고 내가 내뱉는 말에 집중했다.

정보에 민감한 사람답게 정보의 비대칭을 빠르게 인지하고, 불리한 싸움에서 발을 빼버린 것이다.

그는 조용히 내 행동이나 말투, 목소리 등의 비언어적 표현을 토대로 내 심리를 파악하려 애썼다.

솔직히 내 선량한 진심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도움을 드리러 온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리버티 교단의 체르노 주교에게서 나온 정보를 지극히 개인적인 의도로 드리러 온 것이니까요.”

“체르노 주교?”

“제 말이 못 미더우시면, 조만간 교단 쪽에서 움직임이 있을 테니. 잘 알아보시고 목숨을 지키는 용도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교회에서 그린 또 다른 약도를 꺼내 그의 손에 들려주고 방에서 나왔다.

정보의 출처를 비밀로 하라는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이 약도의 정체가 뭔지 알게 되면 정보를 얻은 경로 따위는 스스로 꾸며낼 테니.

교단과 수사국. 이 두 곳에서 움직이며 흑마법진을 찾아낸다면 내 가짜 서류는 단순한 망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된다면 프레스턴에게도 뭔가 반응이 올 터.

‘대전이는 수사국이나 교단에 맡기기에는 영 꺼림칙하지.’

소수 정예이면서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

교단과 수사국은 들러리일 뿐. ‘대전이’ 이벤트를 담당해 줄 세력으로는 핑거톤이 가장 적합한 편이었다.

* * *

낚싯대 2개를 드리우고 며칠이 지났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도시 밖에서 [스크류 샷]의 숙련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커스터는 내 의도대로 움직였다.

교단이 마족이 설치한 흑마법진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약도에 적힌 곳으로 병력을 파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프레스턴에게도 이 소식이 들어갔을 텐데.

찌릿, 순간 [예리한 감각]이 어떤 신호를 보내왔다.

절대 강자의 출현, 본능적으로 나보다 강한 상대의 출현에 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긴장할 사람이 나는 아니지만.’

나는 여유롭게 몸을 돌려 멀리서 다가오는 모래 폭풍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속에서 달려오는 중년의 남자, 프레스턴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감정이 많이 격양된 느낌이었다.

“자네, 자네가 준 서류 말이네. 글쎄 리버티 교단이랑 수사국에서 자네가 말한 흑마법진을 찾아냈다지 뭔가. 그거 혹시 어디로…….”

“버렸습니다.”

“뭐? 어디에. 언제 버렸나.”

거 참, 바닥에 내던질 때는 언제고 이제야 다시 찾나.

“그게 왜 갑자기 궁금하신지. 드디어 땅바닥에 처박힌 종이 뭉치의 심정을 이해하신 건가요.”

“까칠하게 말하지 말고. 자네가 준 서류가 진짜라는 건 잘 알았네. 자네의 진심을 몰랐던 내가 잘 못 했어.”

나는 물끄러미 프레스턴을 보았다.

평소에 존경하던 선배에게 인정받아, 감동한 부사수의 애환이 담긴 표정.

나는 최대한 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감정을 잡았다.

“저는 정말 단장님을 믿었습니다. 황무지에서 가장 정의롭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안 그랬다면 비토를 처단하기 위해 단장님을 찾아가진 않았을 겁니다.”

“알아, 자네의 심정은 100번 공감하네. 나를 믿어 준 사람에게 내가 몹쓸 짓을 저질렀어.”

프레스턴은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사과했다.

솔직히 양심이 오랜만에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지만, 내가 살아남으려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프레스턴에게는 성과와 공적으로 갚아 주면 되지!

“됐습니다. 사실 서류는 안 버렸어요. 다시 찾으러 오실까 해서 갖고 있었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겠네.”

“그 말 농담은 아니시죠?”

“응? 아, 당연하지. 그럼.”

프레스턴은 얼떨결에 쐐기를 박았다.

아무렴 핑거톤의 처단자가 허언을 던지겠어. 내 표정이 순식간에 싹 뒤바뀌자 프레스턴은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좋은 스승님이 생겨서 정말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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