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로 살아남기 14화>
14. 황야의 3인(2)
38번 개척지의 보안관들은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내가 구한 사람들의 증언 덕분에 한순간에 영웅으로 탈바꿈되었다.
그리고 4일이 지난 지금.
나는 무역 연합 남부의 젖줄이라 불리는 ‘미트 타운’ 중심가에 있었다.
북쪽에 거대한 목초지와 큰 강이 있는 이 거주지는, 이름처럼 무역 연합의 중요한 식량 생산 거점이다.
수십만 마리가 넘는 돼지, 소, 양, 말이 이곳에서 사육된다.
남부에서는 단연 가장 규모가 크고, 황무지 전체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
덧붙여, 워낙 고기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 일반인도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가격이 저렴하다.
이쯤에서 50번 개척지에서는 왜 고기를 배식하지 않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비.용.절.감!
이 무적의 단어로 모든 논리가 반박된다.
투척용 총도 그렇고 이 동네는 정말 대단하다. 하긴 판게아 윗대가리들이 얼마나 잔혹한지는 말해 봤자 입만 아프니.
“구두 닦아요! 멋진 신사분, 구두 닦고 가세요!”
빵모자를 눌러쓴 소년이 길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펼쳤다.
이곳에는 정장을 입은 샐러리맨도 심심찮게 있었고, 고만고만한 잡화점이 아니라 종류별로 상품점이 즐비했다.
그뿐이랴, 술집이나 서커스 같은 유희 거리도 있다.
이 밖에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쭉 나열하면 이렇다.
곳곳에는 현상금 포스터나 B급 전단지.
돈을 구걸하는 거지.
엉클 샘 신앙을 설파하는 리버티 교단의 전도사.
호구 잡으려는 뚱뚱이 포주.
골목에서 서성이는 수상한 놈들…….
이곳은 인구 3만 명이 사는 소도시.
따라서 개척지처럼 조용하거나 황량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쓰읍하! 이제 좀 문명의 향기가 느껴지네.”
“향기는 무슨. 주변에서 술 냄새랑 찌린내가 진동을 하는데. 약간 우리가 살았던 퍼스트 시티 빈민가 같은 느낌이야.”
시골 농부를 지향하는 우리의 국밥이가 뚱한 표정으로 걸어왔다.
나는 놈을 째려보다가 그의 손에 들린 서류로 눈길을 움직였다.
“뭐야, 벌써 오는 거냐. 미트 타운의 지부장 나리는 어때?”
“배불뚝이에 아저씨, 머리도 까졌던데. 게다가 여비서랑…….”
“불륜이라고?”
“어, 음. 조금 충격적이긴 하더라. 문이 열렸는데 둘이 막…… 여튼 대단했어. 그보다 헤리스 씨는?”
“아직 안 왔어. 자, 말 나온 김에 내 사직서도.”
나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클리프에게 쥐여 줬다. 누런 봉투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아쉬움을 그대로 대변했다.
4일 전에 보안관보를 그만두겠다고 밝혔을 때, 클리프는 그 결정에 극구 반대를 외쳤다.
당연하다. 임시직이긴 해도 노력을 통해 얻은 자리니까.
“난 아직도 너무 아쉽다.”
“너도 동의해 놓고 딴소리는.”
“그냥 해 본 소리야. 그런데 일방적으로 사직서만 줘도 돼? 계약서도 썼잖아.”
“계약서에 근무 기간과 관련된 내용은 없었잖아.”
“……그으랬지. 잠시 기억이 안 났어.”
클리프가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무지렁이란……. 분명 내용도 모르고 냅다 서명했겠지.
무식한 황무지인에게 계약서란 모두 노예 계약서뿐. 글을 못 읽는 국밥이가 내용을 지레짐작한 것은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다.
‘퍼스트 시티에서 개척 노동자로 올 때도 같았으니까.’
지구가 침략하기 이전의 인물인 폰허부도 영어와 알파벳은 모른다.
순간 글을 알려 줄까 고민도 해 봤지만, 저놈의 자존심도 있을뿐더러 그럴 시간적 여유도 부족했다.
어차피 글자는 친절하고 어여쁘신 엘프 선생님에게 배울 테니.
“이야, 다들 여기 있으셨군요!”
“헤리스 씨. 루카, 헤리스 씨가 오셨어.”
“나도 눈이랑 귀는 있거든. 일은 잘 처리됐습니까?”
“네, 말씀하셨던 채권 양도와 관련된 서류와 스칼렛 씨의 노동 계약서입니다.”
쪽팔림 때문에 억지로 텐션을 끌어올린 국밥이의 손길을 뿌리치고, 나는 헤리스가 건넨 서류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혹시 위약금을 크게 부르지는 않던가요?”
