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39화 (39/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39화>

39. 마틸다(3)

여기도 쓰레기. 저기도 쓰레기.

사방이 폐기물과 그걸 감싼 포대 자루로 가득하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거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통로에는 사람과 포대가 쌓여 큰 언덕을 이루었다.

나와 스칼렛은 일주일의 휴가를 받아, 이 삶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곳으로 왔다.

“이게 뭐야. 휴가라며.”

한 발자국 뒤에는 빨래집게로 코를 막은 스칼렛이 뚱한 표정으로 따라왔다.

등산이 취미인 아빠와 용돈 준다며 꼬신 딸. 지금 우리의 모습은 정확히 그런 느낌에 가까웠다.

나는 상쾌한 쓰레기 냄새를 만끽하며 말했다.

“왜 좋잖아. 요새 우리가 너무 편하게 산 것 같지 않아? 생존력을 기르려면 이런 곳에 와줘야지.”

“그런가. 근데 여기는 우리가 살았던 파이브 포인트보다 훨씬 심한 곳인 거 같아.”

“에이,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지. 여기는 조금 더 거칠고 솔직한 것뿐이야.”

쨍그랑!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리병이 깨지며 두 남정네가 주먹 다툼을 벌였다.

여기까지는 퍼스트 시티의 빈민가와 비슷하지만, 세븐 시티의 쓰레기 산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통로 옆에 쌓여있던 쓰레기 더미. 그곳에서 사람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렇다. 단순히 쓰레기를 쌓아둔 것처럼 보이는 곳은 사람들의 주거 공간이었다.

“싸움이야? 다들 탄 걸어!”

“갈색 수염에게 2발!”

“나는 귀 하나 잘린 놈에게 3발 걸래!”

갑자기 사람들이 돈을 걸며 두 남자를 둘러쌌다.

급기야 우리가 서 있던 공간은 즉석 격투장이 열렸고, 주변에서는 너도나도 돈을 걸며 싸움을 격려했다.

도박에 인생을 바친 자들이 모인 장소. 이곳이 바로 쓰레기 산의 본질이었다.

“미안, 여기서는 장난도 못 치겠네. 우리는 갈 길이나 가자.”

“응, 나도 같은 생각이야.”

“혹시 모르니까. 후드는 푹 눌러 쓰고.”

나는 스칼렛에게 누더기에 가까운 후드를 건넸다.

우리가 입고 온 옷도 세븐 시티에 오기 전부터 입었던 넝마였다.

하지만 쓰레기 산에서는 그 넝마조차도 신사복이나 드레스로 보일 정도니.

눈에 띄지 않으려면 최대한 거지처럼 보여야 했다.

‘양아치들이 널려있기도 하고. 하나하나 상대하다가는 끝이 안 보일 거야.’

앞서서 워낙 깽판을 친 터라 당분간은 조용히 지낼 필요가 있다.

프레스턴에게 영입 제안을 받은 것은 마족 토벌에 열의를 보였고, 오러와 검술을 포함해 여러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양아치라 해도, 민간인에게 큰 해를 끼친다면 프레스턴이 마음을 돌릴 가능성도 있다.

“루카, 여기는 보안관이 순찰도 안 도는 곳이야?”

스칼렛은 조용히 쓰레기 사이를 걸으면서 말을 걸었다.

보안관은 무슨, 쓰레기 산에는 치안을 관리하는 어떠한 조직도 없다.

“없지. 공식적으로 이곳은 세븐 시티 밖이니까.”

“으흥, 아까 지나온 게이트가 그래서 있었구나.”

세븐 시티의 외곽.

쓰레기 산은 말 그대로 도시에서 생긴 오염물과 폐기물을 모아놓은 혐오 시설이다.

유흥의 도시라는 말처럼 세븐 시티 내부, 최소한 도심지는 깔끔하게 유지되어야 했고 도시 미관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 덕분에 도시에서 생긴 수많은 쓰레기는 외부에 던져지듯 버려졌다.

