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5화>
15. 황야의 3인(3)
여섯 개의 깡통, 그리고 마공학 리볼버.
마치 결투를 앞둔 카우보이처럼, 나는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며 목표물을 주시했다.
이윽고 마음의 준비가 끝나자.
피피피! 피피핑!
여섯 줄기의 푸른 섬광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팅통, 청명한 소리를 내며 두 개의 깡통은 뒤로 훌러덩 넘어갔고, 나머지는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스킬: [리볼버 패닝]의 등급이 ‘E’가 되었습니다. 민첩+2]
10미터 거리에서 깡통을 절반만 맞혔다. 난사 속도도 느리고 명중률은 절반도 안 된다.
실전에서 사용하기에는 아직 무리라는 뜻.
나는 여섯 개의 실린더에 오러를 채우고 남은 깡통을 한 발씩 나눠서 사격했다.
팅! 팅! 텅! 탱!
[스킬: [사격 입문]의 등급이 ‘D’가 되었습니다. 근력+1, 민첩+1]
‘끊어서 쏘면 또 괜찮단 말이야.’
보안관보 시절에 사격 연습을 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아니, 어떻게 실탄 훈련도 안 하고서 실전에 투입할 생각을 하지?
도대체 이 황무지의 윗대가리들은 생각이 없다. 덕분에 처음부터 숙련도작을 해야 하잖아.
나는 괜히 성을 내면서 리볼버를 총집에 꽂았다.
“그래도 숙련도는 잘만 올라서 다행이지.”
권총은 살아생전 처음 쏴 봤지만, 스킬 등급이 올라가며 솜씨는 수직으로 상승했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
루카가 원래 재능충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검술과 연공법을 제외한 어떤 스킬이든 쭉쭉 성장하고, 그게 또 현실로 반영이 되니 신기할 노릇이다.
뭔가 플레이어 특전 같은 게 있다면 시스템에 표시가 됐을 텐데.
하긴 이곳은 게임과 현실의 특성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으니.
애당초 고민한다고 해도 해결될 일도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내 성장에 막힘이 없다는 것. 지금은 그 사실만으로도 눈물 나게 고마웠다.
이제 3티어 소모품, 모쏠 아다, 찐따, 조조연 루카는 없다구!
여기에 더해서.
나는 압축 주머니에서 큰 대접과 은은한 주황빛이 도는 액체 5병을 꺼냈다.
●[엘프제 하급 엘릭서]●
분류: 물약
등급: 고급
효과: 오러+20
설명: 판게아 동부의 엘프들이 제조한 비약. 1년 주기로 나타나는 진귀한 약초들을 정제해 연금술로 빚어냈다. 동종의 엘릭서를 복용할 경우 효과가 20%씩 감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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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좋은 물건은 아니어도, 개수가 많다면 또 말이 다르다.
20, 16, 12.8, 10.24, 8.192.
대충 눈알을 굴리며 계산한 결과로는 오러가 67점 정도 오른다.
검기를 발현할 오러는 모으는 셈. 그 정도면 대략 게임 초중반 수준의 실력은 갖추는 것이다.
이 노력의 결실을 축하할 폭탄주를 마시기 전에.
나는 먼저 수련용 공터 근처에 점찍어 둔 작은 토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콸콸콸콸.
모든 엘릭서의 뚜껑을 따고 대접에 쏟아부었다.
여느 무협지나 판타지에 나오듯, 하나하나를 조심해서 섭취할 필요는 없다.
고급 등급은 대충 위장에 집어넣고 오러홀 내부로 흡수하면 그만.
“후욱, 후욱. 간드앗!”
먹방 유튜버의 마음가짐으로 대접에 담긴 내용물을 모조리 입으로 들이부었다.
고약한 약초 냄새. 미각을 마비시킬 만큼 지독한 쓴맛.
그따위 것들이 느껴지며 걸쭉한 액체가 꿀렁꿀렁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위장에 도착한 엘릭서는 불을 붙인 휘발유를 삼킨 것처럼 요동쳤다.
‘세상천지에 이런 호사를 누리는 놈이 있을까.’
레드넥의 밑천, 제가 잘 먹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오러 연공법을 실시했다.
5분, 10분. 시간이 흐를수록 날뛰던 기운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와 동시에 전신의 오러 회로가 뜨거운 기운으로 뒤덮였다. 혈관이 꿈틀거렸고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졌다.
30분, 1시간…….
어두운 토굴 안에 있었던 탓에, 감각으로도 시간의 변화를 예측하기는 힘들었다.
모든 기운이 사라져 복부에 공허함이 자리 잡을 즈음.
“휴우, 다 끝났다.”
골고루 확장된 두 개의 오러홀을 감지하며 눈을 뜨자, 익숙한 알림창이 허공에 떠 있었다.
[특성: [오러 탐구자]이(가) 개방되었습니다.]
