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38화>
38. 마틸다(2)
“루카, 피햇!”
투웅, 스칼렛이 몸을 날리며 역장을 펼쳤다. 벽에 금이 생기고 주변 가구와 집기가 사방으로 튀어나갈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힘은 미친 살육 전차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간단히 기운에 저항한 프레스턴은 스칼렛이 가로막은 나에게 말을 던졌다.
“안 놀라네. 재미없는 놈.”
“엥?”
스칼렛이 고개를 돌려 솥뚜껑만 해진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가뜩이나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한테 저런 장난을 치나. 나는 보다 험악해진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물어내세요.”
“집을 부순 건 내가 아니거든? 스칼렛 양,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네? 아니요. 저야말로 너무 성급하게 나섰네요.”
스칼렛은 금이 간 벽을 짚으며 멋쩍게 웃었다.
나는 벽과 스칼렛에게 시선을 줬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못 보던 총인데, 자랑하려고 오신 건가요.”
“아니. 말 그대로 이 총이 자네에게 줄 선물이라네.”
휘리릭, 프레스턴은 총을 회전시키며 나에게 권총 손잡이를 내밀었다.
마공학 리볼버. 시스템에 뜬 정보를 읽어보니 내 것보다 공격력이나 장전 속도, 장탄 숫자가 더 뛰어난 물건이었다.
물론, 그가 건넨 리볼버는 단순히 성능만으로 평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별과 그 내부에 눈동자 문양이 새겨진 손잡이. 이건 탐정 사무소인 핑거톤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그 문양은 핑거톤의 상징이랑 똑같이 생겼네요.”
“맞아. 정식 단원들에게만 주는 리볼버지.”
프레스턴은 강제로 리볼버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정부에서 발급하는 ‘해결사’ 자격이 하나의 신분증처럼 쓰이는 것처럼, 이 무기도 황무지에서는 신분증이나 마찬가지다.
‘말이 통하는 상대라면 오히려 더 잘 먹히지.’
핑거톤은 일개 무력 집단으로는 황무지 최강이며, 동시에 가장 존경받는 집단이다.
황무지에 연합을 세운 개국공신. 일곱별의 다른 세력들은 모두 본인의 이익대로만 움직이지만.
핑거톤은 유일하게 주민들을 보살피고 적극적으로 반군이나 마족들을 소탕한다.
그리고 이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일단 핑거톤에 들어오면 자네는 우리의 가족이다. 폰테인 그룹처럼 허울뿐인 가족이 아니라, 진짜 형제가 되는 거지. 황무지를 지키는 하나의 가족. 그게 우리다.”
프레스턴은 굉장히 자랑스럽게 핑거톤의 존재 가치를 설명했다.
단순한 허언은 아니다. 이 단체는 작중에서 가장 의리 있고 신뢰감 있는 곳이 맞으니까.
핑거톤에는 프렉스턴처럼 마족이나 반군에게 가족을 잃은 자들이 요직에 앉아 있다.
그래서 연합을 배신하고 그 두 세력에 합세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흠, 좋은 제안이지만. 저는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일부러 총을 다시 건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입단할 가능성은 있지만, 뭔가 부담스러워 보이도록 말이다.
사실 게임에서도 핑거톤 영입과 관련된 이벤트는 있다. 내가 원했던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세븐 시티를 구해 낸 영웅이라면 더 요구할 권리가 있잖아?
“뭐야. 반응이 왜 이렇게 시큰둥해. 자네 고향에서는 핑거톤 영웅담 같은 거 못 들어봤나.”
“많이 들어봤죠. 아저씨의 영웅담은 퍼스트 시티에서도 파다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그냥…… 부담스럽다고 해야 하나. 저 같은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터프한 집단인 것 같아서요.”
“비토의 목에 마기를 꽂아 넣은 자네가? 도시 하나를 말아먹을 뻔하고 자칫 잘못했으면 고위 마족급 마수를 도심지에 풀어 놓을 뻔했던 자네가?”
아이 싯팔, 그건 전부 섬세하고 주도면밀한 계획이었다니까.
누구누구처럼 감각이 이끄는 대로 대뜸 총이나 뽑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이런 말이 목구멍 근처까지 솟아올랐지만, 이걸 그대로 설명할 자신은 없었다.
