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로 살아남기-9화 (9/204)

<고인물로 살아남기 9화>

9. 새벽의 축복(1)

1,674마리.

[예리한 감각]에 걸려든 좀비의 숫자였다.

저 많은 인원이 모두 나를 원한다니 이런 관심은 정말 처음이야.

‘다들 잘 따라오고 있나?’

뒤를 돌자 내장과 타액을 줄줄 흘리면서 뛰는 나의 해바라기들이 보였다.

개척지는 이미 지평선 너머의 점이 되어 사라졌고, 내가 전진하는 길에는 개미 한 마리조차 없었다.

당연하지. 저 시체들에게 어그로가 끌리면 보통 귀찮은 게 아니니까.

당초의 계획대로 나는 안전하게 오크들의 영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보통 오크 워밴드는 외부인을 발견하면 따라가서 척살한다.

전사들의 후예라나 뭐라나. 스스로를 전투 민족이라 굳게 믿는 놈들이기에 영역 침범을 큰 수모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프리 패스권이 있다.

“구워어어어!”

“크켁, 크케켁!”

“그르르륵.”

사랑스러운 것들.

싸움에 미친놈들도 정상인으로 만드는 좀비의 무서움이란 정말 대단하다.

저 멀리서 오크 정찰대가 일으킨 흙먼지가 시야에 잡혔다.

최소한 영역을 벗어날 때까지는 나를 경계해야 하니, 놈들은 최대한 거리를 두고 주변을 배회했다.

다른 영역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의 놈들이 같은 짓을 반복하는 구조.

‘좀비가 강하진 않아도 이만한 숫자면 쫄리지.’

좀비 호위대.

오크의 에스코트.

이 환상의 조합으로 무법자나 높은 등급의 마물들도 나를 건들지 못한다.

판게아식 국빈 대접을 받으며 행복한 여정을 즐기던 그때.

“어어? 야, 어디 가냐!”

일부 좀비들이 갑자기 옆으로 쓱 빠졌다.

이 충성심 없는 팬들은 수시로 근처 무언가에 반응해서 대열을 벗어난다.

어디다 한눈을 팔아?! 너희의 아이돌은 바로 나라고!

나는 주머니 안에서 수류탄을 꺼내 핀을 뽑아 던졌다. 폭탄은 무너지던 좀비 군집의 외곽으로 정확히 떨어졌고.

쾅!

삐져나온 좀비 일부가 폭발에 가로막혔다.

중간에 이탈하는 의리 없는 놈들은 솔직히 뾰족한 수가 없다. 이렇게 최대한 관리를 해서 그 숫자를 줄일 뿐.

폭죽놀이가 끝나자, 속보로 움직이는 말발굽 소리와 좀비 울음만이 고막을 건드렸다.

태양은 중천에서 내려오며 퇴근할 눈치만 봤으며, 후끈했던 대지의 열기도 주춤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꽤나 지났는데…… 개척지는 잘 마무리됐겠지?’

아름다운 동행이 시작되던 순간.

나는 의도적으로 군집의 일부를 개척지로 향하도록 흘려 놓았다.

그 수는 대략 200마리. 한 달 가까이 수련한 국밥이의 실력이라면 능히 상대하고도 남는다.

솔직히 말하면 전심전력으로 싸워야 할지도?

‘검성이 있으니 죽지는 않겠지.’

아무튼, 이참에 열심히 실력을 가꾸라는 의미가 담긴 선물이다.

겸사겸사 스칼렛도 힘을 각성해 주면 더할 나위 없고.

따지자면 남의 걱정이나 하고 있을 때는 아니지만, 워낙 상황이 안정적인지라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이동은 말이 대신해 주고, 주변의 위협은 좀비와 오크 워밴드가 모두 해결해 준다.

진짜 날로 먹네. 너무 계획대로만 되니까 심심할 지경이잖아.

[침.착.해]의 효과인 걸까, 혹은 드디어 미쳐 버린 걸까?

아마 내가 워낙 적응력이 뛰어난 탓이리라.

나는 지극히 객관적인 결론을 내리고, 무난하게 새로운 워밴드의 영역에 들어섰다.

그러자 이 편안한 여행에 불쑥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린간! 여기는 우리 검은 이빨 부족의 영역이다!”

꽤 먼 거리에서 거대한 오크 하나가 거대한 전투 망치를 회전시키며 함성을 내질렀다.

그 뒤에는 대장의 함성에 환호성을 내는 세 얼간이도 보였다.

그래, 이쯤에서 그로탄의 정찰대가 등장할 줄 알았지.

뒤에 따라오는 좀비 군집이 보일 텐데도, 저 무식한 놈들은 내 정면에서 일직선으로 질주해 왔다.

