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25화 (25/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25화>

25. 엑소시스트(물리)(4)

자유 무역 연합의 서남부.

아직 연합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무법 지대를 한 사내가 걷고 있었다.

등에 둘러멘 거대한 검, 푹 눌러쓴 거적때기 사이로 삐져나온 은색 머리카락.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 클리프.

그는 몇 개월 동안 온갖 개고생을 하며 연합 동남부에서 서남부로 지역을 횡단했다.

타고 왔던 말은 강도의 총에 죽어 버렸고, 옷은 세상의 풍파를 맞아 넝마가 되어 대부분 버려야 했다.

클리프는 내리쬐는 햇빛에 항복하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아, 뒈질 것 같아.”

나부끼는 모래바람.

이빨에 낀 모래를 뱉어 낸 클리프는 약도를 꺼내 위치를 재차 살폈다.

“도대체 이 그림으로 폐허를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클리프는 이 끝도 없이 황량한 볼모지를 빙 둘러보았다.

여기는 어제 내가 지나온 길이 아니었나? 아닌가, 처음 보는 곳인가?

사방이 전부 벌판이라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잠시. 청년은 한 가지 무서운 가정을 떠올렸다.

혹시 이 약도를 그려 준 부락민은 내가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어. 나를 바라보면서 입맛을 다셨다고.”

극한의 인간 불신.

소매치기, 노상 강도, 식인종, 추방자, 부랑자, 살인마, 그냥 미친놈 등등.

클리프가 여태 마주친 사람들은 정상인이 없었다.

나름대로 퍼스트 시티의 뒷골목에서 단련되었다고 자부했지만.

“이거는 진짜 아니잖아!”

클리프의 외침이 공허한 볼모지 위로 흩어졌다.

들어 줄 사람도 없는 이 황폐한 공간에서 그는 홀로 버텨 낼 뿐이었다.

아니, 차라리 혼자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제자야, 태양이 뜨거운 것 같으니 여기서 검술 수련을 해 보자꾸나. 땀을 흘리는 것만큼 보람찬 일도 없지!

제발, 저 사람 좀 누가 데려가 줘.

클리프는 짙은 피로감을 느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엎어져 있다가는 정말로 검술 수련을 하게 될지도 모를 테니.

‘여기서 검을 들고 휘두르면 30분도 못 버틸 걸요?’

-열정과 의지만 있다면 끄떡없다! 내가 소싯적에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배운 기술. 클리프는 마음의 문을 닫으며 검성의 목소리를 음소거 해 버렸다.

그리고 지평선 너머로 띄엄띄엄 보이는 석제 건축물들을 하나씩 살폈다.

“저건 아니고, 저건가? 아니네. 더 큰 폐허가…… 오, 저게 좀 커 보이는데.”

클리프는 여러 번 반복했던 것처럼 폐허 하나를 찍고서 그곳을 향해 걸었다.

서남부는 아직 개발이 시작되지 않은 곳.

그렇기에 대전쟁 시기 이전에 지어진 폐허들이 많이 보였다.

검성은 아라곤 제국의 건축물과 많이 닮았다고 말했지만, 클리프는 전혀 모르는 국가였다.

역사의 공백, 클리프는 둘의 정보가 왜 이렇게 많이 차이 나는지 알 수 있었다.

차원 대전쟁. 클리프가 아는 과거는 그 시기 이후가 전부였다.

과거의 어느 날, 차원벽이 무너지며 판게아는 지구라는 세계와 이어졌다.

두 세계의 존재는 서로를 인식했다. 문화와 역사를 주고받으며 상대의 세계를 탐색했다.

처음에는 늘 그렇듯 사이가 좋았다.

지구의 전력이 판게아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어떤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침략.

하늘을 나는 강철의 새와 불을 뿜는 장갑 괴수.

그들은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군대를 보내 판게아를 짓밟았다.

침략군에 대항할 수단은 판게아에도 있었다.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라 불리던 영웅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땅 위에서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면, 그들조차 너무나도 간단히 소멸하고 말았다.

결국, 판게아는 전쟁에서 졌다.

판게아의 수많은 국가가 사라졌으며, 대륙의 많은 부분이 지구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물론, 지구인의 파티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무너진 차원벽을 가로챈 혼돈의 존재들.

