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12화 (12/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12화>

12. 새벽의 축복(4)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이곳 암시장의 책임자, 파이크의 머리에 이 문장이 떠올랐다.

5년 동안 피와 땀을 흘리며 일군 노력이 일거에 박살 났다.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 장담했던 은신처는, 정체를 알 수도 없는 적에게 들켜 말 그대로 쓸려 나가고 있었다.

‘의심되는 자들은 모두 숙청했지만…….’

손을 쓰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 버렸다.

탄약을 보급받지 못한 수비대는 무너졌고, 이제 곧 좀비들은 이곳을 통째로 집어삼킬 것이다.

그러니 파이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였다.

그는 상의 주머니에 넣어 둔 작은 물건을 의식하며 혼란스러운 거리를 뛰어갔다.

압축 주머니. 이 안에 든 물품만은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한다. 최후에는 파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장님, 배반자로 보이는 놈들은 대부분 처리했습니다.”

마침 지시를 완수한 부하 두 명이 합류했다.

어차피 이 바위산에 생명체는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직의 해가 될 위험 인물들은 확실히 제거해 두어야 했다.

“그런데 왜 둘만 오는 거지?”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오인 사격이 많았습니다.”

“잘했다. 상인 놈들이 뭐라 해도 거래 장부가 나에게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우리는 빠르게 남문으로 빠져나간다.”

부하들의 대답을 듣고서 파이크는 시선을 남쪽의 협곡으로 고정했다.

부하들은 대부분 죽거나 행방불명. 수백에 달했던 부하가 이제 두 명만이 남았다.

수색하면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 자들도 있겠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그들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그때였다.

위화감, 타고난 그의 감각이 불길한 미래를 감지했다.

본인을 노리는 공격의 존재를 눈치챈 그가 서둘러 발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다들 멈춰!”

카앙! 하늘에서 나타난 거대한 대검이 부하 둘을 덮쳤다.

회전하는 칼날에 분쇄된 육신이 고기 조각이 되어 흩날렸다.

설마 북문을 습격했다는 거대한 오크 좀비가 던졌나?

잠시 그리 생각했으나 금세 그 명제를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그럴 리는 없다.’

좀비는 본능적으로 살육에 충실할 뿐.

도구를 사용해 사람을 죽인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못한다.

고로, 이건 인간이 던졌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딸깍. 파이크는 총집의 덮개를 열고 마공학 리볼버를 꺼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연합의 졸개든, 다른 세력의 첩자든.

반드시 주머니 안의 문서와 ‘엘릭서’를 지켜야 했다.

그는 날렵하게 몸을 날리며 북문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다가오는 위협의 그림자.

인기척을 느낀 파이크는 오른쪽 지붕 위로 리볼버를 난사했다.

피피피피핑.

여섯 줄기의 푸른 광선이 허공을 뚫었다.

맞았나? 한 줄기 기대를 걸어 본 외침은 화려하게 시야를 현혹하는 잔상에 무너져 내렸다.

“저건…….”

파이크는 한 소문을 떠올렸다.

대륙 동부에는 신비한 무술을 펼치는 자들이 많다고 들었다.

오러를 이용해 신체를 강화하고, 마공학 무기를 다루는 수준을 벗어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예에 가까운 무술을 쓰는 자들 말이다.

파이크의 생각을 읽었는지, 상대는 지붕 위에서 내려와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더니 히죽 웃었다.

“궁금하냐?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좀비를 몰고 왔는지, 그리고 이건 무슨 기술인지.”

“……비켜라. 나는 너 따위와 대화할 시간이 없다.”

유려하게 위로 꺾인 칼날.

상대가 든 곡도에 파이크는 온 신경을 집중해 상대의 실력을 가늠했다.

오러의 농도는 많이 낮다. 시간을 들인다면 충분히 이기리란 자신감이 있었다.

‘속도가 터무니없이 빠른 건 조금 걸리지만, 굳이 싸워 줄 필요는 없지.’

파이크는 리볼버 실린더에 오러를 주입하며 결단을 내렸다.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불확실한 부분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도망이 최선의 길.

그의 시선이 최적의 도주로를 탐색하던 찰나.

“맞다. 너네 마족이랑 하는 일은 잘되고 있냐? 악마 이름이 단델리온이었나.”

“…….”

파이크의 눈동자가 순간 격하게 흔들렸다.

문서를 본 건가, 아니, 마족과 관계된 문서는 여기 있지도 않을 텐데.

아직 레드넥의 간부들만이 아는 사실을 외부인에게서 듣자, 파이크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후웅, 바람이 불며 상대의 신형이 사라졌다.

위험.

연이은 충격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지만, 파이크는 타고난 육감 덕분에 바닥을 굴러 예리한 칼날을 회피했다.

