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37화>
37. 마틸다(1)
판게아 대륙의 왼쪽 끝자락.
황무지의 남서부. 무역 연합의 손이 닿지 않은 이곳에는 차원 대전쟁 이전의 폐허가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사람이 살지 않은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다.
보통 이런 곳에는 배척당한 자들이 모이기 마련.
남서부에는 자칭 자유의 투사, 레드넥의 세력이 똬리를 틀고 주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 조용한 동네에 때 아닌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웅!
우레와 같은 거대한 소음과 함께 성벽 한 귀퉁이가 허물어졌다.
오래된 돌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흙먼지가 일어났고, 안개처럼 자욱하게 낀 흙먼지 속에서 두 사람의 실루엣이 비쳤다.
큼지막한 대검을 걸친 남자. 지팡이를 두 손에 꼭 쥔 여성 엘프.
그들이 무너진 성벽 위에 나타나자, 고성 안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수사국의 습격인가? 적의 규모부터 파악해!”
“그게…… 적의 숫자는 2명입니다.”
“뭐?”
폐허 내부에서 보고를 듣던 레드넥의 간부가 인상을 구겼다.
수사국의 습격이라면 최소 수십 명 이상이 말을 타고 돌진할 텐데, 고작 둘이서 은신처를 공격하다니.
수사국의 방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공격의 주체가 누구란 말인가.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며 지면이 들썩였다.
지진, 포격, 마법 등등. 머릿속에서 수많은 가능성이 떠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이건 무언가가 폭발하며 난 소리가 아니다.
“뭔가가 성을 부수고 있어.”
레드넥의 간부는 무엇에 홀린 듯이 같은 말을 반복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성벽과 고성의 건축물이 무너지며, 은신처 내부는 말 그대로 생지옥이 되어 있었다.
대검을 철퇴처럼 휘두르는 사내, 그가 거대한 물체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풍압이 일며 아군이 튕겨 나갔다.
“으아아아아!”
퍼걱, 저 멀리서 대검에 얻어맞은 아군이 간부의 근처까지 날아와 벽에 박혔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괴력. 게다가 그의 신체는 총탄이나 폭탄에도 전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방탄복을 뛰어넘는 단단한 신체, 그리고 그에 걸맞은 파괴력.
은발의 사내는 차원 대전쟁 시기에 지구인들이 사용했다던 ‘탱크’를 연상케 했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레드넥의 간부는 혼란한 심정으로 지팡이를 쥔 여인을 바라보았다.
엘프. 순백의 피부를 지니며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종족.
대검의 사내와 함께 나타난 여자 엘프가 손을 뻗자 땅에서 신비한 생명체가 솟아났다.
물의 정령, 심지어 중급에 해당하는 ‘운다인’이 물을 뿜어내면 레드넥의 동료들이 수숫단처럼 쓰러졌다.
강하다. 적들은 일반적인 총기와 폭탄으로는 이길 수 없다.
그럼 도주는 가능한가? 아쉽게도 그 선택지를 고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대장님, 적들이 너무 강합니다!”
“무언가 조치를 내리셔야 합니다.”
곳곳에서 부하들의 곡소리가 들렸다.
100명이 넘는 인원이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그나마 남은 이들도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판국에 손 쓸 도리는 없었다.
* * *
레드넥의 은신처 하나가 순식간에 점령된 후.
당일 저녁, 인간과 엘프는 모닥불에 둘러앉아 전투의 열기를 달랬다.
정령을 이용해 고성을 휩쓸었던 엘프는 손에 국자를 들고 국물을 휘젓고 있었다.
맞은 편에 앉은 은발의 검사. 클리프는 피로 얼룩진 검날을 닦아 내며 몇 시간 전의 전투를 복기했다.
“두 번째 영혼을 흡수한 뒤로 갑자기 확 성장한 느낌이 들어서 조금 어색하네요.”
- 내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없던 능력이니 그 끝을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육체가 더욱 단단해졌으니 더욱 많은 수련을 할 수 있겠구나!
“맞는 말이긴 한데,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니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 아세요?”
- 뭐 이놈아?
“후훗, 검성께서는 정말 변하신 게 없네요. 언제나 똑같으세요.”
- 시리엘, 너마저…… 너는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건만.
“스승님이 적당히 유난스러워야 편을 들어주죠. 오늘만 해도 대검을 두 손가락에 끼고서 총 든 적이랑 싸우라니. 그러다가는 제자를 새로 받아야 할걸요.”
- 어차피 총알은 몸으로도 받아내면서 엄살은.
“자자, 검성께서도 그만하시고. 제자가 저녁을 먹어야 제자가 훈련도 받죠.”