가뜩이나 미친놈 소리를 듣는 판국에 그 위에 고봉밥을 추가하면 쓰겠는가.
“큼큼, 어쨌든 전부 좋게 해결됐잖아요.”
“내가 좋게 해결해 준 거겠지. 불법으로 마족의 물품을 소지하고 있던 걸 해명하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나.”
“그 덕분에 폰테인 그룹을 무너트렸잖아요. 그보다 우리 지금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죠?”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보호를 해 줬으니 우리 쪽으로 들어오란 말이야. 핑거톤에 들어오면 좋은 무기에 연공법에, 마족도 마음껏 때려잡고, 영웅 칭호와 온갖 미녀가 추파를 던질 거라고.”
갑자기 스칼렛의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나는 그 모든 조건에도 심드렁한 태도로 일관했다. 마지막 조건은 몰라도 나머지는 딱히 끌리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핑거톤의 연공법보다 제 것이 더 좋고요. 돈은 이미 차고 넘칩니다. 나머지야 제 능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고요.”
“아주 잘나셨군. 대표 이사, 그 늙다리도 자네를 영입하라고는 하는데 방법이 없단 말이야.”
상대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핑거톤은 보상보다는 의협심과 가족애로 움직이는 조직이니까.
조건 자체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폰테인 그룹이 제시하던 것이 훨씬 좋았다.
치익, 프레스턴의 시가에서 연기가 피워 올랐다. 스칼렛은 이번에는 코를 막았고 나는 조용히 말을 기다렸다.
“후우, 솔직히 말하지. 우리는 인재를 영입할 때 보상을 많이 주지 못하네. 그 여력으로 좋은 장비와 지원에 힘을 쓰지. 나는 자네와 자네의 일 처리 방식이 마음에 들지만, 조건이 안 맞는다면 어쩔 수 없지.”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핑거톤의 무기 제조 능력은 황무지에서 가장 우월하다.
프레스턴이 건네준 무기와 비슷한 성능을 만들 수 있는 세력은 황무지에 없으니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핑거톤에서 내가 원하는 검을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단 한 가지, 내가 원하는 게 프레스턴에게 있지만.’
저 양반은 [초감각]을 가지고 있어도 눈치 하나는 정말 부족하다.
그래도 내가 유리한 지점은 만들었으니, 이제는 슬슬 조건을 말할 차례였다.
“사실, 저도 원하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프레스턴 단장님에게요.”
“그게 뭔가? 설마 내 지도가 필요한 것도 아닐 테고 말이야.”
어, 바로 그거. 이제야 내 마음을 알아주네.
* * *
화창한 정오.
나는 비밀 별장의 뒷마당에 나와 있었다.
조용하게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서 나는 이번에 얻은 희귀 등급의 엘릭서들을 모조리 먹어 치웠다.
“흐읍.”
한껏 충만해지고 팽창한 오러홀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희귀 등급의 엘릭서 3병.
이전에 고급 엘릭서 다섯 병을 복용했을 때보다도 더 격렬한 반발력이 몸을 후끈하게 데웠다.
마치 밀폐된 한증막에 들어온 느낌. 나는 한참이나 명상을 취하며 막대한 기운들을 오러홀에 차곡차곡 쌓았다.
모든 기운을 갈무리한 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의 물기를 털어내며 눈을 떴다.
두 개의 오러홀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어릴 적에 뽑기를 했던 기억마저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디, 능력치 좀 살펴볼까.’
■────능력────■
근력: 67+8 민첩: 101+11
지능: 23+5 체력: 60+5
오러: 314
탤런트:-
■────특성────■
[인간 방패] [2.0] [희생자] [침.착.해] [개코] [예리한 감각] [나는 전설이다] [폭탄마] [오러 탐구자] [위압자] [운수 좋은 나] [순풍]
■──────────■
대략 100점.
확실히 희귀 엘릭서의 효능은 굉장했다. 다량으로 복용하여 오러 증가치가 차감되어도 수준이 다르다.
그냥 하나 정도는 더 가져올 걸 그랬나. 나는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스킬창으로 눈을 돌렸다.