서둘러 총구를 겨눈 파이크는 뭔지 모를 공허함에 겉옷 주머니를 뒤졌다.

없다. 압축 주머니가 사라졌다.

황급히 고개를 치켜든 파이크는 없어진 압축 주머니를 발견했다.

훌쩍 멀어진 곳에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그것을 들고 서 있었다.

“도망가면 쓰나. 네 부하는 여기서 다 죽었다고?”

“……그건 그냥 주머니다. 그걸 훔쳐서 어쩌려는 건가.”

구라는.

조용히 말을 흘린 남자는 손에 든 압축 주머니를 허공에 던졌다가 받으며 웃었다.

“암시장 장부와 고객 문서, 그리고 레드넥의 오러 사용자를 육성할 엘프제 엘릭서잖아. 어때, 빠삭하지?”

* * *

파이크. 레드넥의 간부이자 마공학 리볼버를 사용하는 총잡이.

주특기는 속사와 빠른 기동력.

그리고 예리한 감각의 하위 특성인 [육감]으로 모든 상황에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다.

개뿔, 주둥아리 좀 털어 주니까 아주 좋아 죽으려 하잖아.

핑! 마공학 리볼버에서 빠져나온 빛이 옆구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이후로도 푸른 빛이 연달아 나를 목표로 쏟아졌다.

[도둑질]을 통해 압축 주머니를 얻은 직후부터, 나와 파이크의 술래잡기가 이어졌다.

‘약간 DDR하는 느낌인데?’

나는 [예리한 감각]의 경고를 토대로 죽음의 왈츠를 췄다.

파이크는 중반부의 던전 보스.

상당히 균형 잡힌 보스이기에 정석으로 상대하려면 꽤 높은 능력치를 달성해야 한다.

빠른 기동력. 막강한 관통력을 가진 마공학 리볼버.

여러 특성과 스킬로 공격 패턴도 다양한 편이라 공략 자체가 좀 까다롭다.

당연히 약점은 있다.

‘인간형 네임드라 딜이 잘 박히기도 하고, 또 치명적인 약점도 있지.’

이 양반은 멘탈이 좀 약하다.

정확히는 정신 계열 공격에 대항할 방어 수단이 없다.

그렇기에 관련 디버프 스킬을 배운 스칼렛이 있다면 아예 묶어 놓고 팰 수 있다.

물론, 그건 중반부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고.

지금은 임시방편으로 주둥아리를 조금 털어 보았다.

효과는…….

“거기 서라, 도둑놈아!”

이렇듯, 무마취로 고환이 거세된 얼굴로 리볼버를 갈기는 중이다.

목표는 지연전. 오러를 왕창 소비해 주면 편하니까.

나는 파이크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유인하며 차분하게 때를 기다렸다.

지잉. 감각의 경고가 등줄기를 타고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파이크가 리볼버를 허리 부근에 붙이고 왼손이 공이치기로 향하자…….

피피피피피핑!

여섯 발의 오러탄이 내 몸을 살짝 스치고서 지나갔다.

쓰고 있던 모자가 훌러덩 날아갔고, 코트에는 구멍이 숭숭 뚫렸다.

앞뒤 생각 안 하고 너무 오러를 팍팍 쓰시는걸?

이 구도는 파이크가 한동안 분당 수십 발을 쏟아 낸 뒤에야 끝을 맞이했다.

“후우. 후우.”

나를 몰아세우던 파이크가 되레 거친 숨을 내뱉었다.

들고 있던 마공학 리볼버는 총집에 넣고, 그가 선택한 무기는 단검과 일반 권총이었다.

‘원래는 저게 1페이지 무기인데 말이야.’

그만큼 화가 나셨다는 말이지.

2페이지 무기를 먼저 꺼낼 정도로 빡쳤던 파이크는 가까스로 이성을 회복했다.

당연히 순순히 내버려 둘 생각은 없지만.

“이제 좀 정신을 차리겠어? 나 죽이고 주머니 챙겨야지.”

탕!

내 머리로 총탄이 쏘아졌다.

나는 간단히 총알을 피하고 정면으로 질주했다.

상대는 오러를 상당량 소비한 상태. 이제부터는 제대로 싸워 볼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더불어 싸움을 승리로 끝낼 수단도 있다.

타탕! 납탄을 예측해서 피하고, 두 개의 오러홀에서 기운을 주욱 뽑아냈다.

[그림자 검술]의 묘리를 이용한 보법. 현란하게 움직이던 내 신형이 주욱 늘어졌다.

“허튼수작 마라!”

탕! 탕! 탕!

나름 신중하게 한 발씩 끊어서 총을 쏘았으나 모두 내 잔상을 뚫었을 뿐.

파이크의 총알은 닿지 않았다.