검성을 만류한 시리엘이 클리프에게 건더기가 가득 들어간 그릇을 내밀었다.
여태까지는 그 누구도 이 대화를 엿듣지 못했지만, 시리엘은 세계수의 은총을 받은 덕분에 세상 만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뭘요. 클리프 님은 인류의 구원자시잖아요.”
구원자라는 말이 무겁게 느껴진다.
클리프는 마주 앉은 여자 엘프와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수프를 떠먹었다.
시리엘, 그녀는 황무지 바깥의 대륙 동부에서 왔다.
정령사임과 동시에 세계수를 모시는 무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연속에 곤혹스러운 것도 잠시.
그녀는 스승의 이름을 거론하였고 스승도 시리엘을 아는 눈치였다.
먼 과거. 검성이 살아 있던 시절에 시리엘은 그에게서 목숨을 구원받은 적이 있었다.
둘의 인연 자체는 짧았으나, 생명의 은인인 만큼 시리엘은 지금도 검성을 은인으로 대했다.
다만 놀라운 것은 시리엘이 검성과 클리프를 찾으러 온 이유였다.
‘세계수가 점찍은 구원자라니.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시리엘이 말하길, 멀지 않은 시점에 세상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고 하였다.
차원 대전쟁 수준의 악몽, 그게 이 땅에서 재현된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고난에서 인류를 구할 영웅이 바로 클리프 본인이었으니.
정령사 시리엘은 그런 클리프의 마음을 읽고서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해 주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희 세계수님은 근거 없는 말씀은 안 하시거든요. 무엇보다 클리프님은 예언서도 가지고 계시잖아요.”
“아, 그렇긴 하죠. 근데 이 편지는 제 친구에게 받은 거라서요. 예언 같은 게 아닙니다.”
“글쎄요. 혹시 친구분도 저처럼 신의 계시를 받은 게 아닐까요? 그것도 저보다 훨씬 자세한 계시를요.”
“……악마의 계시 쪽이 더 어울리는 녀석이라.”
“그렇게 친절한 악마가 어디 있어요. 이참에 한번 더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네, 그러시죠.”
클리프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두툼한 누런색 봉투를 꺼냈다.
예언서라는 시리엘의 말이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최근에 그녀에게서 문자를 배우며 읽어본 편지의 내용은 그만큼 충격적이었으니까.
레드넥의 반군 기지. 동료로 삼을 주요 인물의 위치. 검성이 과거에 썼던 유물의 위치.
앞으로 겪을 고난과 시련까지.
미래를 예견하듯, 수많은 정보가 종이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단순한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경로로 클리프의 여정을 안내해 주기까지 했다.
시리엘은 편지를 재차 읽더니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털어냈다.
“세계수 님의 말씀이 이 편지의 절반만이라도 정확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저는 검성의 투구가 있는 곳에서 기다리면 두 분이 금방 오실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20년이나 기다릴 줄은 몰랐다고요.”
“확실히 20년은 너무하네요. 그에 비해서 제 친구의 편지는 너무 친절한 데다가 상세하고요.”
“맞아요!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는 거죠. 구원자님의 친구분은 분명 친절한 신을 모시고 계시는 게 분명해요!”
설마 세계수 님께서 이 말을 듣지는 않으셨겠죠?
시리엘은 그 말을 끝으로 양쪽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세계수의 예언을 받은 장소에서 자연과 동화되어 클리프와 검성을 기다렸다.
그것도 무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런 참사가 일어난 이유는, 세계수가 운명이 이끄는 장소는 알려 줘도 시기는 알려 주지 않은 탓이었다.
‘루카, 도대체 이 정보들은 뭐냐.’
클리프는 황무지 어딘가에 있을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신의 계시보다도 더욱 세심한 예언서. 루카가 적은 편지의 내용은 여태까지 모두 적중했다.
오늘 제압한 반군 거점의 위치와 정보도 편지의 내용과 똑같았으니.
클리프는 당장에라도 친구에게 돌아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강한 욕구를 단념하고 편지를 옷 안 주머니에 넣었다.
‘나에게 말하지 못한 사정이 있었겠지. 나도 스승님에 관한 이야기는 말 못 했으니까.’
2년 뒤에 물어보자.
클리프는 퍼스트 시티에서의 재회를 기약하며 타오르는 모닥불에 장작을 던졌다.
* * *
“흐음.”
푹신한 침대. 적절한 온도.
나는 일조권이 보장된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시야에 잡힌다. 이어서 화려한 장식으로 반짝이는 벽과 원목 가구가 차례대로 보였다.