물론, 쓰레기만 버려진 건 아니다. 도시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부랑자들도 이곳에 모여 살았다.

“쓰레기 산은 도시에서 쫓겨나거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야.”

“이 사람들은 왜 못 들어가는데?”

“돈이 없으니까. 아니면 신분을 증명하지 못하니까.”

“신기하네. 퍼스트 시티에서는 빈민가를 도시 내부에 뒀잖아. 툭하면 온갖 더러운 일은 우리 갱단에게 시키기도 하고.”

“거기와는 다르지. 세븐 시티는 부자나 유흥을 즐기러 온 여행자, 아니면 상인이 주 수입원이야. 그래서 외부인이 봤을 때 미관을 어지럽히는 것들은 숨기거나 싹 치우는 거지. 예를 들면 리틀 나폴리처럼.”

리틀 나폴리의 빈민들과 이곳의 차이점은 여기 거지들은 정신줄을 놔버렸다는 것이다.

도박이나 술에 찌들어 사는 인생들의 집합소. 세븐 시티의 유흥에 맛을 들였다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게 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쯧, 나는 혀를 차며 기억이 나는 대로 통로를 따라 걸었다.

‘이제 곧 도착이다.’

이윽고 익숙한 공간에 다다를 무렵.

저 멀리서 꽥꽥거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움막의 입구에는 떡대들이 모여 있었고, 그 안에는 악을 쓰며 발길질을 하는 소녀가 있었다.

“이거 놔! 미친 새끼들아! 내가 진 빚도 아닌데 왜 내가 갚냐고!”

“야야! 얼굴에 스크래치라도 나면 팔지도 못해. 얼굴은 피해서 잡아!”

“좀, 가만히 좀 있어라! 너도 어차피 여기보다는 주인을 만나는 게 인생 피는 거라니까.”

“어떻게 세 놈이 여자애 하나를 못 이겨? 그놈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가서 잡아!”

딱 봐도 납치의 현장.

나는 스칼렛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스칼렛, 잘 처리할 수 있겠어?”

“저기에 있는 남자들을 말하는 거라면. 당연하지!”

“이번에는 다치지 않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응.”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스칼렛의 손에서 빛이 터졌다.

이전보다 상당히 노련하고 침착해진 모습이었다.

* * *

“씨발! 가까이 오기만 해 봐, 처음 하나는 반드시 죽이고 갈 거니까.”

단발머리 소녀의 입에서 거친 욕이 쏟아졌다.

떡 진 검은색 머리카락. 작은 체구에 영양실조로 창백한 얼굴까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소녀가 작은 송곳과 다리를 이용해 남정네 넷을 위협했다.

신기한 점은, 어쩐 일인지 남자 넷이 쉽사리 소녀를 제압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안 되겠다! 일단 다치든 말든 사로잡아으허으응.”

으허으응?

뒤에서 명령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무너지더니 땅이 크게 울렸다.

그의 부하들과 열렬히 저항하던 소녀의 시선이 소리의 발원지로 향하니, 길바닥에 쓰러진 사채업자 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형님? 왜 그러십니으흐흥.”

“갑자기 무슨 장나아아르앙.”

“다들 무스으흐.”

쿵, 쿵, 쿵.

나머지 덩치들도 일제히 쓰러지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돌발 상황에 당황했던 소녀는 금세 유일하게 근처에 있던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 이거 당신들이 한 짓이야?”

누더기 차림의 두 인물.

소녀는 쓰레기 산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얼굴에 적잖이 긴장한 듯 보였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에 빠르게 사채업자를 처리한 스칼렛에게 말을 걸었다.

“신체 속의 마나를 분해해서 기절시킨 거지?”

“이번에 시위대를 지켜주면서 실력이 많이 늘었지 뭐야. 이제 분해하는 건 자유자재라구.”