“하하하,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동업자 할인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이제 친구분께서도 자유민이시군요.”
헤리스가 너스레를 떨며 나와 클리프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보안관보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엿들은 뒤로 그는 일방적인 호의를 보내왔다.
지금만 해도 마을에 도착하기 무섭게 스칼렛의 위약금을 대신 지불하지 않았는가.
과도한 친절의 목적은 뻔하다. 어떻게든 티어슨 컴퍼니의 용병으로 데려가겠다는 수작질이겠지.
“저어, 혹시 나중에 식사라도 한번 하시지요. 제가 좋은 식당을 하나 알고 있습니다.”
“저야 감사하죠. 제 친구 문제도 해결해 주셨는데, 제가 사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거야 저를 구출해 주신 작은 성의죠. 나중에 클리프 씨도 함께 오시죠. 제가 멋들어지게 대접하겠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와 묘하게 굽은 허리.
나는 그의 성의에 화답하는 미소를 띠며 과장님을 배웅했다.
이거 어떡하나.
내 몸값이 너무 비싸서 중소기업은 안 간다고 말하는 걸 깜빡했네.
* * *
다음 날.
나와 클리프는 미트 타운에서 살짝 떨어진 드넓은 목초지로 나왔다.
용건은 당연히 내 검술 수련이었다.
“아직 괜찮지? 아직 여유 있으니까, 한 번 더 봐줄게.”
클리프의 말에 나는 기수식을 취했다.
그림자 검무, 검술서를 통해 각인된 일련의 동작을 떠올리며 두 개의 오러홀을 자극했다.
오러 회로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기운.
두 개의 출발점에서 시작된 기운이 완전히 신체를 아우르는 순간.
스르르. 내 몸이 여러 개의 상을 남기며 넘어질 듯 질주했다.
검이 앞서 나가며, 그 뒤를 허리와 다리가 보조한다.
경쾌하다가도 느릿하게, 방향을 뒤틀고 속도를 시시각각 변화시켰다.
폰허부가 목격한 검귀의 검술.
그 신들린 움직임의 깨달음을 좇아 검을 휘두르고, 동작을 연결하며 유연하게 검무를 췄다.
이윽고 모든 동작이 완성되자.
짝짝짝.
워낙 집중했던 터라 주변의 소음이 멀어진 청각으로 클리프의 박수 소리가 꽂혔다.
이번에는 됐나? 흘러내리는 땀을 무시하고 스킬창을 보자 검술의 숙련도가 올라가 있었다.
‘성공이다.’
나는 소수점 단위로 올라간 숙련도를 확인하고 씨익 웃었다.
검술로 상대와 겨루는 것을 제외하면, 숙련도를 올릴 방법은 검무를 수련하는 게 유일하다.
그런데 이 검무가 칼춤만 마구 춘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었다.
“잘했어. 자세도 많이 교정이 됐다고…… 됐어.”
폰허부와의 자동 통역기.
클리프가 스승에게 들은 말을 나에게 전해 주었다.
“그래? 어쩐지 이번에는 느낌이 좋더라.”
대략 4주 전.
막 수련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숙련도를 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노래방 기계가 점수를 주는 것처럼, 요구하는 완성도를 갖추지 못하면 시스템이 숙련도를 주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폰허부의 조언으로 자세와 오러의 배분이 교정된 이후에는 원만한 수련이 가능해졌다.
“너, 50번 개척지로 출발하는 게 언제라고?”
내려놓았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묻자, 클리프가 태양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오. 지부장님께서 연합의 지원군이 그쯤은 돼야 준비될 거라고 했거든.”
“지금 가면 한 일주일 정도는 못 보겠네.”
“그렇지. 맞다, 네 이야기를 듣더니 너도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그래?”
“반군 기지에서 주민 40명을 구한 영웅이잖아. 보안관보를 그만두면 추천하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하셨어. 혹시 몰라? 연합 수사국으로 스카우트할지.”
연합 수사국.
보안관이 거주지마다 있는 자치 경찰이라면, 수사국은 황무지 전 지역을 아우르는 정부 소속의 정보 및 법 집행기관이다.
그리고 이 인근의 최고 책임자인 미트 타운의 지부장이 바로 연합 수사국 소속이었다.
보통이라면 클리프가 지부장을 만날 일은 없었겠지만, 마족 숭배자와 관련되었을지도 모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빈민 출신은 가지도 못할걸? 그나저나 너는 보안관 일 계속할 거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곧바로 설계를 시작했다.
튜토리얼이 끝난 지금, 이제는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니까.
다행히도 클리프의 대답은 나의 기대와 일치했다.
