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8화>
18. 황야의 합법자(1)
이튿날 아침.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이별 파티가 끝나고, 우리 셋은 거의 쓰러지시다시피 여관 침대에 몸을 눕혔다.
“으으. 지금 몇 시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환한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고급스러운 느낌의 유리잔, 나는 그것에 물을 따라 마신 뒤에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이곳은 미트 타운 내부에서 제일 비싸기로 유명한 ‘젖소의 요람’.
총알을 모아서 국 끓여 먹을 것도 아니고.
암시장에서 긁어모은 재물과 현상금 사냥으로 벌 군용탄이 많았기에 굳이 궁상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클리프는 로비에 있고, 스칼렛도 이제 일어났네.’
[예리한 감각]으로 왼쪽과 오른쪽 방을 탐색하자, 옷을 입고 방을 나서는 스칼렛의 기운이 느껴졌다.
어제와는 크게 뒤바뀐 그녀의 존재감. 아직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으나 분명 일반인들의 평범한 기운과는 달랐다.
무술가의 오러.
마법사의 마나.
마족의 마기.
성직자의 에테르.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그녀만의 기운이었다.
덜컥 문을 열고 방문을 나서자 때마침 나오는 스칼렛의 얼굴이 보였다.
“잘 잤어?”
“응. 그런데 이런 방에서 자 보는 건 처음이라 되게 어색했어.”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니까 익숙해져야 할걸.”
“루카가 무리하는 건 싫은데…… 나도 빨리 일자리를 얻어서 최대한 보탤게!”
“됐네요. 오늘부터 나랑 수련하기로 한 거 잊었어?”
어제 내가 움직이던 광경을 보고서 스칼렛은 나에게 뭐라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감정적이거나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일단 클리프가 떠난다는 충격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전부터도 힘에 대한 욕심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니, 아니. 나는 수련도 하고 일도 하겠다는 뜻이었어.”
오호라, 일도 하시고 수련도 하시겠다?
머지않아 사망하실 그 대단한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일은 내가 나중에 줄게. 우선은 수련에 집중하자.”
“심부름 같은 거 하면서 도움이 되겠어?”
“심부름이라니. 정말로 어렵고 대단한 일을 시킬 생각이거든. 수련해서 강해지면 어려운 일을 맡길 거니까, 그때 가서 무섭다 해도 소용없어.”
“응, 뭐든 열심히 해 볼게!”
스칼렛은 나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과연 언제까지 저 태도가 유지될 수 있을지, 나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만큼 빡세게 굴릴 계획이거든.
“그보다 클리프는 로비에 있는 것 같더라. 내려가서 아침은 같이 먹을 거지?”
“루카, 걱정 안 해도 돼. 클리프가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스칼렛은 더이상 울지 않았다.
대신에 검지 두 개로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웃는 시늉을 했다.
나야 클리프가 반드시 살아남으리란 사실을 알지만, 스칼렛은 영영 떠나보낼지도 모르는 친구를 배웅하는 것이다.
‘분위기가 초상집 같아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
가능한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자.
스칼렛은 이렇게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다.
음각으로 여러 동식물이 장식된 계단을 내려가자, 아래에는 아침을 시켜 놓은 클리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하네.”
괜스레 서로를 어색해하는 두 주인공을 대신해서 내가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스칼렛도 아차 싶었는지 곧바로 입을 열었다.
“클리프, 떠나기 전에 푹 자 둬야지. 피곤해서 어쩌려구.”
“뭐, 필요한 물건 좀 사느라고. 오늘 아침은 내가 살게. 다들 괜찮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셋은 익숙한 포지션으로 테이블에 앉았다.
내 정면에는 스칼렛, 옆에는 클리프.
평상시와 비슷한 조합이었지만, 아침 식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분위기를 최대한 좋게 유지하려 해도 근본적인 아쉬움은 감출 수 없었다.
무려 스칼렛도 식사량이 1인분에서 멈췄을 정도.
어수선한 식사를 마치고 뒤이어 시킨 음료수 세 잔이 테이블에 깔릴 즈음.
나는 이 분위기를 타파할 겸, 압축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오다 주웠다.”
내가 내민 물건은 작고 녹슨 상자였는데, 안에는 화폐로 쓰이는 5.56mm 군용 소총탄이 가득 들어 있었다.
‘역시 선물은 현찰이 최고지.’