“잘했어. 돌아가면 원하는 건 뭐든지 사줄게.”

“아싸!”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좋아하는 스칼렛.

나는 피식 웃으며 시선을 다시 작은 체구의 소녀에게로 옮겼다.

전생에 싸움닭으로 살았었는지. 소녀의 두 눈동자에서는 아직 저항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역시 게임의 성격 그대로구나. 나는 그녀에게 특화된 선택지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진정해.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코트와 후드 끝자락을 올려 권총집을 보여주자, 상대는 움찔거리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프레스턴에게 받은 마공학 리볼버. 이건 쓰레기 산에 있는 거지에게도 먹히는 핑거톤이란 표식이다.

“핑거톤이 왜? 살려줘서 고맙기는 한데, 나는 마족이나 반군이랑 관계없어.”

“그건 알아. 나는 다른 문제 때문에 왔거든. 네 이름이 마틸다지?”

“아니.”

소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일단 발뺌부터 하고 보는 성격도 그대로다. 나는 잘 알겠다는 표정으로 턱을 위아래로 흔들며 다가갔다.

그 순간, 빠르게 달려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시만! 돈은 내가 준비하겠소. 부디, 이 아이는 건들이 마시오!”

한 중년의 남자가 나와 마틸다의 사이를 가르며 막아섰다.

이 인간도 내가 아는 캐릭터다. 이름은 조엘, 스토리 라인으로는 마틸다와 엮이는 캐릭터였다.

“오, 마틸다. 무사했구나. 샤일록 패거리가 너를 습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남자는 두 무릎을 꿇고 마틸다의 상태를 확인했다.

흔한 부녀지간인가. 스칼렛은 저 둘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판게아가 또 그렇게 녹록할 리가 없지.

“아, 씨발, 좀 저리 가. 아저씨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잖아.”

“마틸다. 나에게 기회를 주렴. 반드시 너에게 속죄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란다.”

“됐다니까. 그 새끼가 죽은 건 나에게 행운이거든? 게다가 아빠를 죽인 새아빠라니…… 나는 그런 거 필요 없어.”

마틸다가 거칠게 저항하며 조엘의 손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스칼렛의 입과 눈도 크게 벌어졌다. 그래, 이들은 부녀지간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심지어 동네 아저씨와 꼬마라는 평범한 설정도 아니다. 살인자와 피해자의 딸.

보통 같으면 복수의 소재로 쓰이는 관계였다.

“너는 14살이잖니. 아직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야.”

“어차피 옛날에도 거의 혼자서 살았거든? 조금 전에도 내가 도망갈 수 있었어. 저기 있는 분들이 도와줘서 그냥 넘어간 거지!”

조엘은 그제야 땅에 널브러진 사채업자들을 인지하며 일어섰다.

뒤이어 긴장감을 한층 누그러트린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이 아이의 말이 사실입니까? 저는 두 분이 사채업자인 줄 알았습니다.”

“어느 두목이, 이런 사람을 사채업자로 쓰겠습니까.”

나는 멍한 표정으로 있는 스칼렛을 가리켰다.

그러자 조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더 이상의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뚜렷하게 목적을 밝혔다.

“저는 핑거톤 사람입니다. 마틸다 양의 빚. 정확히는 아버지가 생전에 지으셨던 빚을 해결해 드릴 생각입니다.”

“핑거톤이 그런 일을 한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만.”

조엘은 마틸다를 뒤로 숨기며 나를 경계했다.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결과로 보여주면 그만이니.

실랑이를 피우는 동안,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단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도 동료가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패거리의 대장이 나선 모양이었다.

녹슨 골프채를 손에 들고 나타난 남자가 건들건들 이쪽으로 걸어왔다.

“조엘! 내가 그 년하고 더 엮이지 말라고 했잖아. 왜 자꾸 우리 애들을 패고 그래.”

“샤일록. 내가 빚은 다 갚아준다고 했을 텐데.”