“나의 친구, 그로탄! 만나서 반가워!”

나는 우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팔까지 크게 흔들며 웃어 보이자 그로탄도 멋쩍게 화답해 주었다.

“어, 어?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건가, 린간!”

“전사장님, 아는 놈입니까?”

“전사장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니, 친구나 적이 분명합니다!”

“당연히 친구가 아니면 적이지, 이 멍청아! 전사장님, 무조건 돌격입니다!”

광전사 그로탄과 그 똘마니들.

검은 이빨 부족의 족장, 그로탄은 별명에 걸맞게 폰허부와 비슷한 계열이다.

아직 전사장이라는 걸 보니 족장은 안 된 건가.

‘하긴 게임 튜토리얼에 올 지역은 아니니.’

그로탄은 타고난 싸움꾼이다.

플레이어는 오크들의 영역을 지나다가 이놈들을 만나서 자웅을 겨루게 된다.

대결에서 이기면 동료로 영입할 수 있으며, 이 주변을 빠삭하게 알고 있기에 다른 워밴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선택지도 열린다.

물론, 저놈의 워밴드에 도움을 요청해 ‘레드넥의 소굴’을 공격하는 분기도 생기고.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요만큼도 없다.

놈들이 [투척]의 사정거리에 들어올 즈음, 나는 수류탄의 안전핀을 제거하고 정확히 그들의 이동 경로로 던졌다.

“전사장님, 뭔가 날아옵니다!”

“나도 봤다! 린간! 이건 친구에게 주는 선물…….”

콰앙!

편대를 이루고 돌진하던 4인의 오크가 동시에 하늘을 날았다.

늑대들은 모두 즉사, 운 좋게도 오크들은 살아서 땅에 처박힐 수 있었다.

동료인데 뭐 어쩌라고. 나한테는 1,600마리가 넘는 호위대가 있다.

저놈을 제압하려면 말에서 내려야 하고, 그 뒤에는 꼼짝없이 오체분시로 이어지는 거다.

그래서 나는 완전하지는 않아도 그로탄을 동료로 영입할 방법을 만들었다.

“크아아악! 이게 무슨 짓이냐!”

바닥에 거꾸로 꽂힌 그로탄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충격으로 나가떨어지는 순간에도 무기는 놓지 않았다. 진짜 대단한 근성이네.

나는 대답하는 대신에 손을 흔들며 말을 타고 유유히 지나쳤다.

“이놈! 친구라면서 이게 무슨 짓이냐!”

“전사장님, 뒤에 좀비들이 옵니다.”

“제길, 전투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오크 대 좀비.

가슴이 웅장해지는 대결이 펼쳐졌다.

나는 안전하게 거리를 벌리고 말에서 내려 탈것에게 휴식을 주었다.

푸르르르. 말이 투레질하며 지친 기색을 내비쳤다. 하긴 여태까지 속보로 쭉 움직였으니 힘들 만도 하지.

“이제 한 네 시간 정도만 가면 되니까 조금만 참아라.“

나는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그로탄이 만들어 준 휴식 시간을 즐겼다.

“끄아아악!”

잠시 뒤.

그로탄과 그의 정찰대가 단말마와 함께 쓰러지자 좀비의 산이 그 위로 솟아올랐다.

역시 3티어 동료는 이 정도구나.

두 주인공을 제외하고, 유저들은 동료의 티어를 표로 작성해 돌려 보곤 했다.

활용성과 잠재력이 다 좋은 1티어.

당장 쓸모는 없어도 잠재력이 좋은 2티어.

적당히 쓰다 버릴 3티어.

참고로, 원래 루카도 3티어였다.

이제는 전설급 스킬을 익혀서 잠재력만큼은 정점을 찍어 버렸지만.

그으으으. 마침내 좀비의 산이 무너지고.

그 사이에서 그로탄과 부하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좀비 수십 마리가 분쇄됐으나 그에 필적하는 전력이 추가된 셈.

개척지에서 가져온 음식으로 요기를 끝낸 나는, 다시 말에 올라타 개판이 된 군집으로 다가갔다.

“자자! 주목! 다시 이동해야지.”

오러를 사용해 성량을 키우자 흩어졌던 좀비들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이제 막 신입 동료가 된 그로탄이 새빨간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좀비들이 두려운 이유는 개체의 강함이 아니라, 저 무시무시한 번식력에 있다.

하급 저주라도 대응 수단이 없다면 무조건 당해야만 하니까.

* * *

이름 없는 바위산.

남쪽과 북쪽에 뚫린 입구를 제외하면 출입조차 불가능한 천연의 요새.