클리프는 상자의 내부를 살피며 진심을 담아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군용탄 밑에 깔린 두툼한 편지 봉투를 발견하고 물었다.
“응? 근데 이건 뭐야?”
“내가 주는 두 번째 선물. 나중에 천천히 읽어 보라고.”
애당초 글자도 못 읽는데 이런 걸 왜 주는 거야.
그런 클리프의 불온한 사고를 알아차린 나는 득달같이 조롱 섞인 응원을 보냈다.
“아, 꼬우면 공부해서 읽어 보시든가요.”
“그으래, 내가 꼭 내 눈으로 읽고 만다. 그리고 군용탄은 정말 고오맙다.”
쿵.
클리프는 집념의 불씨를 타오르게 만드는 도발에, 상자를 닫으며 무언가를 결심한 듯 보였다.
클리프가 선물을 받은 직후.
유독 말수가 줄어든 한 소녀가 있었다.
뻘쭘하게 빈손을 비비는 스칼렛, 나는 그녀가 무안하지 않도록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작별 선물이고, 너는 나중에 만났을 때 환영한다는 의미로 선물을 준비하면 되지.”
“……그래도 될까?”
내가 정해 준 해결책에 스칼렛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래, 스칼렛. 그렇게 해 줘.”
“그때까지 꼭 준비할게! ……그런데 우리 2년 뒤에 어디서 만나?”
스칼렛의 질문에 나와 클리프는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안 정하고 이별하려고 했었네.
나는 태연하게 미리 고민해 두었던 답을 꺼내 놓았다.
“2년 뒤에 퍼스트 시티. 우리가 살았던 ‘파이브 포인트’에서 만나자.”
“좋은 생각이야. 스칼렛은 어떻게 생각해?”
“우리가 살던 곳이잖아. 나도 좋아.”
클리프와 스칼렛은 일시에 내 말에 동의했다.
이로써 필요한 대화는 모두 끝났다.
작별의 시간은 점차 다가왔지만, 문제는 클리프의 심정이었다.
더 있고 싶다.
세상에 둘뿐인 내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다.
클리프는 대화를 이어 갈수록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사색에 잠겼던 클리프는 폰허부와의 대화를 마치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안 되겠다. 더 있다가는 진짜로 못 떠나겠어.”
클리프는 숨을 크게 내쉬며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큰 소리로 선포했다.
“몸 성히 잘 다녀올게. 2년 뒤에 만나면 내가 떠났던 이유랑 그간의 이야기도 다 말해 줄 수 있을 거야.”
“별일 아니면 파이브 포인트 납골당에 묻어 버릴 거니까. 무서우면 돌아올 생각도 말고.”
내 말에 클리프가 크게 웃으며 그럴 일은 없다고 답했다.
이어서 스칼렛도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우리, 나중에 만날 때도 웃으면서 만나자.”
“그래, 너희도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있어.”
훈훈한 작별 인사를 끝으로 클리프는 뒤도 안 돌아보고 여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후다닥 돌아와서 나에게 이상한 공책을 건넸다.
“참참! 깜빡 잊고 그냥 갈 뻔했네. 이거 네가 검을 휘두를 때 습관적으로 나오는 안 좋은 동작을 모아 놓은 거야. 나중에 꼭 이겨 줄 테니까 두고 봐라!”
클리프는 공책을 내 손바닥에 올려 주고 곧바로 떠났다.
이건 뭐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내 손에 올라온 이상한 공책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 * *
당일 오후.
나와 스칼렛은 인적이 드문 미트 타운 외곽으로 나왔다.
‘두고 보라니, 뭔가 클리프의 마지막 말이 사망 플래그처럼 들렸단 말이야.’
주인공이 말했으니 망정이지, 내가 그런 말을 했다면 꼼짝없이 중도 하차 각이 나올 터.
물론, 클리프가 죽을 걱정은 사막의 방파제처럼 의미가 없다.
튜토리얼에서 폰허부를 만났던 게임과 달리 한 달 동안이나 검성의 수련을 받았으니.
‘혹시 몰라서 힌트용 편지도 넣어 놨고.’
게임보다 나빠진 부분이 있다면, 원래 같이 떠났어야 할 스칼렛이 여기에 있다는 것뿐이다.
“루카, 지금 뭐 하는 거야?”