마족들은 지구와 차원의 연결을 끊고 자신들의 세계와 이어 버렸다.

본국과 연락이 끊긴 지구인은 판게아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후에 ‘차원 대전쟁’으로 불리게 된 거대하고 긴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대전쟁 이전의 역사는 대부분 소실되었다. 역사책이나 사학자는 물론, 검증된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어딘가에는 분명 200년 전의 대전쟁을 기록한 자료가 남아 있겠지만, 클리프 같은 일반인은 소문으로만 접할 뿐.

‘대전쟁 시기의 일도 대부분 기록되지 못했고. 그만큼 치열하게 싸웠다는 이야기겠지.’

클리프는 검성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검성은 지구의 침략을 받기 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러니 중간의 이야기를 알 턱이 없었다.

두려움, 클리프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후우, 여기가 맞나.”

클리프는 긴장감을 유지하며 한 폐허에 발을 들이밀었다.

루카가 이전에 말했던 폐허. 만약 그곳이 맞는다면 반군이 숨어 있을 터.

-여기가 맞는 것 같구나.

경계하던 클리프에게 검성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도 알고는 있었다. 스승을 만나며 굉장히 예민해진 감각도 어떤 신호를 보내왔으니.

‘살기나 인기척은 없어요.’

-그래, 네 친구도 반군이 추측하고 있을 뿐이랬으니, 우리가 먼저 왔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다행이죠.’

한때 성이었던 폐허를 걸으며 클리프는 등에서 검을 빼 들었다.

굳이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감각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 되었다.

-발밑에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 문이 있다.

검성의 말을 듣고 바닥을 두들기자, 공간이 비어 있는 듯한 공명음이 울렸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석재 바닥. 손으로 바닥을 더듬자 살짝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다.

‘여기 뭔가 손잡이 같은 게 있어요.’

달칵, 요철을 잡아당기니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삐걱거리는 바닥을 잡아당긴 뒤, 클리프는 지하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내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구나.

‘정말 그러네요. 어쩌죠?’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아. 오히려 뭔가 친숙한 느낌이구나.

‘그럼 계속 가 볼게요.’

클리프는 루카가 선물한 대검을 꽉 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석실은 어떠한 위협적인 존재도 없었다.

내부를 밝히는 은은한 불빛, 누군가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빛은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계단 아래로 완전히 내려왔을 무렵.

‘뭔가 느껴져요. 사람의 기운? 아니, 이건 사람이 아니라…….’

-엘프다.

‘엘프요? 그 종족은 대륙 서부에서만 산다고 들었는데요. 게다가 엘프는 감지 능력이 뛰어나잖아요.’

-아마 우리를 적이라고 판단하지는 않는 모양이구나.

클리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란 석실을 따라갔다.

이윽고 비좁던 길이 점점 넓어지며 거대한 공간에 이르렀고, 스승과 제자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엘프, 거대한 공간 안에는 분명 엘프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문제는 그녀의 몸을 타고 식물들이 자라 있다는 것.

이는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는 뜻이었다.

-시리엘?

검성은 여인의 얼굴을 보고 곧바로 이름을 말했다.

스승의 당혹성이 머리를 울렸을 때.

“오랜만이네요. 폰테베드라 허멘 부르고스, 당신이 이곳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시리엘이라 불린 금발 엘프의 눈이 번쩍 뜨였다.

* * *

아아, 하늘은 덧없이 아름답구나.

나는 태양이 기우는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며 여유로움을 즐겼다.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바위 계곡 위,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보는 풍경은 정말 뛰어났다.

“앗, 뜨거!”

어허, 선비가 풍류를 즐기는데 어디 소음을 내느뇨.

나는 대자로 뻗어 있던 자세를 유지한 채, 고개만 들어 티타임을 즐기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코코아 가루. 커피는 써서 못 마시겠다며 스칼렛이 구매한 잡동사니였다.

“후우, 후우. 어? 너도 마실래?”

입술을 쭉 빼면서 입김을 불던 스칼렛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일어났다.

산 정상은 아니어도, 정상에서 마시는 코코아는 인정이지.