그 안에는 자칭 자유의 투사들이 무역 연합의 눈길을 피해 만든 암시장이 있다.

“오늘 야식은 뭐냐.”

“있겠냐? 금방 저녁 먹어 놓고 뭐라는 거야.”

“이 졸라 조용한 동네에서 썩어야 하는데, 먹는 재미마저 없잖아.”

“심심하면 카드라도 치든가.”

“그것도 질린다.”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성벽 위에서 두 사내가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를 공격할 간 큰 놈이 있을까.

한동안 총질 한번 못해 본 무법자들은 탄환이 몸 안에 쌓인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무역 연합은 아직 이 은신처의 존재를 몰랐으며, 그 외의 세력은 이 방벽의 상대가 전혀 못 되었다.

가끔 오크 워밴드가 덤벼도 막강한 화력에 쫓겨날 뿐. 이 탓에 소속을 불문하고 많은 장물아비가 이곳을 들렀다.

“에라이, 잠이나 자야지.”

“야야, 걸려도 난 모른다.”

“해가 져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어쩌라고. 어차피 입구 두 개만 지키면 되잖아.”

“입구에 있는 놈들만 뺑이 치는 거지.”

남자는 돌벽에 기대어 앉은 동료의 말에 수긍하며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은 황무지,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 밤하늘의 별을 세는 것도 잠시.

경비병은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보더니 목을 쭉 뺐다.

“응? 저게 뭐야?”

“지랄하지 마라. 안 속는다.”

“잔다는 새끼가 왜 깨어 있냐. 아니, 그것보다 진짜라니까.”

“에휴, 내가 또 속아 준다.”

돌벽에 기댔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고정시켰다.

“뭐래, 아무것도 안…… 어어? 저거 그거잖아, 그거!”

지평선 쪽에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

경비병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상사태임을 알리는 종으로 달려갔다.

뎅뎅뎅뎅.

레드넥의 소굴은 일시에 혼란에 휩싸였다.

고작 워밴드의 습격으로는 비상종이 울리지 않는다. 이 소굴 전체가 위험에 빠질 거대한 공격이 아니라면.

바위산 협곡 내부의 분지 지형.

상인들은 연합의 공격이라고 단정 짓고 서둘러 짐을 쌌다.

“이게 무슨 일이오? 여긴 안전하다며!”

“제길, 연합에게 들키면 우리 컴퍼니는 끝이라고!”

“북문이 안 되면, 남문으로 나가야겠소. 어서 안내해 주시오!”

특히 무역 연합에서 건너온 밀수업자들이 법석을 떨었다.

법과 규범을 개뼈다귀보다 못하게 여기는 동네라도, 대척점에 선 반동분자와의 거래는 엄벌의 대상이니까.

침몰선 속의 난장판처럼 허둥대는 시장 거리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탕! 혼란을 정적으로 뒤바꾼 한 발의 총소리.

일대를 휘어잡은 남자, 파이크는 레드넥의 간부이자 이 암시장의 책임자였다.

“상인 여러분들, 모두 침착해 주시지요. 현재 이 바위산은 완전히 통제하에 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남자의 정중한 말투와 다르게 분위기는 강압적이었다.

뭐라 한마디 말해 볼 만도 하건만, 노발대발하던 밀수업자와 용병들도 어쩐 일인지 조용히 물러섰다.

파이크의 벨트에 있는 마공학 리볼버,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초인의 상징을 보고 꼬리를 내린 것이다.

“이견이 없으시다면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상황이 안정되자 파이크는 고객들에게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현재 북문 쪽으로 좀비 군집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상황은 잘 통제 중이고 별 탈 없이…….”

쾅! 콰앙! 콰과과광!

섬광, 그리고 화염.

근처에서 터진 연쇄 폭발에 모두 몸을 움츠렸다.

파이크의 말을 잘라먹은 폭발음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이건 유폭된 소리가 아닌가.”

한 상인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을 흘렸다.

좀비들이라며, 왜 아지트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건데?

불신의 눈초리가 파이크를 덮쳤고, 이내 붉은 스카프를 두른 병사가 뛰어왔다.

“대장님, 서쪽 무기고가 갑자기 폭발했습니다.”

“이유는 뭔가?”

“인원 대부분이 북문에 집결해 있어서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무기고에서…….”

펑! 퍼퍼퍼펑!

번쩍하는 섬광이 또 다른 무기고의 위치에서 터져 나왔다.

탄약과 폭발물이 가득 든 창고의 위치는 당연히 보안 대상이다. 한데 어떻게 두 개의 무기고를 정확하게 노린 거지?

침착함을 유지하던 파이크조차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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