스칼렛은 근처의 커다란 바위를 한곳으로 모으는 나를 보며 물었다.
뭐긴 뭐야, 오늘부터 공짜 밥은 없다는 의미지.
“웃차, 이걸로 마지막. 스칼렛 여기에 뭐가 보여?”
“커다란 바위 열 개.”
“그래, 잘 봤어. 이제부터 너는 이 바위를 저기 그루터기 근처로 옮기면 돼.”
엥?
스칼렛이 고개를 비틀면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바위 하나의 무게는 얼추 80킬로그램. 거기에 내가 가리킨 그루터기는 수십 미터는 떨어진 곳이었다.
전설급 스킬에 다양한 숙련도작을 마친 능력자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루카, 나를 근육빵빵으로 만들 속셈인 거야?”
스칼렛은 당연하게도 내 지시에 항의했다.
나는 검지를 세워 좌우로 흔들며 그 단순한 사고방식에 경종을 울렸다.
“당연히 아니지. 여기에 서서 바위를 바라봐.”
“응.”
스칼렛이 쫄랑쫄랑 내 자리로 왔다.
나는 그녀를 앞에 세우고 귓가에 한 가지 주문을 읊어 주었다.
“이거 해 질 녘까지 옮기지 못하면 저녁밥은 없어.”
“……뭐?”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좋아.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면 돼.”
지난밤, 스칼렛은 이미 초능력을 각성했다. 이 수련은 각성한 능력을 다듬는 과정에 불과했다.
그녀의 탤런트는 [간섭], 세상 모든 것에 간섭하여 조정하고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정말 범위가 넓어 보이는 탤런트답게 탱커, 딜탱, 원딜, 버퍼, 디버퍼에 이르기까지.
스칼렛은 여러 환경과 이벤트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육성이 가능하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깨우치는 기본 능력은 염동력.
성능 자체는 일반적인 마법사의 염동력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스칼렛은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그녀는 기술을 사용하며 정신력 이외에 어떠한 것도 소모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의지만 있다면 24시간, 365일 내내 기술을 펼칠 수 있다.
더불어 무한으로 수련을 즐기는 것도 가능하고.
“루카! 저녁이 없다는 게 무슨…….”
“자아, 시작!”
짝!
박수 소리와 함께 나는 오러를 사용해 스칼렛의 곁에서 사라졌다.
저 멀리서 에드바르트 뭉크가 그린 절규를 떠올리게 만드는 아우성이 들려왔지만.
‘크흡! 스칼렛, 나를 용서하지 마렴!’
나는 눈물을 삼키며 스칼렛의 비명을 철저히 무시했다.
세븐 시티에서 활개 치고 다니려면 이런 스파르타식 교육밖에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스칼렛의 수련에 할애할 내 시간과 여유가 부족했다.
바로 뜻하지 않은 호박이 굴러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떠나는 클리프가 나에게 준 공책은 내 동작을 교정해 줄 ‘지도서’였다.
단순한 책은 아니었고, 지도서를 펼쳐 본 순간 폰허부가 준 선물이 나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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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검술 지도>
(내용)
-열정과 끈기로 달성하자! 손에 박힌 굳은살과 땀에 전 수련복이 당신을 증명한다!
(목표)
-지도서의 검무를 완벽히 재현 0/100
(보상)
-[검귀식: 그림자 검술]의 숙련도+50%
∵ 해당 스킬이 B등급 이상이 되면 퀘스트가 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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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 흔히 보았던 수련 퀘스트.
설명에서부터 땀내 나는 폰허부의 열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가시는 길에 이렇게 또 도움을 주시네.’
폰허부가 이곳(?)을 떠나며 남긴 유산.
지도서에는 내가 검을 휘두르며 은연중에 나오는 습관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즉, 이런 습관을 고치면 숙련도를 왕창 뿌려 준다는 이야기.
‘완벽히’라는 문구가 상당히 거슬렸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내가 살아가는 곳이 현실인 이상, 언젠가는 검술의 벽에 부딪힐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나는 차분하게 눈을 감고 나에게 남은 시간을 가늠했다.
최소 3개월.
세븐 시티에 일어날 사건을 기다리기까지 그만한 시간이 있다.
힘을 갈고닦아 날아오를 발판을 마련한다.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나에게 닥쳐 올 죽음을 미리 걷어 내야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클리프가 준 책자를 보며 수련을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