[개조: 그림자 연공]: D등급 85.375%
[검귀식: 그림자 검술]: C등급 58.65%
다른 스킬들이야 워낙 성장세가 빠르지만, 이 2개는 한국인의 종특을 따라오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게임이 시작되고 3달이 된 시점에서는 매우 빠른 게 확실하지만.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여기서 더 속도를 내려면 역시 선생님이 있어야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프레스턴에게 오러 특별 지도를 부탁했다.
무엇보다 세븐 시티가 박살이 난 이상, 이 사태의 원흉인 프레스턴은 당분간 도시에 남아서 사태를 해결해야 했다.
원흉은 내가 아니냐고? 나는 비밀 공장의 문을 부수지도, 마족과 마수를 몰살하지도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프레스턴은 내 조건을 수락했다. 급한 불부터 끄고 내 수련에 도움을 주기로 말이다.
‘일주일이라. 그동안 뭘 하느냐가 문제인데.’
나는 자리에 앉아 주변의 퀘스트나 보상을 떠올렸다.
세븐 시티의 메인 보상은 전부 손에 얻었고, 나머지는 돈이 되는 보물이나 자잘한 것들뿐.
숙련도 부여권을 주는 서브 퀘스트를 제외하면 가성비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차라리 수련이나 하는 게 낫지.
반면에 관심을 아이템에서 사람으로 돌리면 좋은 보상이 있기는 하다.
‘이 주변에 쓸만한 동료 캐릭터가…… 하나 있긴 하네.’
커뮤니티에 올라온 동료 캐릭터 티어표.
프레스턴보다는 못해도, 1.5티어에 빛나는 성장형 먼치킨이 세븐 시티의 외곽 지역에 살고 있다.
일주일, 그사이에 다녀오기는 충분하니.
“루카, 나 새로운 기술을 배운 것 같아!”
향후의 일정을 대강 정해 가던 그때.
근처 수영장에서 염동력을 수련하던 스칼렛이 장난감을 손에 쥔 어린아이처럼 뛰어왔다.
새로운 기술이라. 아침에도 [간섭]의 위력이 상당히 늘었던 것을 목격했다.
이번 시위대의 일처럼, 스칼렛의 탤런트는 필요와 열망에 따라서 능력이 기하급수로 성장하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무슨 기술?”
“일단 와서 봐 봐. 보면 깜짝 놀랄걸.”
스칼렛은 내 손목을 잡아끌며 근처에 있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장에는 잎사귀가 떨어지며 일어난 파문이 잔잔하게 일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거는 아니지?”
“아니! 지금부터 보여 줄 테니까. 잠시만.”
후읍!
스칼렛이 볼에 빵빵하게 공기를 채웠다.
이어서 두 손을 내밀며 탤런트를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
샤아아아. 두 눈과 손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고, 낮은 물결 점차 기세를 키우며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에너지 증폭이네.’
에너지 증폭.
릴리트와의 싸움에서 배웠던 ‘분해’와는 달리, 증폭은 사물이나 상대가 가진 힘을 키워 주는 버프 스킬이다.
원래 부수는 것보다 만드는 게 어려운 것처럼, 에너지 증폭은 분해보다 훨씬 높은 숙련도가 요구된다.
“어때! 대단하지?”
“오오, 이제 이 노구는 가르칠 것이 없구나. 이만 하산하거라.”
“루카, 어려운 말 사용하지 마.”
이 정도였나? 스칼렛의 무지성이.
나는 초기 지능 스텟이 8점임을 잠시 잊고 말았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 나는 스칼렛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노고를 치하했다.
“그래, 그래. 잘했어. 스칼렛. 상으로 우리 여행이나 가자.”
“여행? 당분간은 세븐 시티에 있겠다며. 여기서 또 어디로 가.”
“응, 멀지는 않고. 바로 근처야. 이번에 큰일을 겪었으니 짧은 휴가라고 생각하면 돼.”
“오오! 나 휴가라는 거 말로만 들었지 처음이야!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지금은 미리 알 필요 없겠지.
나는 그저 방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세븐 시티 외곽의 쓰레기 산. 그곳이 이번 휴가의 목적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