[[오러 탐구자]의 효과로 효율이 10% 상승하며 오러를 외부로 응집할 수 있습니다.]
오러 능력치의 점수가 100점을 넘기면 개방되는 특성.
[오러 탐구자]가 생성되었음을 알리는 문구를 보자, 기쁨의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이야, 게임에서도 이렇게 성장이 빨랐던 적은 없는데.”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서브 퀘스트인 <암시장의 노예들>을 클리어하며 얻은 보상이 아직 남아 있다.
(희귀)숙련도 부여권
간단하게, 스킬을 고르면 정해진 만큼 숙련도를 올려 주는 아주 사랑스러운 녀석이다.
나는 바로 스킬창을 열어 숙련도를 부여할 스킬을 둘러보았다.
뭐든 숙련도를 올린다면 확실히 도움이 될 터.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 이목을 끌어당기는 스킬이 있었다.
[개조: 그림자 연공] E등급 93.25%.
검술과 병행하며 수련한 덕분에 연공법도 승급이 다가온 상태였다.
‘검술은 파이크를 쓰러트리며 D등급이 됐는데, 연공법은 아직 E등급이기도 하고…… 몰아줄 때 확실히 주는 게 좋겠지.’
숙련도 부여권이 희귀 등급인지라, 전설급 스킬에 사용하면 효과가 10퍼센트로 토막 나겠지만.
뭘 어쩌겠냐, 그만큼 숙련도를 올리기가 힘든데.
오러가 많아야 검술도 펑펑 쓰지.
이런 논리로 결정을 내린 뒤, 지체하지 않고 오러 연공법에 부여권을 사용했다.
[스킬: [개조: 그림자 연공]의 등급이 ‘D’가 되었습니다. 오러+30, 근력+3, 민첩+3, 체력+3]
감격스럽다.
최종적으로 달성한 오러의 능력치는 174점.
레드넥의 소굴로 잠입할 당시가 약 80점이었으니 정말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 버렸다.
‘이제 검술 B등급까지는 무난하게 쓰겠네.’
이로써 정산은 모두 완료.
다음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날갯짓을 시작할 차례였다.
* * *
클리프가 떠난 이틀 뒤.
나는 오늘 지부장을 만나기 위해 연합 수사국의 미트 타운 지부를 찾았다.
“접견 예약하신 루카 님 맞으신가요?”
비치된 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나에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갈색 웨이브 펌, 몸매가 드러나는 슬림 핏 정장. 현대의 차도녀를 닮은 미녀.
더글라스 지부장의 비서이자 애인인 이사벨이었다.
“예, 맞습니다. 저를 호출하셨다고 하셔서 왔습니다만.”
“후후후, 생각보다 어린 분이셨네요. 저를 따라오세요.”
붉은 립스틱이 살짝 옅어진 입술을 달싹거리며 이사벨이 눈웃음을 지었다.
와, 저 미소를 보고 안 넘어가면 사람이 아니지.
한발 앞서 걷던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은근슬쩍 목선을 보여 주었다.
노골적인 유혹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루카가 확실히 잘생긴 캐릭터는 맞다.
보통 게임에 나오는 양산형 미남 캐릭터. 뚜렷한 특징은 없어도 전반적으로 잘생겼다는 느낌이니 이상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사벨이 나에게 던지는 추파는 조금 의미가 달랐다.
‘감히 나를 홀리려 해? 어림도 없지.’
클리프가 느꼈다는 미묘한 기운.
검성의 감각을 물려받은 국밥이의 촉은 절대적이다.
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 어여쁜 껍데기 내부에 품고 있는 흉심을 모를 리가 있나.
이사벨은 넓게 보자면 굳이 나서서 처리할 수준은 아니지만, 알차게 숙련도와 보상을 뽑아 먹을 좋은 먹잇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미트 타운의 히든 보스이니까.
‘스테이크 썰기 전의 애피타이저 같은 느낌이지. 저걸 상대하려면 스칼렛의 도움이 필요하니 서두르지 말자.’
나는 생글생글 웃어 보이는 이사벨에게 덩달아 미소를 건네며 복도를 걸었다.
“지부장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사벨은 파스텔 톤의 나무 문 앞에서 간드러진 목소리로 지부장을 불렀다.
“들여보내게.”
문 너머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이사벨은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자연광을 그대로 반사하는 대머리. 나는 살짝 옆으로 이동해 그 빛을 피하고 인사를 건넸다.
“더글라스 지부장님. 50번 개척지 보안관보로 있었던 루카라고 합니다.”
“하하하, 알고 있네. 반군의 아지트에서 주민들을 구했다지? 소파에 앉아서 대화하세.”
더글라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사벨에게 커피 두 잔을 부탁했다.
둘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시선. 심지어 지부장의 목덜미에 묻은 붉은 립스틱 자국도 살짝 엿보였다.
쓰읍, 때와 장소는 좀 가려서 해라.