지구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꿈만 같은 대저택.
돈과 권력의 맛이 이렇게 짜릿하니, 비토도 마족과 결탁해서 그 음흉한 계획을 꾸민 거겠지.
‘이제는 요단강을 건너버리셨지만.’
폰테인 그룹의 추락.
그 이후로 며칠이 지났다. 비토 폰테인은 마인이 되어 즉결처분되었고, 그의 아들인 말론은 체포되어 수사국과 핑거톤에게 심문을 받았다.
듣기로는, ‘루카’라는 미친놈이 마족의 물건으로 아버지를 죽였다고 증언했다던데.
당연히 그 내용은 누군가의 지시로 보고서에서 빠질 예정이다.
말론이 말한 그 미친놈은 워낙 뒷배가 든든하거든.
“웃차.”
나는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거대한 창문 밖에 펼쳐진 정원으로 눈길을 돌렸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재벌가의 대저택이 이럴까. 창밖으로 보이는 잘 정돈된 수백 그루의 나무와 꽃밭은 저절로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
나는 사건이 끝난 이후부터 스칼렛과 함께 이 호화 별장에서 생활했다.
비토가 세븐 시티 변두리에 지은 이 저택은 그가 은밀한 만남을 가질 때 주로 쓰였던 곳이다.
원래라면 핑거톤의 수중에 넘어가야 옳겠지만, 내가 지낼 곳이 없다고 하자 프레스턴이 수색을 마치고 선뜻 이곳의 열쇠를 주었다.
“루콰, 아줌어니가 밥 먹으래.”
마침 스칼렛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뭔가 우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차려진 식사를 정신없이 먹던 와중에 나를 기억해 내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어, 나갈게.”
대답하며 방문을 여니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스칼렛이 서 있었다.
몸매가 살짝 도드라져 보이는 얇은 실크 재질의 고급 의류였다.
“옷이 잘 어울리네. 네가 찾아서 입은 거야?”
“아니, 아주머니가 서랍에 있던 걸 주셨어. 옷이 너무 짧아서 불편해.”
스칼렛은 원피스 밑단을 무릎 아래로 당겼다.
말이 옷이지, 사실상 이 원피스는 천 쪼가리를 몸에 걸친 수준에 불과했다.
옷의 원래 주인은 비토 폰테인의 애첩.
애당초 가리기 위한 옷이 아니라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으니.
‘황무지에서 옷을 겹겹이 입고 살았던 사람에게는 불편하겠지.’
불편한 옷매무새를 점검하던 스칼렛은 슬그머니 눈동자를 내 팔뚝으로 옮겼다.
그러더니 내 손목을 확 가로채며 울상을 지었다.
로버트와의 혈전으로 생긴 상처. 요 며칠간 그녀가 열심히 치료해 줬던 상처에 흉터가 남았기 때문이었다.
“히잉, 이게 뭐야. 그렇게 열심히 해도 결국 흉터가 남았잖아.”
“어쩔 수 없지. 팔뚝에 흉터 하나 남은 정도인데 뭘, 그래도 나머지는 말끔하게 사라졌어.”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물론이지. 밖에서는 두꺼운 옷을 입어서 티도 안 날걸. 오히려 나는 상처 몇 개 정도는 더 생겼으면-”
“안 돼! 여기서 흉터가 더 늘어나면 안 돼. 알겠지?”
스칼렛은 머리를 도리도리 돌리며 내 요청을 각하했다.
나는 알겠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별장 요리사가 차려 준 아침을 먹기 위해 몸을 돌릴 찰나.
“나중에 올까?”
목소리의 발원지에는, 턱을 열심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씹고 있는 프레스턴이 있었다.
저 인간의 기척은 도통 잡히질 않네.
“뭡니까. 초인종은 어디에 팔아먹고요.”
“집주인도 아니면서 쩨쩨하게 굴기는, 내가 신경 쓴 덕분에 공짜로 여기서 머물고 있잖아.”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의 급료랑 생활비는 제가 다 부담하거든요? 그 손가락에 묻은 기름기의 출처가 갑자기 궁금하네요.”
“쳇, 쪼잔한 녀석.”
프레스턴은 내 아침 식사를 집어 먹은 손가락을 쓱쓱 닦으며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그냥 집세라고 생각해.”
“집주인도 아니면서. 아무튼, 이렇게 이른 아침에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내가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프레스턴은 비릿한 미소를 만들며 답했다.
“핑거톤. 아니, 내가 자네에게 줄 어마어마한 선물이지.”
철컥, 순식간에 옷에서 빠져나온 리볼버.
그 총구가 나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