호로록, 따뜻한 음료가 담긴 머그컵에 입을 대자 여러 추억이 떠올랐다.

‘아버지랑 산봉우리에서 마시던 커피가 엄청 맛있었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등산이라도 자주 따라가 드리는 건데.

앗, 눈물이. 나는 촉촉해진 눈가를 손으로 훔치며 코코아를 마셨다.

“루카, 갑자기 왜 울어? 코코아가 그렇게 맛있어?”

“으응, 너무 맛있어. 진짜 너무 맛있어.”

갑자기 향수병이 확 올라오네.

솔직히 나 같은 정상인이 이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단순히 살아남은 것뿐만 아니라, 황무지 한정으로는 나름 상위권의 실력도 가졌다.

인간 승리다! 대단하다, 김만득!

나는 빛이 바랜 오래된 이름을 속으로 외치며 의지를 다졌다.

붉게 노을이 지는 지평선, 마치 이 세계가 나의 굳은 맹세를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오! 루카, 저기 멀리서 호송 마차가 오고 있어.”

감성에 젖어 있던 나와 달리, 냉철하게 길가를 감시하던 스칼렛이 탄성을 내질렀다.

어디 보자, 내가 원하던 놈들이 맞나.

나는 곧바로 오러로 안구를 강화하며 스칼렛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이번에는 네가 말했던 억울하게 붙잡힌 사람들이 맞아?”

“잠시만, 나 지금 열라 집중 중이야.”

이틀 전, 우리는 딱 매복하기 좋은 바위 계곡에 터를 잡았다.

도적으로 전직하려는 건 아니고, 붙잡힌 세븐 시티의 시위대 수뇌부를 빼내기 위함이었다.

“음, 죄수 호송 마차에 실린 사람은 총 다섯 명이네. 저 사람들이…….”

맞다.

중년 남자, 젊은 여자, 중후한 노인, 어린 소년, 건장한 청년.

다섯 명의 인상착의는 모두 도망친 시위대 수뇌부와 일치했다.

확인을 마치자 나는 스칼렛을 불러 간단하게 작전을 설명했다.

사실 작전이랄 것도 없다.

호송대의 전력은 보안관보 다섯.

스칼렛 혼자서도 하품을 쉬며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루카, 도대체 시위대 수뇌부가 여기 보완관들에게 붙잡힐 정보는 어떻게 안 거야?”

“후후, 명석한 두뇌와 뾰족한 촉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나는 어깨를 으스대며 밥 아저씨나 교과서 위주로 공부급의 괴변을 늘어놓았다.

게임에서 수뇌부는 이 즈음에 마이너 타운 근처에서 보안관에게 붙잡힌다.

속전속결로 사형 선고를 받아 목이 매달리기도 하고.

이 바위 계곡은 마이너 타운으로 들어가는 길목.

이틀 전에 마을에 들러 확인한 바로는 아직 그들은 체포되지 않았었다.

그러니 호송대가 올 길목만 지키면 발품을 팔지 않고도 손쉽게 신병을 인도받을 수 있으리라.

내 판단은 이랬으며 딱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정말 보안관들을 습격해도 괜찮을까.”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호송대를 보며, 스칼렛이 수심이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네가 아직 동기부여가 덜 됐구나?

나는 스칼렛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저 사람들은 억울하게 붙잡힌 사람들이야. 내가 정의 구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그랬지?”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그렇지. 자, 우리가 저 사람들을 합법적으로 빼낼 방법이 있을까?”

“아니.”

“그러면 우리의 선택지는 딱 하나지. 제일 중요한 건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하는 거잖아?”

나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스칼렛의 턱을 호송마차 쪽으로 돌렸다.

정의감이 충만해진 그녀의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사실 정의 구현은 아무래도 좋다. 저들은 세븐 시티를 화려하게 불태울 뇌관이니.

저들을 구출해 세븐 시티 내부를 시끄럽게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일이 훨씬 쉽게 흘러갈 터.

수뇌부를 실은 마차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보안관들의 대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나는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스칼렛에게 부탁했다.

“스칼렛, 범죄자를 체포하느라 힘쓰신 분들이니, 조용하고 편안하게 재워 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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