“무슨 대단한 성인군자 납셨네. 왜 그렇게 착한 척이야?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안 이랬잖아.”

“됐고. 분명 6개월은 기다려 준다고 약속했잖아.”

“그건 그런데. 어제도 말했다시피 갑자기 좋은 거래처가 생겨서 말이야. 굳이 내가 기다려 줄 의무도 없고.”

샤일록은 골프채를 두 손으로 잡은 채 두 팔의 관절을 쭉 피며 스트레칭을 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뜻. 말을 듣지 않는다면 실력 행사에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그런 기운을 감지한 조엘도 품에 있던 단검을 꺼내며 응수했다.

“조엘, 지금 비키면 과거의 우정…….”

“잠시만, 잠시만요. 실례 좀 하겠습니다.”

멋지게 악당의 대사를 날리려던 샤일록.

나는 이제 스토리 소개를 볼 생각이 없었기에 조엘을 밀어내고 앞으로 나섰다.

샤일록은 살짝 마음이 상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자잘한 건 신경 쓸 필요 없고. 그 고객이라는 사람이 제시한 금액이나 말하시죠.”

“음. 이건 또 뭐래. 이번에는 또 무슨…….”

툭.

두툼한 자루가 샤일록의 앞에 떨어졌다.

자루를 들어 내부를 살핀 남자는 수북하게 들어있는 최하급 마정석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최하급 마정석 50개. 게임상에서 마틸다가 팔려갔던 금액의 정확히 5배였다.

“계약서만 주면 당신 겁니다.”

“참나, 여기에 주인이 어딨어. 땅에 떨어진 물건은 얻은 사람이 임자지…… 음, 그렇고 말고. 아마도 그렇겠지. 흠흠.”

열심히 악당스럽게 말하던 샤일록이 조금씩 뒷말을 흘렸다.

오러 프레셔와 [위압자]의 성능. 내가 오러를 발산하며 지긋이 그를 바라보자, 샤일록은 묘한 카리스마를 느끼며 살짝 물러섰다.

뭐, 어쩌겠어 방어 수단도 없는 엑스트라가.

나는 상대가 물러난 만큼 앞으로 걸어가며 손을 내밀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아실 텐데요. 그만한 금액을 선뜻 줄 사람이 과연 돈만 가지고 있을까?”

“워, 원래 주려고 했어! 나는 양아치가 아니니까. 자, 여기.”

그가 서류를 던지려다가 빠르게 다가와 공손히 종이를 내밀었다.

옳지. 눈치 하나는 빠른 놈이네.

나는 싱긋 웃으며 그를 쳐다봤고, 샤일록은 후다닥 뒷걸음을 쳤다.

‘칫, 두고 봐라.’ 같은 대사도 날리지 않았다. 목숨을 연명할 줄 아는 녀석이라는 이야기다.

“루카, 오늘은 피 안 보고 끝냈네?”

“그게 무슨 말이야. 언제는 안 그랬다고.”

“……저도 분위기상으로는 그 총으로 싹 쓸어버릴 줄 알았습니다.”

스칼렛이 작은 공을 쏘아 올렸고 조엘이 그 공을 받아 스파이크를 날렸다.

웬만하면 나도 좋게 끝낸다고. 좋게 끝날 일이 거의 없어서 문제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세상의 진리를 설파했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따로 피를 볼 일이 있겠어. 그치?”

내 두 눈동자가 가만히 서 있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마틸다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거리다가 답했다.

“그치. 오빠가 짱이야! 그런데 혹시 돈 더 있어?”

소녀는 내 편을 들어주며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았다.

정말이지. 저 발랄한 14세 소녀가 장차 황무지의 종교계를 휩쓸 거성이라니.

나는 헛웃음을 날리며 마틸다를 바라보았다.

리버티 교단의 메시아.

훗날 황무지의 ‘성녀’로 불리게 될 마틸다의 본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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