불륜의 증거는 최대한 무시하고, 나는 더글라스와의 대화에만 집중했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동안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커피 잔이 나왔다.
이게 얼마만의 카페인이냐. 나는 설탕과 우유를 잔뜩 넣어 인스턴트 커피처럼 만들어 마셨다.
“자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이번에 보안관보를 그만두었다고 들었네. 맞나?”
“예, 저번에 만나셨던 클리프를 통해 사직서를 보냈습니다.”
“설마 자네 같은 인재가 단순히 놀기 위해서 그만둔 건 아닐 테고. 원한다면 내가 비공식적으로 일자리를 소개해 주고 싶네만…….”
더글라스 지부장의 오러가 내 신체를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나는 그 음험한 기운에 대항해 오러를 외부로 방출하며 막아섰다.
문명이 한번 리셋되고 생겨난 오러 연공법 따위가, 전설적 인물들이 사용했던 연공법의 오러를 뚫을 수 있겠는가.
간단하게 자신의 오러를 막아 내자, 그는 살짝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크흠,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제 실력을 가늠하시려던 연유가 무엇인지만 말씀해 주신다면요.”
“요새 뒤쪽 라인으로 괜찮은 일자리가 많이 들어오지 뭔가? 자네와 일면식은 없지만, 실력 있는 친구라길래 좋은 일자리를 추천해 줄 요량이었네.”
더글라스는 패배를 시인하며 머쓱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였다.
황무지를 포함해 세상 어느 곳인들 조건 없는 호의가 있을까.
대충 나를 어딘가에 소개하고 중개 수수료를 받아먹겠다는 뜻이었다.
“지부장님께서 추천해 주시는 일이라면 보통 일자리는 아니겠군요.”
“자네도 보통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미리 말해 두는데 분명 마음에 쏙 들 걸세.”
더글라스는 그리 말하며 서류철을 내밀었다.
거대 PMC(사설 군사 기업)의 신입 전투원이나, 정부 내 주요 인사의 경호원.
모두 눈이 돌아갈 좋은 제안들. 하지만 그 안에는 압도적으로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항목이 있었다.
세븐 시티. 폰테인 그룹의 회장 직속 경호원.
내 눈빛이 문서의 제일 아래로 향하자, 더글라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어떤가, 구미가 당기는 게 있나?”
“다 과분한 제안들이군요.”
“과분하다니. 자네 실력이라면 적절한 편이지. 아니, 맨 밑을 빼면 그렇겠지.”
“폰테인 그룹 회장님의 경호원 말입니까?”
나는 모르는 척 지부장의 의중을 떠보았다.
판게아의 플레이어라면 ‘비토 폰테인’을 절대 모를 수가 없겠지만.
비토 폰테인. 그는 ‘해츨링’이란 별명으로 통한다.
언젠가 무역 연합의 최정점에 올라설 새끼 용. 일개 주류업자로 시작한 그의 사업은 무역 연합의 일각을 노려 볼 정도로 크게 성장한 상태였다.
“반응이 왜 그런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요새 폰테인 회장님이 소속이 없는 오러 사용자를 많이 뽑는다더군. 조건은 당연히 모두 최상이고.”
“저 같은 초짜에게 이런 제안이 올 수 있을까요? 오히려 더 걱정이 됩니다.”
“하하하, 연합 수사국의 지부장이 이상한 정보를 주겠는가? 자네 정도니 이런 기회가 오는 걸세.”
더글라스는 혀가 아릴 정도로 사탕발림을 해 댔다.
얼핏 보면 굉장히 좋은 제안처럼 보이지만.
‘누가 무덤 자리를 알고서 찾아가겠냐. 여기로 가면 경호원이 아니라 충직한 마족1이 되겠지.’
비토 폰테인의 옆자리는 억만금을 준대도 사양이다.
누가 짐작이라도 하겠는가. 세븐 시티의 주인이 마족의 하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게임에서는 세븐 시티를 뒤덮은 악의 마수를 언제 걷어 내느냐에 따라 추후의 난이도가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목표는 당연히 세븐 시티.
몸소 지옥 불 헬 난이도를 체험할 필요는 없으니, 폰테인 그룹의 흑막을 빠르게 들춰내야 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디테일한 방법이야 천천히 고민하면 될 거고.’
그 전에 이 자유로운 땅에서 진정으로 자유를 얻을 열쇠가 필요했다.
열쇠는 바로 더글라스 지부장.
이 변태 아저씨는 요새 두 집 살림하느라 돈이 궁하다. 그 선택이 지부장을 파멸로 이끌고 있지만 말이다.
이것저것 다 따지지 않고서 제일 중요한 사실은.
더글라스는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고, 나는 더글라스의 주머니를 채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탁, 나는 서류철을 내려놓으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지부장님, 전부 다 좋은 제안이지만, 사실 저에게 더 좋은 제안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