급해진 파이크가 리볼버를 재장전하고 뒤로 물러섰다.

판게아에는 레벨 페널티가 없는 대신에 능력치에 따른 페널티가 있다.

이 세계의 법칙에 따르면, 총합 능력치가 나보다 훨씬 높은 파이크는 모든 부분에서 보정을 받게 된다.

그럼 이 격차를 메울 방법은 없는가.

당연히 있다.

더 높은 등급의 스킬과 특성이 있다면 말이다.

특히 전설급 스킬의 경우는 능력치 보정을 씹어 먹어 버릴 수도 있다.

나는 도망가는 파이크를 따라가며 상체와 하체를 일직선으로 펼쳤다.

그림자 검술 1번, [잔상 꿰뚫기].

칼끝이 파이크의 목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상대의 단검에서 피어오른 푸른색 아지랑이. 쥐어짜 낸 오러로 검기를 발현해서 공격을 막아 보겠다는 의도겠지만.

쉬익! 시미터는 채찍처럼 휘어지며 경로를 틀어 그대로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쿠륵…….”

선혈이 얼굴과 옷에 튀었다.

파이크의 입과 목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액체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며 대지를 물들였다.

[스킬: [검귀식: 그림자 검술]의 등급이 ‘D’가 되었습니다. 민첩+5, 체력+3 근력+1]

[연동 스킬: [환영 활보]이(가) 생성되었습니다.]

“휴.”

외마디 한숨을 뱉어 내고.

나는 힘을 잃고 허물어진 파이크의 몸에서 벨트를 벗겨 내 허리에 착용했다.

파이크의 마공학 리볼버.

아이템 설명을 살피니 능력치는 따로 올려 주지 않았지만, 워낙 기본 성능이 좋아서 문제는 안 되었다.

나는 슬쩍 총을 꺼내 요리조리 살펴보고 다시 총집에 넣어 두었다.

그림자 검술이 소 잡는 칼이라면, 마공학 리볼버는 닭 잡는 칼.

다수를 상대하기에는 마공학 리볼버가 더 좋았다.

‘압축 주머니에는 엘릭서가 다섯 병이나 있었지?’

작은 갈색 주머니.

이건 마도의 나라인 시타델에서 제작한 마법 물품이다.

갈색은 보급형을 의미하며, 대략 100킬로그램 상당의 물건은 공간과 숫자에 제약을 받지 않고 원상태 그대로 저장한다.

게다가 입구를 최대한 늘리면 제법 커다란 물건도 충분히 넣을 수 있다.

“앞으로 낑낑대며 돌아다닐 일은 없겠네.”

이로써 목표는 전부 완수.

나는 바닥에 박힌 클리프의 대검과 빵빵한 배낭 두 개를 집어넣고, 안에서 빨간색 회복 물약을 꺼냈다.

대부분의 공격은 피했어도 팔과 다리에 상처가 많이 있었다.

체력 능력치가 많이 상승한 덕분에 그냥 두어도 저절로 낫긴 하겠으나.

‘그래도 아픈 건 싫잖아.’

회복 포션은 외상과 내상 모두를 빠르게 치료한다.

내상을 입으면 내용물을 마시면 되고, 외상은 환부의 크기에 따라 적정량을 뿌려 주면 되었다.

포션을 모든 상처에 발라준 뒤, 더더욱 난장판이 되어 가는 거리를 지나 노예들이 있는 지하 통로로 향했다.

이제는 아예 포기했나? 북문을 수비하던 레드넥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아지트에서 철수하는 듯 보였다.

“나도 태워 줘. 너희만 타고 가는 게 어딨냐!”

“마차가 가득 찬 걸 어쩌라고. 다른 데 가서 더 찾아보든가.”

“젠장, 마차랑 말은 어디 간 거야?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잖아.”

뭐지, 이건 내가 한 짓이 아닌데.

나는 저마다 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레드넥들을 조심스럽게 지나쳤다.

은근슬쩍 코너를 돌아 지하 통로에 들어서려는 그때.

“보안관보님.”

간신히 귓바퀴를 타고 들어올 만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대화했던 노예와 같은 울림에 나는 고개를 틀어 숨어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저 양반 이름이 뭐였더라.

“……헤리스 씨, 여기서 뭐 하십니까. 옷이랑 붉은 스카프는 웬 거고요.”

“보안관보님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러면 움직이기도 편하고요.”

“확실히 그렇긴 하죠. 그래서 다른 분들은요?”

“말과 마차를 몰래 끌어와 남문 빈 공터에 숨겨 놓았습니다. 같이 가시죠.”

호오, 생각보다 똘똘한데?

이런 잔머리가 있으면서 노예로는 왜 잡혔데, 라는 말을 삼키며 나는 엄지를 세워 주었다.

이제 바람과 함께 사라져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