“스칼렛도 자유민이 된 마당에 내가 50번 개척지에 있을 필요는 없지. 다만.”
“다만?”
“그러면 우리 백수 되는 거잖아.”
“돈 많은 백수면 좋지 않냐? 너한테 줄 선물도 가져왔다고.”
나는 작은 압축 주머니를 흔들다가 입구를 벌리고, 그 안에서 거대한 검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국밥이가 깜짝 놀라며 내 어깨를 양손으로 잡아끌었다.
“너, 너! 설마. 반군들의 물건을 훔친 거야? 어쩐지 이상한 총이랑 검도 새로 생겼더라니. 그럼 그 신기한 주머니도?”
“응, 암시장이잖아. 다들 물건 버리고 도망가기에 몇 개 주웠지.”
“아니, 너무 위험하잖아.”
“잘 살아 돌아왔는데 뭘.”
“그건 그렇지만…… 됐다. 선물은 고맙게 받을게.”
왠지 자식을 포기한 부모의 눈빛 같은데? 이 앙금은 마음속에 넣어 두고.
클리프가 선물로 받은 대검을 둘러볼 때, 나는 여기서 비장의 수를 빼 들었다.
“참, 거기서 이런 것도 주웠어.”
두꺼운 종이 뭉치.
알파벳이 빼곡하게 적힌 종이 뭉치를 보자, 클리프는 호기심을 빛내며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데?”
“어디 보자. ‘고대 영웅 전력화 계획’. 이렇게 적혀 있어.”
“되게 위험한 문서 같은데. 이거 반군의 기밀문서 아니야?”
“응, 궁금해서 한번 읽어 봤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내 모습에 클리프는 질려 버린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용은 뭔데?”
“응, 대전쟁 이전 시대 영웅들의 영혼을 수거해 병기로 만들 계획이라나 봐.”
“……그거 엄청난 이야기 아니야?”
“영웅들의 영혼은 그들이 생전에 쓰던 유물에서 채취할 수 있다. 음, 현재 발굴한 명단도 있네.”
가위손, 기요문드 펠코.
창왕, 안젤로 드라손.
신궁, 유리엘.
나는 영웅들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국밥이의 정신이 산만해지는 순간.
“검성, 폰테베드라 허멘 부르고스.”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나와 다르게, 클리프는 아연실색하며 종이 뭉치를 휙 뺏어 갔다.
물론,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은 그것과 전혀 관련 없는, 반군과 거래한 회사의 목록이다.
폰허부도 알파벳은 읽을 줄 모르니 뺏어 봤자다.
“정말로 그 이름이 여기에 적혀 있다고?”
“그래, 검성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생전에 썼던 투구도 찾았대.”
“어, 어디서?! 어디서 발견됐다는데? 아니, 그보다 반군 놈들이 이걸 어떻게 알아?”
“야야, 침 튀겨. 발견은 아니고 추측이래. 황무지 서남쪽의 유적지라고 적혀 있었어.”
클리프는 내 말을 듣고 사색에 잠겼다.
아마 폰허부와 대화 중일 터. 내가 이런 촌극을 벌인 이유는 이렇다.
이제는 슬슬 주인공이 여정을 떠날 시기니까.
클리프의 탤런트는 ‘영혼 계승자’.
과거의 칼자루처럼 검성의 다른 유산을 획득해야 클리프는 더욱 성장한다.
50번 개척지가 좀비의 습격으로 망하고, 간신히 탈출한 주인공은 유산을 얻기 위해 황무지를 돌아다닌다.
그게 게임 중반부까지의 흐름이다.
‘그런데 50번 개척지는 원래와 다르게 망하지 않았지.’
이야기의 큰 줄기가 뒤틀렸다.
따라서 나는 클리프가 본래의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도록 이끌어 줄 필요가 있었다.
“스승님, 그렇다면 반군 놈들이 스승님의 유산을…….”
클리프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의 대화를 입 밖으로 꺼냈다.
오케이, 스스로 위기의식을 가져 주면 좋지.
이로써 판은 전부 깔아 줬다. 나머지는 클리프가 개척지에 다녀오면서 고민할 일.
나는 클리프의 어깨를 툭툭 치며 하늘 위를 가리켰다.
“그보다 클리프, 이제 정오가 다 된 것 같은데.”
“뭐? 아이 씨. 야, 일주일 뒤에 스칼렛이랑 같이 네가 묵는 여관으로 갈게. 그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려!”
클리프는 나에게 당부하며 부리나케 미트 타운으로 달려갔다.
나는 적당히 멀어지는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압축 주머니로 슬쩍 눈길을 옮겼다.
소굴에서 얻은 엘릭서는 다섯 개. 일주일 동안 할 일이 아주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